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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Dec 16. 2016

한 코 한 코 떠가는

뜨개질이 주는 치유의 시간

오랜 시행착오 끝에 나에 대해 발견한 중요한 점은, 난 무언가 반복적인 일을 할 때 그 반복적인 움직임 안에서 위로를 얻고 평안을 찾는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 였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천 번 적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친구의 말에,

"그럼 난 만 번 쓸거야! 그럼 당연히 이루어지겠지?"

큰소리 치며 예쁜 편지지를 사서 그 위에 그 아이의 이름은 정말, 만 번을 적었다.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에 색깔도 맞춰서 빨주노초파남보 그라데이션으로 천 마리를 접어서 병에 넣어줬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무언가를 반복해서 하는 행위를 참 잘한다는 점 하나를 알았다. 지겨워하지도 않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묵묵히. 그러고는 시간이 훌쩍 지난 걸 볼 때 뭔가 뿌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걸.


미국에 와서 받은 스트레스는 말로 할 수 없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특히 머리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어리지도, 그렇다고 성숙하지도 않았던 나이의 나에게는 특별히 배로 힘든 느낌이었다. 그 감정을 치유하는 것이 내게는 숙제이자 일상이었다. 미국에 살면서 지극히 한국인스럽고, 또 한국에 있기에는 지극히 미국인스러웠던 내게 매일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같았다.


누구에게나 힘든 날은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 누군가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마구 쏟아질 것 같은 그런 날.

그럴 때마다 난 실을 집어들고 뜨개질을 시작한다.

코를 잡고, 한 코 한 코 떠가는 그 손놀림에 내 생각들을 맡겨버린다.

바늘을 넣고, 실을 한 바퀴 감아, 다시 바늘을 빼면서 새로 생기는 매듭.

그렇게 내 손놀림에 집중하다 보면, 나를 괴롭혔던 무수하고도 많았던 나쁜 기억들, 고민들, 상처들, 생각들이 하나씩 옅어지고 흐려진다.

매듭 하나 하나에 나쁜 기억도 하나 하나 묶어지길 바라며 떠내려간다.





소파에 앉아 블랭킷을 두르고 한 쪽에는 따뜻한 차나 핫초코를 준비해둔다. 그리고 앞의 커피테이블에는 향이 좋은 향초를 켜두면 더 좋다. 밖에 비가 온다면 금상첨화. 비오는 날만큼 뜨개질이 잘 어울리는 날은 없다. 

날이 추워지는 만큼 친구들을 위해 목도리를 뜨기로 했다. 너무 무겁지 않게, 가볍게 두번 휙 두를 수 있는 크기로 뜨기로 하고, 두툼한 실을 잡아 코를 잡는다. 한 코, 한 코 뜨면서 친구와 나와의 추억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시간이 된다. 그렇게 오롯이 앉아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무언가를 내 손끝에서 만들어내는 그 순간. 

내게는 그 무엇보다 효과적인 내 감정이 치유되는 시간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몇명의 친구들에게 내가 직접 뜬 목도리를 선물했다. 기계로 찍어낸것같이 일정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그 투박함이 더 멋스러울때가 있다고 믿으니까. 이번 겨울은 유독 더 춥다는데, 그들의 목을 따스하게 감싸주었으면.





지금은 코바늘 뜨기를 열심히 연습중이다. 대바늘보다는 확실히 좀 더 어려운 것 같은데, 손에 좀 더 익으면 하기에 더 수월하겠지 생각하며 떠나가는 중. 예쁜 블랭킷을 뜨는 게 다음 목표인데... 내년 겨울보다는 더 일찍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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