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빨리 알아버린거지, 일곱살의 나는
일곱살이었던 해의 크리스마스였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가까워져오면 내가 다니던 꽃동산유치원에서는 학부모님들께 연락을 해 크리스마스 행사 때 쓸 선물을 아이 편에 보내달라는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름이 꽃동산유치원이었던 만큼, 각 반들의 이름도 꽃 이름을 땄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진달래반, 개나리반이었으니까, 지금 이 이야기는 내가 일곱살, 개나리반이었을때의 크리스마스였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생일 선물이던, 어린이날 선물이던, 크리스마스 선물이던 뭘 갖고 싶냐고 물어보면 난 언제나 책이라고 답했었다. 장난감, 인형, 레고, 다 하나도 관심없었다. 그냥 책을 주세요, 전 책이 좋아요. 아마 부모님께서는 그런 날 보고 고민할 것 없이 바로 책으로 결정하셨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도 책을 받고, 산타 할아버지로 가장한 부모님의 선물도 책을 받으면 틀림없이 엄청 기뻐할거야, 라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이 불행의 시발점이었구나,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순수한 아이였다. 그건 착한 일 한 아이에게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신다는 부모님의 반 협박같던 말씀도 큰 몫을 했다. 울어도 안되고, 동생도 잘 보살펴야 하고, 동생이 내가 읽던 책을 뺏어가도 꿀밤 한 대 쥐어박아서도 안되며, 나를 때리는 만행을 저질러도 너그러이 용서해주는 마더 테레사 뺨치는 언니가 되어야지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신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그 때의 나, 참 많이 노력했었는데.
유치원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 큰 교실에 여러 반이 함께 모였다. 선생님들은 안 그래도 집중력이 짧은 아이들의 시선을 모으려 분주하셨다. 우리 유치원 어린이들이 한 해 동안 말 잘 듣고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기에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모두에게 선물을 주러 이렇게 행차하셨다는 내용의 선생님의 말씀이 끝난 후, 우리는 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산타 할아버지를 불렀다. 문이 열리고, 누가 봐도 어색한 걸음걸이로, 누가 들어도 어색한 웃음소리로, 아마도 지금 내 생각으로는 알바생이 아니었을까, 산타 할아버지 복장에 수염을 붙인 남자가 큰 선물꾸러미를 짊어메고 들어왔다. 그래도 어렸던 나의 눈에는 빨간 옷에 수염, 모자까지, 완벽한 산타 할아버지가 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났다고 보였으니 적어도 내게는 그날의 이벤트는 성공이었다.
가만히 잘 앉아있어야 선물을 주신다는 말에 우린 언제 우리 이름이 불릴까, 기대감에 초조했다. 영겁의 시간이 지났을까, 적어도 어린 나에겐 그렇게 느껴진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산타 할아버지가, 그가 내 이름을 불렀어! 나는 총총걸음으로 아이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가 산타 할아버지께서 준비해주셨다고 믿은 선물을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만져보나마나, 사이즈로 보나마나 이건 책일거야, 벌써 기분이 설레고 좋았다. 선물을 뜯으니 아니나 다를까, 책이었다! "바다는 왜"라는 제목의, 과학학습 만화였는데, 바다에 사는 여러 동물들, 또 바다에 관한 과학상식들을 재미나게 만화로 풀어낸 책이었다. 내 마음에 아주 쏙 들었다.
빨리 집에 가서 엄마한테 자랑해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집에 가자마자 엄마께 선물받은 책을 자랑하고 읽기 시작했다. 너무 재밌어서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산타 할아버지는 어떻게 내가 이렇게 마음에 드는 선물을 준비하셨지, 신기했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온 날, 항상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가셨던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일찍 잠이 들었다. 난 잠 안자고 기다려야지, 자는 척 하다가 새벽에 깨서 산타 할아버지를 볼거야, 이런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던, 좋게 말하면 순수했던, 나쁘게 말하면 요령 없이 FM이었던 아이였다. 빨리 내일 아침이 되었으면, 이런 생각이나 하며 잠이 들었던 아이였다. 진짜 크리스마스에는 얼마나 더 큰 선물을 주시려나, 기대감에 날아갈 것 같았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날이 밝았다.
얼른 일어나 눈 비비고 머리맡을 살폈다. 선물이 없었다. 항상 그 자리에 놓여져 있었는데, 없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내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가셨는데, 왜 이번 해는 없지.
얼굴이 울상이 되어가지고는 안방으로 달려갔다.
"엄마, 엄마! 없어, 없다구!"
"뭐가 없어..."
"선물, 선물이 없어! 산타 할아버지가 안오신거야? 나 말도 잘 듣고, 착하게 지냈는데, 왜 산타 할아버지 안오신거야?"
그 때의 엄마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얼굴에 마치 단어가 써있는 것 같았던, 내가 1년 중 하필 오늘, 무슨 짓을 한거지, 그런 표정. 그 어린 나이에도 얼굴 표정에서 아뿔싸, 망했다라는 자괴감과 이 사태를 수습해야만 한다는 굳은 결의를 읽을 수가 있었다.
"어...... 저... 그게..."
이 때부터 울음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왜 나 선물 없어, 왜 없냐구!"
"......"
"산타 할아버지 왜 안왔어, 엄마 못봤어? 어젯밤에 못본거야?"
엄마는 침대에서 일어나, 장롱으로 걸어가며 말씀하셨다.
"아, 맞다! 산타 할아버지가 너 일어나면 주라고 엄마한테 선물을 주고 가셨어. 그래서 머리맡에 없었던 거야."
"근데,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항상 내 머리맡에 놓고 가셨는데, 왜 이번엔 엄마한테 주고 가셨어?"
"모르겠어, 근데 엄마한테 주고 가셨어. "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장롱문을 열고 장록 구석에 깊숙히 숨겨놓았던 선물을 꺼내주셨다.
전집이었다.
과학학습 만화였는데, 10권 중 1권이 없었다.
1권부터 10권까지는 있는데, 딱 한 권, 7권이었던 "바다는 왜"가 빠져있었다.
일곱 살 나이의 어린 아이는 그 날 감히 5%정도의 순수함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그 때 나 일곱살 때, 엄마가 장롱에서 선물 꺼내줬던 거 기억나?"
"그 얘기 좀 이젠 좀 잊으면 안되겠니?"
"왜 그 때 7권을 빼서 유치원에 보냈어? 10권을 빼면 티가 안나지 않았을까?"
"아, 그냥 니가 7권을 제일 좋아할 것 같아서."
그 해 크리스마스 이후로 난 더 이상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바다를 비롯, 동물, 식물, 우주와 지구에 대한 과학적 상식을 얻었으니, 쌤쌤으로 치는 게 맞겠지. 그래도 살아가다 한 순간, 웃을 수 있는 추억이 생겼으니 그것에 감사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나 덕분일까, 동생은 꽤 일찍 산타의 존재를 알아버렸다. 동생아,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