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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21. 2020

영화 <불한당>에서 시작한 단상(斷想)들

상황과 맥락 사이

며칠 전 TV 영화채널에서 설경구, 임시완 주연의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을 봤는데 거기에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라"   


상황의 힘을 얼마나 믿니? 누가복음 10장에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온다. 들어는 봤겠지?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마침 여유롭게 여행 중이었기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착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냥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바빴기 때문은 아닐까? 로렌 슬레이터가 쓴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 나오는 유명한 심리 실험 중 하나가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이다. 신학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급한 과제라고 설명하고 A건물에서 B건물로 급히 이동하게 하면서 그 중간에 도움이 필요한 여인을 두었단다. 신학대 학생들 중 착한 사마리아인이 얼마나 있는지 봤더니, 30%가량만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신학대 학생들이라 이 정도의 높은 비율이 나온 것이겠지? 이번에는 반대의 실험도 있었다. 역시 신학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하철 역에서 시험시간이 당겨졌으니 서두르라고 했을 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앞의 실험과 비슷한 비율로 도와주었지만, 반대로 시험시간이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가도 된다고 알려 줬을 때는 도움을 주는 비율이 크게 올라갔다고 한다. 별것 아닌 일도 상황에 따라서는 크게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심각한 일도 상황에 따라선 유야무야 되곤 한다.


아빠가 부산에서 일하던 때였다. 어느 금요일 저녁에 기차 타고 서울 올라가서, 서울역에서 공항철도 타고 홍대입구역으로 가는데, 옆자리에 흑인 미군과 잠깐 얘기를 하게 되었었다. 인천공항까지 얼마나 걸리고 어디서 내리면 되는지 물어봐서 설명해 줬지. 휴가 받아서 필리핀에 일주일간 놀러 간다길레, 부럽다면서 즐겁게 놀다 오라고 서로 잡담을 주고받았었다. 근데, 이 친구의 대형 캐리어 바퀴가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자꾸 굴러가더군.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방해가 될까 봐 가방을 바닥에 눕혀놨었지. 마침 공덕역에서 한잔 걸치신 어떤 아저씨가 탔는데, 맞은편 빈자리 앉으려고 지나가다가 가방이 좀 거슬렸나 봐. 괜히 발로 툭 차며 구시렁거리더니, 나중에는 일어서서 눕혀진 가방과 흑인을 프레임에 넣고 사진까지 찍더군. 아빠도 같이 찍히는 것 같아서 찍지 마시라고 얘기했는데, 두 장 찍어 놓고는 한 장 지우면서 지웠다고 우기길레 한소리 하려다가 참았다. 곧이어 아저씨는 열심히 폰으로 뭘 쓰더군. 아마 자기 페북이나 인스타에 올렸겠지? 제목은 '무식한 흑형', '공공질서 모르는 미군' 뭐 이딴 걸 달면서 말이지. 안타까운 것은 사건의 맥락을 모르면서 눈앞에 펼쳐진 상황만 보고 어떻게 판단을 했을지가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그 판단을 바탕으로 선의인 양 퍼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이런 경우가 참 많지 않나? 과정이나 이유는 묻지 않고 판단하는 것, 비록 정의감에 SNS에 올렸겠지만 그곳에는 그 순간의 상황만 있고 사건의 맥락은 없다. 그 아저씨가 처음부터 같이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면 다르게 행동했겠지?


사실 아빠는 몇 가지 의문이 들기는 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에서 지하철역 앞에 있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가? 사고로 다친 건가? 술에 취해 있는가? 아니면 마약중독자? 그의 옷차림은? 노숙자처럼 보이는가? 너도 당연히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도움을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상황이 좀 복잡해졌지? 아빠가 지하철에서 만난 그 아저씨도 만약 가방 주인이 예쁘게 차려 입고 여행 가는 젊은 아가씨였다면? 아니면 덩치가 엄청 큰 백인이었다면? 혹은 가방을 세워뒀는데 바퀴가 굴러서 그 아저씨한테 굴러갔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몇 해 전부터 지하철 내 임산부석을 핑크색으로 눈에 확~ 띄게 만들었다. 아빠처럼 소심한 사람은 주위에 임산부가 없어도 절대 앉지 못하겠더군. 그게 목적이지. 지정석이라는 게 말이다. 근데, 개인적으로 이런 자리를 만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임산부나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불편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배려의식을 줄이지 않을까? 지하철에 경로석이 양 끝으로 있는데, 그 자리에 앉지는 않지만, 대신에 경로석이 아닌 자리에서는 양보를 하지 않아도 되는 듯한 인식을 심지 않았을까? 혹은 노인들을 양쪽 구석으로 몰아내는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경로석이 아닌 곳에 어르신이 서 있으면 그 어르신이 오히려 눈총 받는 느낌이 들더라고. 젊은 사람들 마음 불편하게 왜 여기 서 있냐는 듯이 말이야. 이제 임산부석이 아니면 임산부에게 양보를 하지 않아도 별로 미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배려가 부족해서 이런 지정석이 생기기지만, 반대로 이런 지정석이 아닌 곳에서는 배려가 더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아빠는 네가 어릴 때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 이런 것들을 많이 가르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너도 좀 컸다고 말로 가르칠 수 있는 때는 지났더구나. 사회 속에서 타인들로부터 공감받고, 배려받는 일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배우겠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겠지. 지정석보다 우선인 건 역시 공감과 배려다.


아빠가 서울로 다시 복귀하고 몇 달이 지난 뒤, 모처럼 친구들과 교대역에서 급 번개로 만나기로 해서 지하철을 탔었다. 시청에서 중간에 갈아타기 귀찮아 2호선 반 바퀴 돌기로 했다. 마침 을지로 3가에서 자리가 나서 편히 앉아 왔지. 책을 꺼내 읽으며 가다가 건대역쯤에서 졸려서 책을 덮고 눈 감고 음악 들으며 가고 있었다. 퇴근시간이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더군. 교대까지 몇 코스 남지 않았을 때 원피스 입은 통통한 젊은 여자가 왼쪽 앞에 섰다. 아무 생각 없이 음악 듣다가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배가 느낌적인 느낌으로 약간 볼록한 것 같다. 혹시 임산부일까 싶었다가도 내 자리가 가운데라 임산부석은 아니니 임산부가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타이트하지 않은 원피스에 발 편한 운동화를 신은 게 또 임산부 같기도 했다. 자리를 양보할까? 근데 만약 "아기 가지셨군요. 여기 앉으시죠." 하며 자리를 양보했는데 임산부가 아니라면(그럼 무엇?) 이 또한 무슨 큰 실례인지. 근데, 진짜 임산부라면? 애매할 때는 그냥 일어서는 게 최선이다. 오른쪽에 50대로 보이는 아저씨의 눈빛도 이 자리를 노리는 듯 자꾸 쳐다본다. 어차피 교대까지 몇 코스 남지도 않았고, 티 내면서 양보하는 것보다 그냥 내리는 척 일어나는 게 자연스럽지. 오른쪽으로 아저씨를 블로킹하면서 일어서 잠시 나갈 길 찾는 척하니 그 여자가 안도하며 앉더군. 난 사람들 틈을 헤집고 문 앞쪽으로 가 섰다. 배려. 가끔은 헷갈리고 어렵다. 만약 지하철을 더 오래 타야 했다면 나는 양보했을까? 그날따라 내가 좀 피곤했다면?


아주 오래전 어느 날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같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데, 엄마가 그날따라 몸이 좀 안 좋았는지 힘들어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근데 한 할아버지가 화를 내더라고. 이 엘리베이터는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한 것인데 왜 타냐고 말이다. 순간 화가 났었다. 할아버지 세금 얼마 내시냐고, 지하철도 공짜로 타시지 않냐고. 맞벌이하는 우리가 합쳐서 내는 세금이 얼만데, 이깟 엘리베이터 하나 못 타냐고 따지고 싶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다. 생글 웃으며 미안하다며 평소에 잘 안타니까 오늘만 좀 타자고 했다. 아마 그 할아버지는 젊은 친구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바람에 엘리베이터는 못 탄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거긴 5호선이라 유난히 깊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아빠는 엄마가 없었으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계속 궁시렁대는 할아버지랑 실랑이를 벌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엘리베이터 탈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겠지.


은행이라는 말은 예전에 중국 난징이 동남아 경제의 중심지일 때 결제수단이었던 은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에서 생겼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듯하다. 현재와 같은 은행업 형태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는 모른다. 아빠는 가끔 은행원들은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의 후예들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잘 알겠지만,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3천 더커트를 빌려 주며 약정일에 상환을 못할 경우 살 1파운드를 베겠다는 인육계약을 했다. 안토니오가 전 재산을 투자한 배가 파선되면서 못 갚자 샤일록은 법원에 안토니오를 고발하고 살을 베겠다고 나섰다. 그 뒤 스토리는 잘 알지? 그 이야기 뒤에 숨어 있는 우정과 사랑, 비기독교인에 대한 멸시와 기독교인들의 사랑이 자기들 안에서만 있는 이중성, 이런 얘기는 문학평론가들이 하는 얘기고, 스토리의 차, 포 다 떼고, 만약에 말이지, 빈털터리가 된 안토니오가 재기할 가능성은 낮아 보이고, 인육이 당시에 비싼 값에 거래될 수 있는 재화라면, 샤일록이 고객의 돈을 받아 운용하고 샤일록의 손실이 고객의 손실로 이어진다면 그의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특히 샤일록 은행에 네가 투자했다면? 사실, 안토니오는 사람이니 판단이 쉽다만, 사람이 아니고 기업이라면 어때? 살 1파운드가 아니고 기업이 가진 부동산이나 중요 자산이라면? 그 결과 사망이 아니고 파산이라면? 은행은 평소에는 평화롭지만, 경제에 위기가 닥치면 늘 그런 일을 하는 곳이다. 그 위기 속에 남의 살 1파운드를 뗄 때마다 자기 살도 1파운드, 아니 10파운드도 떨어져 나간다. 이미 담보도 가치가 폭락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만, 또 모르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진정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사막을 건너는 법... 서영은 씨의 오래된 소설이다. 며칠 전 점심때 커피 한잔 들고 하루하루의 허망함을 잠시 잊고자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한 바퀴 돌다가 무공훈장을 목에 걸고 남루한 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노인을 만났다. 힘없이 걷던 노인은 마침내 눈길이 그의 훈장에 꽂히자 그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순간 빛나다가 금세 낡은 마호가니 빛으로 변하더라. 그때 갑자기 떠오른 소설이 <사막을 건너는 법>이다. 무려 고등학교 때 읽고 토론한 소설인데 생각나더구나. 아빠 기억에 그 소설에서의 사막은 세상이었다. 사막을 건너는 법은 남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었다. 노인은 허망한 현실에서 환상을 만들어 내서 그것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은 노인들에게 그 '잃어버린 훈장'같은 것일지 모른다. 전쟁 같은 인생을 살아와 이제 노인이 되고 보니 세상은 온통 사막 같고 허망하기만 한데, 젊은 날을 같이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된 것은 곧 그 훈장인 것이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만들어온 세상을 부조리하다 폄하하니 그걸 지키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게 거짓이고 스스로 만들어 낸 신념임을 알지만 젊은 세대가 그걸 깨려 한다면, 그건 곧 웅덩이에서 거짓 훈장을 찾아내는 극히 바보 같은 짓일 것이다. 이게 어쩌면 '탄핵무효, 박근혜 석방'을 외치는 원천일지도 모른다. 생떽쥐베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 속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라고 했다. 젊은이에게 사막이란, 즉, 인생은 그 샘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게 인생이란, 그 허망함이란, 결국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샘보다는 신기루가 필요한 것이다. 그게 신기루임을 알지만 그래도 필요로 한다. 생떽쥐베리도 안타깝게 젊은 날에 사망하지 않고 노인이 되었다면 그가 바라보는 사막도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 문득, 어머니의 사막을 건너는 법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꾸만 그걸 내가 거짓이라 깨 보려고 노력했었다는 걸 깨닫는다. 신기루를 안고 사막을 건너가고 있는 어머니에게 난 손을 내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영화 보다가 나온 대사 한마디에서 출발해서 주절주절 생각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대사가 <신과 함께 - 인과 연> 편에도 나온다. 성주신으로 분한 마동석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지 "나쁜 인간은 없다. 나쁜 상황이 있는 거지." 그러나 매번 상황 탓을 하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상황이 모든 것의 핑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사마리아인도 바빴다. 그럼에도 도왔다. 주어진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남에도 돌봐 줄 것을 주막 주인에게 부탁한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아빠는 반만 착한 사람이다. 가끔 상황의 핑계를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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