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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16. 2020

졸혼의 조건이 곧 결혼의 조건  

졸혼시대

2020년 봄 어느 날, 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적 이슈로 확대되던 때, 한 신문에서 <中코로나 의외의 불똥···한달 넘게 부부 붙어있자 이혼 급증>이라는 뜬금없는 기사가 나왔단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특단 조치로 생산 활동 정지시키며 출근이 없어져, 부부가 한 달 이상 집에서 같이 생활하다 각종 트러블에 직면하여 중국의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기사는 중국에서 이혼이 많아지는 때는 최대 명절인 춘절(春節, 설) 직후와 자녀가 대학시험을 치르고 난 뒤인 6월 이후 두 경우라는 것까지 덧붙였다. 물론, 이 기사도 숫자에 대한 고민 없이 쓴 기사로 보인다. 중국 보도를 베낀 것이겠지. 이혼 증가의 근거로 베이린구 혼인등기소에 당일 이혼처리 가능 최대 건수가 14건인데 14건 다 찼다는 것, 시안의 옌타구 혼인등기소도 이혼 최대 처리 건수를 5건으로 설정했는데 열흘 치 넘게 예약이 다 찼다는 것 등이다. 10억 중국 인구를 생각하면 원래 일일 이혼처리 숫자가 너무 적다. 한편으로, 예를 들어, 십만 명 중 평소 2명 이혼하다가 4명 이혼했다고 이혼이 200%로 증가했다고 말해야 할까? 증가율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게다가 원래 이혼이 크게 증가하는 춘절이 막 끝났고, 그 뒤 한 달 가까이 접수를 못하고 있다가 나온 숫자임을 감안하면 특이하게 증가한 것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근데, 아빠는 피식 웃고 넘어가지만 다른 사람들은 역시 부부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면 이혼이 증가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서로 관계가 좋지 않다면 '그것 봐, 내 생각이 맞다니깐...' 하면서 말이다. 

 

젊은 남녀는 결혼을 안 해서 문제고, 중년 이상의 부부는 뒤늦게 황혼이혼의 증가와 졸혼이라는 형태의 가족관계의 변화가 최근 몇 년간 주목을 받고 있다. 엄마 아빠도 당연히 관심 있게 지켜보던 것 중 하나가 졸혼이었다. '졸혼'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의 스기야마 유미코다. 2004년 <졸혼을 권함>이라는 책에서 처음 언급했었다. 아빠는 2017년 여름양복을 하나 사러 백화점에 갔다가 양복 수선을 기다리며(요즘 양복들은 죄다 슬림핏이라서 결국은 몸을 옷에다 맞춰야... 살 빼자! 뭐 이런 다짐을 투덜대던 기억이 난다) 커피숖에 앉아서 스기야마 유미코가 쓴 <졸혼시대>를 읽었었다.  


"오늘날의 '일부일처제'는 평균수명이 채 50세도 안되던 시대의 유물이다. 평균 수명 50세 시대에 만들어진 '가치', '윤리', '도덕'이 '호모 헌드레드 (Homo Hundred)' 시대에도 아무 문제없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는 이 근거 희박한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최소한의 '연금'만 확보되면 은퇴 후의 삶은 아무 걱정 없을 것이라는 이 황당한 신념은 도대체 누가 퍼뜨린 것일까? 그렇다고 일부일처제를 깰 수는 없는 일이다. 인류가 발명해낸 가장 합리적인 제도인 일부일처제의 대안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책 추천 글에 나오는 내용인데, 부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졸혼'은 늙은 남자에게 아주 치명적이다. 여자들에게는 은퇴 후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남편을 피하려면 자신만의 삶을 찾으라고 경고한다. 저자의 말대로 '낡은 결혼을 졸업할 시간, 졸혼시대'가 대세는 아니지만 황혼이혼의 대안으로 충분히 의미 있어 보인다. 


스기야마 유미코는 일본처럼 결혼 후 남편의 성으로 개명해야 하는 사회에서의 이혼은 더욱더 죄책감과 수치심을 갖게 만드는 구조라고 한다. 이혼하게 되면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오니 금방 사회적 낙인효과가 생긴다. 그래서 이혼이라는 행정절차는 거치지 않되 서로 독립된 삶을 합의하는 '졸혼'을 일본에서 먼저 생각해 낸 것 같다. 최근 일본도 부부별성(여자가 결혼해도 성을 바꾸지 않는 것)을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2015년 말 일본 대법원에서 부부동성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의 보수성의 대표적 단면이지. 그러고 보니 서양의 많은 나라들도 의무는 아니지만 남편의 성을 따르긴 하네. 이런 면에서는 한국이 앞선 듯 보였다. 근데, 일전에 네 엄마 여권에 이름이 영문으로 쓰여 있고 옆에 "wife of Park"이라고 부기된 걸 보고 아빠가 엄마라면 황당할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빠 여권에는 "husband of Seo"가 쓰여 있지 않았거든. 아빠가 페미니스트 단체에 있었다면 아마도 '이것은 남성 중심 호주제도의 유물로, 한 남자의 wife인 건 맞지만 그게 나를 구성하는 건 아니고, 독립적인 주체인데, 이것을 신분증에 표시하는 건 부당하다. 내가 기혼이라는 사실과, 남편이 Park이라는 걸 신분증에 꼭 드러내야 하는가'라며 항의했을지도 몰라. 남자라서 참았다. 서양문화를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오버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이야기가 좀 샜는데, 졸혼의 핵심적인 조건은 역시 각자가 삶의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든 하고 싶은 것(취미도 좋고, 직업도 좋고, 그냥 혼자 있고 싶은 것도 좋고, 뭐든 간에...)도 없고, 삶의 추구하는 바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저 상대방 외에 다른 삶이 없다고 한다면, 졸혼하자는 상대방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같이 불행해지는 길을 택하지 않을까? 경제적 환경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한다. 일본도 대부분의 여자가 가정주부이던 시절에는 졸혼을 요구하기가 쉽지 않았을거야. 남편에게 경제적 의존도가 낮아 질수록 이혼이나 졸혼 요구가 높아진다고 한다. 황혼의 결혼생활은, 특히 보수적이고 집안일은 할 줄 모르는 남자와의 결혼생활은 여자가 절대적으로 불편하다. 남자들 중에 나이 들어 혼자서 밥도 잘 못 차리고, 빨래며, 청소며 해 본 적이 몇 번 안되고, 아내가 없이는 아들, 딸과 대화도 서먹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자기 이름으로 나오는 연금과 본인 명의의 집을 가진 남자들이 '나는 아내를 사랑해'를 외친다. 아빠가 모셨던 직장 상사 중 한 분께서 "법적으로 결혼 후 20년째 되는 때에 무조건 자동 이혼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선택하게 해서 어느 한쪽이라도 같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모든 재산을 반으로 나누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과격한 주장을 하셨는데, 이런 분들은 오히려 다양한 취미생활을 갖고 있고, 혼자 여행도 잘 다니시는 등 인생을 즐기시지. 실제 그 분도 졸혼에 가까운 생활을 하시고 계시지만, 오히려 사모님과 사이도 좋으셨다. (몇 년 전 퇴직하시고 적적하실까 싶어 명절에 좋은 와인 한 병 보내드렸더니 사모님과 잘 마셨다고 연락 주셨더라.) 

 

법률적인 결혼관계는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인 편견을 피하되,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졸혼'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이 받아들여 질지 궁금하다. 배우자와 함께 가장 나답게 사는 방법으로서의 졸혼, 서로가 파트너로서 협업하고 인생 여정을 건너가는 방법으로의 졸혼. 그런 것이라면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자유에는 고독이 함께 따른다는 얘기도 명심해야 한다. 고독을 즐기고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면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에도 신중해야 한다.  


어쩌면 이기적인 많은 남자들이 성적 욕구 때문에,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우기 위해 졸혼을 먼저 얘기할까? 사회적 체면때문에 이혼은 싫고 아직 성적 욕망은 남아서 졸혼이라 이름 붙여 탈출하고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남자라면 차라리 여자에게는 이혼이 답이다. 애초부터 졸혼의 이유가 상대의 연애가 원인이라면 말이다. 이게 어쩌면 제일 현실적인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졸혼 후 어느 한쪽에서 연애가 시작되면 미묘한 문제다. 행여, 아내를, 또는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완벽한 졸혼을 위해 상대의 연애까지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질투의 벽을 넘는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거야. 가슴 뛰는 사랑을 어릴 때 하든 나이 들어 하든, 그것은 인생에 있어 축복인 것은 맞지만, 그 사랑이 나라고 믿고 결혼한 상대에게는 큰 상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은 연애를 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결혼관과 사회구조가 점점 변해가는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여전히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혼보다 졸혼이라는 제도가 훨씬 합리적인 것은 맞아 보인다. 이런 얘기들이 자본주의의 변화, 고령화와 인구구조의 변화, 성에 대한 사회경제적 역할 변화, 변화하는 산업환경과도 이어질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제도와 규칙, 사상들 마저 변화의 시기에 있나 봐. 산업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 못지않은 사회적 변화가 지금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다.  

 

스기야마 유미코는 행복한 졸혼의 조건으로 다음 일곱 가지를 제시했다. 


1. 자신의 영역에 무리하게 상대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2. 상대가 하고 싶은 것을 존중한다. 

3. 배우자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4. 고독에 견딜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스스로 자신을 즐겁게 하는 힘을 갖는다. 

5. 금전적인 부분은 서로 양해할 수 있는 범위를 지킨다. 

6. 배우자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힘껏 도와준다. 

7. 주위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조건들은 졸혼이 아니라 일반적인 결혼생활, 또는 남녀관계에서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않을까? 서로 이런 조건으로 가지고 결혼생활을 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독립적이면서도 행복한 관계가 유지되리라 생각된다. 어쩌면 졸혼의 조건이 곧 결혼의 조건일지도 몰라.  


현실에서는 TV에 나왔던 연예인이나 유명 셀럽들처럼 성공적인 졸혼의 사례들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의 다른 버전인 졸혼이라고 해서 왜 문제가 없겠나. 결혼을 유지하는 것 못지않게 다양한 이슈들이 만들어질 거야.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현재 하고 있든 아니든, 어떠한 형태의 관계이든지 결국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핵심이다. 이 부분에서 엄마 아빠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너도 기억하겠지만 아빠가 3년간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부산에서 근무할 때 엄마와 심각하게 졸혼에 대해 얘기한 적도 있기는 하다. 아빠는 엄마가 졸혼을 요구한다면 이걸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고민했었다. 우리 딸도 내가 맡고,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해서 자유롭게 해 달라고 한다면 말이다. 엄마는 그 당시 직장을 다니면서 아빠보다 많은(아니, 거의 전적으로) 가사분담과 육아(게다가 넌 그때 중학교 올라가면서 사춘기였고)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미 집도 엄마 명의로 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아빠에게 의존하지는 않을 수 있으니 일정 부분 졸혼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 그때 네 엄마가 적극적으로 요구했다면 아빠도 받아들였을지 몰라. 다행히 아빠가 다시 서울로 발령 나고 우리의 결혼은 여전히 약간의 다툼은 있어도 그럭저럭 잘 해쳐나가고 있다. 아빠 또한,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와 모든 면에서 맞는 건 아니다.(아, 옆에서 봐서 안다고?) 엄마가 뭔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고 선언한다면, 반대로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엄마가 거부한다면 서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때 가봐야 알겠지. 그래도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면 부정적이지는 않아. 작년까지 아빠는 같이 일하던 선배 손을 끌고 요리학원도 열심히 다녔잖니. 

 

결혼도 일종의 계약일까? 그렇다면 계약의 조건은 무엇일까? 상대에 대한 배려까지는 좋은데, 상대에게 헌신하는 것이라면 아빠는 "이 결혼(계약) 반댈세". 결혼이라는 계약의 조건은 서로에 대한 위로, 고독한 영혼끼리 서로 바라보며 위로하는 것 하나면 된다고 생각한다.(엄마와 그런 사이냐고? 알면서...) 어떤 계약이든 요구사항과 조건이 많아지면 시기의 문제일 뿐,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 것같다. 아빠는 결혼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의 관계든 상관없이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상대방으로 인해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혹은 네 애인이 네 행복을 책임져 주기를 바라겠지만, 알고 보면 그 또한 너에게 그것을 바라는 그저 외로운 한 영혼에 지나지 않는다. 관계에 있어서 그 형태가 무엇이든 요구사항이 커지면 위험해. 결혼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결혼도 안 하겠지만) 졸업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너도 몇 번 해 봐서 알다시피, 졸업은 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혹시 네가 서른이 되었을 때 엄마 아빠가 어떤 형태의 결혼을 유지하든 우리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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