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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18. 2020

절망이 아닌 선택

실수해도 괜찮아, 

"절망이 아닌 선택" 너무 멋진 문장이지 않니? 아빠가 20대 때부터, 흔히 말하는, '필이 꽂힌' 문장이다. 원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디오도어 루빈이 쓴 <절망이 아닌 선택>이라는 책 제목이다. 책의 원제는 <Compassion and Sefl-hate - An Alternative to Despair>다. 직역하자면 '동정과 자기혐오 - 절망의 대안'쯤 되겠지? 도서 기획자가 그랬는지, 번역을 맡은 소설가 안정효 씨(<하얀 전쟁>, <미늘>,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같은 소설로 아빠의 청춘시절 독서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소설가다.)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책 제목은 정말 잘 뽑았다고 생각된다. <절망이 아닌 선택>이라니, 아빠에게는 이 문장 하나로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미 감동받았었다.  


언젠가 꼭 다시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책인데, 사무실 설차장이 몇 해 전 제일 감명 깊었던 책을 물어볼 때 다시 이 책을 떠올렸었다. 소개가 너무 거창하지? 아빠 서재에 꽂혀 있다. 어쩌면 읽고 실망할 수도 있다. 아빠도 막상 책을 다시 읽어 보니 '이렇게 재미없게 쓴(충분히 의미 있는 내용이지만) 책을 젊은 시절의 내가 끝까지 읽었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마 그때 군대에서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많아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책에 대한 기억도 달랐고 말이지. 


디어도어 루빈에 따르면, 자기혐오/자기증오가 생기는 이유는 '실질적인 자신'이 본인 또는 사회가 기대하는 자신과 차이가 나면서 생기는 왜곡된 인식이 그 출발이다. 특히 이상화(理想化)한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속해있는 사회·문화적인 요구가 본인이 가진 것이 아닐 때,  실질적인 자신을 왜곡하게 되면서 자기를 증오하게 된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굉장히 광범위한 감정과 행동을 구사하는 능력을 가진 반면, 자신의 외부로부터 오는 영향력들에 아주 민감한 특징이 있다. 특히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는 기대가 너무 큰 압력으로 작용하는 경우 이를 다 하지 못하면 자기혐오가 커지게 된다. 무엇이든 틀림없고, 무엇이든 잘하는 본인을 상상하지만 현실은 매번 실수를 반복하는 모습에 자기증오는 자란다. 종교의 경우 (종교에 따라 다르지만) 태생부터 죄의식을 강조하는 것이나 순교를 지나치게 숭상화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를 자기증오에 빠지게 만든다. 


자기증오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삶을 갉아 먹어. 그리고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지. '난 안돼', '난 형편없어'라고 말하고 생각하는 자기조소, 스스로 어려운 상황에 몰아넣고 빠져나가기 어려워지면 스스로를 비웃고 비판하는 자기 징벌, 불가능한 업무를 스스로 떠맡고, 실패가 뻔히 보이는 상황으로 들어가거나, 완벽성이 평균 수준이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울증은 어쩌면 자기증오의 마취제 같은 것이다. 내적인 심리 부조화를 우울증이라는 형태로 드러냄으로써 자기증오를 증폭시킨다. 궁극적인 자기증오는 결국... 자살이다. 


융 심리학에서도 청소년기를 '영웅적 사고'를 시작하는 시기로 설명한다. 어린 시절 주입되는 공주, 왕자, 슈퍼맨, 챔피언이 되는 환상은 오래도록 무의식에 남아 전지전능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지. 사람은 의외로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못하다. 완벽한 성생활에 대한 환상도, 완벽한 독립성에 대한 환상도, 완전한 의존심에 대한 환상도 모두 무의식에서 작동한다. 


아빠가 기억하는 나 자신에 대한 첫 번째 자기증오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체육시간에 야구를 하고 있었고, 마지막 회 투 아웃 만루 상황에 아빠가 타석에 들어섰었다.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풀 카운트. 영화 같지? 체육시간 끝나는 종소리는 이미 울렸고, 투수는 공을 던졌다. 공은 느리게, 그리고 몸 쪽으로 약간 높게 들어왔다. 아빠는 홈런을 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헛스윙. 상대팀은 환호했고, 우리 팀은 실망했다. 나도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때 그 친구들한테 다시 얘기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빠에게 이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난 영웅이 아니었다. 슬펐다.   


"인간이라는 조건이 지닌 복합성과 그것의 여러 다양성과 역설적인 면모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자아를 받아들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가능성을 배제하게 된다. 사람들은 착하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존재가 아니고, 똑똑하거나 멍청한 존재가 아니고, 가장 훌륭하거나 가장 흉악하지도 않으며, 가장 따분하거나 가장 매혹적이지도 않고, 가장 비겁하거나 가장 용감하지도 않다. 우리들은 '가장' 어떻지도 않고, '최고'로 어떠하지도 않으며, 전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모든 특성이 광범위하게 배합된 존재다. 우리들은 저마다 지극히 다양한 인간적인 조건의 모든 양상을 보여주는 증거와 빛깔을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든 활동과 조직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루빈은 그렇게 자기증오에 절망하는 대신 Alternative로서 "관용"을 말한다. 관용은 자기증오에 대한 하나뿐인 해독제이며, 신경증적인 절망이 아닌 인간의 유일한 선택이요 특권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자기를 구제하는 인간적인(신이 내린 게 아니라) 은총이 곧 자비다. 그리고 이 자비로운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고 증오는 학습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가끔 우린 타인에 대한 관용에 대비해 스스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관용의 첫걸음은 역시 자신이 '자기증오'에 빠져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초조해질까 봐 초조해지고, 우울해질까 봐 우울해지는 짓을 하지 말자. 그리고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명예로운 지위나 신분을 자신에게 결부시키는 그릇된 관념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어야 한다. 내가 그때 했던 행위는 내가 그것을 할 때의 최선의 상태에서 행한 나의 표현이다. 그 당시의 최선이었다. 물론, 그것이 영원히 최선이라는 것은 아니다. (혹시 기회가 되면 '동물원'이라는 그룹의 세 번째 노래 앨범 '세 가지 소원' 중 세 번째 소원의 내레이션을 들어보렴.)  


결론적으로 디어도어 루빈은 사람이란 완전할 필요가 없으며. 오늘부터 당장 그대 자신을 좋아하기 시작하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보다 더 훌륭해지려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고, 모든 상황에서 뛰어난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실패와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빠는 초등학교 때부터 말을 가끔씩 더듬었다. 믿어지지 않지? 스님이신 아빠의 외삼촌이 말을 심하게 더듬었는데(신기하게도 불경을 외울 때는 전혀 더듬지 않으신다.), 몇 달간 같이 살면서 큰아빠와 아빠가 따라 하다가 말을 더듬게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근데, 자꾸 반장이나 부반장을 맡게 돼서 매 수업시간마다 곤욕이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차렷, 선생님께 경례" 이 말을 못 해서, "차.. 차차차 차렷..."이러고 있었다. 그 후 많이 고치긴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서는 것부터 해서, 무대와 마이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건 내가 바라던, 상상하던 내가 아니었다. 절망했냐고? 아니다. 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남들은 모르는 사투가 계속되었지.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아빠는 고등학교 때 도서부였다. 그 당시 고등학교 연합 독서토론회를 학교마다 돌아가면서 열었었다. 독서토론회가 열리면 시내 전체 고등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물론, 여고생들도.(그게 목적인 친구들이 대부분이긴 했다.) 많은 학교에서 모인 200여 명 앞에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이 매주 또는 격주마다 있었다. 여전히 긴장할 때면 말을 더듬긴 했지만 확실히 나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고, 1993년 군대 정훈관실에서 <절망이 아닌 선택>이라는 책을 만났었다. 그리고 나를 설명하는 책이 되었다, 제목만 그랬다. 아빠는 사실 스스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냥 극복하려고 발버둥 쳤다. 


오히려 더 혹독한 상황으로 나를 밀어 넣고 싶었다. 아빠는 광고회사 취직을 위해 노력했었다. 사실 미친 짓이었다. 광고주 앞에서 광고기획을 프리젠테이션 하는 AE를 지원하고 있었거든. 긴장하면 말 더듬는 사람이 PT를 주 업무로 하는 직업을 가지겠다고 생각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는 했다. 제일기획이 을지로에 있던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한번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일정 변경 요청을 제대로 전달을 못해서 혼나기도 했다. 의도치 않게 금융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마케팅 과목만 열심히 듣고 다니느라 회계원리도 D 학점으로 졸업한 사람인데, 외화 재무제표를 관리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경영학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절망하지 않았고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열심히 하는 것을 선택했다. 3개월 동안 늘 밤 12시까지 남아서 실무와 더불어 회계학 공부를 했다. 그 뒤로 IFRS 도입 전까지 최소한 외환 관련 회계는 회사 내에서 제일 전문가가 되었었다.    


해외투자를 담당할 때 CFA에 합격했다. 해외 브로커들한테 최소한 금융과 관련해서 '바보'소리는 듣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후 아빠는 남들 앞에 다시 서기로 했다. CFA협회에서 교육센터 창립멤버로, 강사로 위촉받아 10년 넘게 강의를 했다. 첫 강의를 잊을 수 없다. 크레듀에서 요청받아 갔는데, 150여 명이 강의실에 모여 있었다. 청심환 한 알 먹었지만 벌벌 떨면서,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가끔 말도 더듬으며 강의했었다. 한 수강생이 내 얼굴 보면서 한숨 지었을 때 정말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자기증오에 빠지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더 잘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몇 번 더 하다 보니 강의하면서 여유도 생기고 사람들 얼굴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말 더듬는 횟수는 크게 줄었다.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 말을 더듬지 않는다. 나름 강의 잘한다고 칭찬도 듣고, 아빠 강의를 듣고 공부해서 합격해서 아빠가 다니는 회사에 들어왔다고 인사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아빠가 말더듬이였다고 말하면 이제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빠가 자기증오를 극복한 것은 관용일까? 최소한 인간적인 조건은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절망 대신 관용을 택했다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선택했다. 그게 아빠에게 "절망이 아닌 선택"이었다. 최소한 기대치가 주어지면 넘어설 수 있도록 노력은 해 봤다. 과도하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기대치는 긍정적인 역할도 분명히 한다. 먼저 기대가 주어지고, 그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몰입을 할 때, 그리고 그 몰입이 자신의 역량과 만나서 성과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아빠에게 주어진 기대치를 모두 넘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덜 자기증오에 빠진 이유는 내가 세운 기대치든, 사회적으로 받는 기대치든, 최소한 스스로 도달하고 싶은 기대치였다는 것이지 않을까. 최소한 강요받은 기대치는 아니었다. 물론, 아빠도 은연중에 여전히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아직도 자기증오적인 생각을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남은 삶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아빠는 최소한 우리 딸에게는 과도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도 혹시나 자라는 동안 아빠의 기대치가 네게 큰 부담이었다면 미안하다. 아마 네가 기대를 받을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랬을거야.  

  

삶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통제되지 않고, 예측도 불가능하고, 한계성을 지닌 상태로 남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지상의 천국, 완벽한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비교의 기준으로 사용할 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2018년 어느 날, 아빠가 좋아했던 노회찬 전 의원은 본인에 대한 과도한 명예인식에 작은, 너무나 작아서 자유한국당 의원 같으면 그냥 코웃음을 칠, 흠결에도 불구하고 보수 언론에 의해 강요당한 엄격한 잣대를 기준으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삶을 내려놓았다. 가슴 아팠다. 2019년 조국 사태(이 사건 기억나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집단적으로 자기증오에 빠지는 것을 느꼈었다. 특히 진보진영에 대한 비인간적인 조건들(완벽한 청렴성과 자기희생, 순수함, 한치의 오류도 없는 논리 등등)이 달성되지 못했음에 스스로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진보를 지지하던 친구들 중에 '나의 가치관이 흔들린다'고 말한 친구도 있었다. 진중권 씨는 거친 말로써 자기증오를 풀려고 했고, 표창원 의원은 차기 총선 불출마로 진영에 대한 자기증오를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왜 좋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자비롭지 못한 지 안타깝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은 본인들도 흠결이 있고, 실수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질게 뻔하다. 스스로에 대한 관용을 가져야 한다. 그리기 위해서는 상대 진영에 대한 관용이 있어야 가능하다. 보수진영을 죄악시하는 순간 스스로 함정을 파는 것이다. 이게 독선獨善이다. 타인에 대한 혐오는 자기에 대한 혐오로 돌아온다. 


우리는 전적으로 옳지도, 전적으로 그르지도 않다. 자기를 증오하는 것도, 타인을 혐오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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