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하루,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 밖으로 한 줄기의 햇살이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뇌리에 박혔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일을 안 하고 있다면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고 싶을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업무는 뒷전, 나만의 소소한 버킷리스트를 쓰고 있었다.
햇살이 맑은 날, 근처 공원에 산책하듯 걸어가 커다란 나무 밑 그늘에 앉아 책 한 권 다 읽기. 걸어가는 도중에 맛있는 카페에 들러 아이스티를 사들고 쪽쪽 마시면서 읽기. 앉아있는 그동안이 지루하지 않도록 이왕이면 눈을 뗄 수 없는 추리소설이라던가 가벼운 에세이가 좋겠지. 그리고는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저녁 장을 보러 가기.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사서 저녁에는 보기에도 파릇하고 건강한 샐러드를 만들어서 먹기. 아삭아삭, 사각사각, 야채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과일도 달콤한 맛을 위해 조금 첨가, 볼 가득 담아서 기분 좋게 먹기. 그러고 나면 그 날 하루동안 자연에서 디톡스 한 것만 같은 기분일 거야.
당일치기로 가까운 곳 여행 가기. 운전해서 두 시간 이내에 있는 곳, 이왕이면 바다로 가는 것이 계획. 일단 집에서부터 예쁘고 맛난 도시락을 싸서 가기. 아무래도 바닷가니까 모래가 날릴 수도 있으니 메뉴로는 샌드위치가 좋겠지. 잡기에도 편하고, 먹기에도 편하고. BLT라던지 에그 샐러드로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핑거푸드 같은 메뉴도 있으면 좋겠다. 또, 인공적인 주스가 아닌 생과일주스도 준비해 가야지. 목마를 수 있으니까.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그리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였으면 좋겠다. 돗자리나 담요를 깔고 앉아 준비해온 도시락을 맛있게 냠냠 배불리 먹기. 그리고는 바닷바람 쐬면서 가만히 앉아있기. 아니면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고전을 가져가서 읽어보기. 읽으려고 해도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던 책들을 분명 여기서는 더 잘 읽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도전해보기. 그러다가 노곤해지면 잠깐 잠이 들 수도 있고.
조용하지만 약간의 백색소음이 있는 카페 찾기. 사람이 너무 붐벼도 안되고 너무 없어도 별로다. 적당히 사람들로 가득 찬 그곳에 아침 일찍 도착하기. 우선 뱃속을 든든하게 해줘야 하니까 그린티 라테 같은 것이 좋겠다. 난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까, 커피를 제외한 메뉴에서 고르려면 그린티 라테가 제일 나은 선택. 그곳에서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쭉, 라테와 머핀 따위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하루 종일 글쓰기. 그냥 떠오르는 잡생각을 글로 풀어내기.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구경하면서 글로 써보기. 저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누구와 통화하면서 저렇게 환히 웃고 있을까, 열심히 컴퓨터로 작업하는 그녀는 과제 중인 걸까, 아니면 카페에서 일하는 중인 걸까. 바쁘게 커피를 들고 나가는 저 남자는 어딜 그리 바삐 가실까. 일상에 더 관심을 가지고 모든 순간을 글로 풀어보기.
서점 투어 하기. 특별히 가고 싶은 서점들은 캐나다 빅토리아 섬에 있는 Munro's Bookstore,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The Last Bookstore, 그리고 뉴욕에 있는 Strand Bookstore. 노벨문학상을 받은 앨리스 먼로의 전 남편이 운영하는 서점은 처음 시작할 때의 사람들의 우려를 딛고 이제는 하나의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고 하는데, 꼭 가보고 싶다. 앨리스 먼로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는 이혼한 사이였지만, 가장 좋은 자리에 그녀의 책을 진열하고 가게 앞 유리창의 그녀의 수상을 축하하는 데코레이션을 한껏 해놨었다고 한다. The Last Bookstore은 독립서점으로 시작해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서점이 된 곳. 책으로 만든 여러 가지 예술품도 많아서 꼭 가보고 싶다. 유명한 책 터널은 물론, 천장에 매달린 책들도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은 광경임이 분명하기에. 화려한 뉴욕에서 88년이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Strand Bookstore도 빼놓으면 섭섭한 곳이다. 새 책과 헌 책을 같이 파는 게 독특하고, 이 곳에 있는 책들을 다 펼쳐놓으면 길이가 18 mile에 달한다고 해서 유명하다. 미국이나 캐나다뿐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최근 몇 년 들어 많이 생겨난 독립서점들을 쭉 순례하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대학생활을 했던 보스턴에 가서 그때의 느낌을 다시 한번 느껴보기. 학교 근처에서 흔히 먹던 쌀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학교 앞 만남의 광장이었던 스타벅스에서 마실 것을 사서 찰스강까지 걸어가기. 힘들 때마다 가서 하염없이 앉아있곤 했던 찰스강에서 오롯이 오후의 시간을 나 혼자서 온전히 보내기. 넓디넓은 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항상 앉아있곤 했던 그 부두에 다시 앉아보기. 불안한 진로에, 보이지 않던 미래에, 눈물 났던 첫사랑에 위로가 돼주었던 그 장소를 다시 한번 가보기. 돌아오는 길 중간에 있는 뉴베리 길도 다시 걸어보고, 자주 갔던 컵케이크 가게에서 컵케이크 하나 베어 물면 너무 행복할 거야. 저녁에는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중국음식점에서 맛있게 매운 볶음밥을 시켜먹고, 디저트로는 근처 카페에 유명한 진하디 진한 핫초콜렛도 마시기. 그때의 나로 온전히 돌아가기.
비 오는 저녁, 집에 불을 다 끄고 영화보기. 우선, 준비물은 담요와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들고 오는 것이 포인트. 담요를 무릎에 덮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놓고 숟가락으로 퍼먹으면서 영화를 보고 싶다. 비 오는 날, 밖은 어둡고 춥고, 빗소리는 주룩주룩 들릴 때 보기 좋은 영화는 해리포터 시리즈.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1-3편까지가 적당하고 좋다. 아직 그때는 해리를 비롯, 아이들이 어려서 너무 귀엽고, 또 호그와트에 들어가면서 준비물들을 사고, 우왕좌왕, 마법사가 되기 위해 성장하는 그 과정이 너무 재밌으니까. 담요 덕분에 따뜻하고, 아이스크림 덕에 적당히 시원하고. 그러다가 스르르 잠드는 것도 괜찮아. 아이스크림만 냉동실에 넣는 걸 기억한다면.
일본 야마노우에 호텔에 숙박하기. 여행은 덤이고, 목적은 저 호텔에 숙박하는 것. 일본 작가들이 편애하는 호텔이라는데, 집중해서 글을 쓰기 위해 장기 투숙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 이박삼일이라도 머물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 기운을 얻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랄까. 작은 테이블이 아닌 큼지막한 책상에 빛을 잘 내는 램프라면 나라도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벚꽃 흩날리는 봄, 일본으로 여행 가기, 아니 야마노우에 호텔 가기.
업무 중 생각날 때마다 적어놓은 버킷 리스트가 꽤 길어졌다. 다시 읽어보니, 사실 지금이라도 조금만 시간을 내면 할 수 있는 것이 충분히 있는데 왜 시도도 못하고 있는 건지. 시간이 날 때 뭘 하나, 내 자신을 돌아보니 핸드폰으로 인터넷 서핑,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 티비 보기, 유튜브 보기, 책 정리하고 또 정리하다가 잊고 있었던 책이 나오면 한 움큼 빼놓았다가 또 기억에서 잊어버리기 등등 쓸데없이 낭비해버리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그랬던 나였으면서 왜 시간이 나면 할 것들 리스트만 주구장창 쓰고 있는 걸까, 나라는 인간은 왜 매년 이럴까, 발전이 없는 건가 하는 자학을 하며 업무에도 집중하지 못한 나.
이번 주말에는 카페에 가서 글을 써야겠다. 꼭 그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