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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 없는 사람 Dec 22. 2020

누가 오영심에게 돌을 던지랴

12월의 열대야(MBC, 2004)

불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랑해서 결혼했다지만 그 사람이 유일한 사랑인지 어떻게 알까. 운명이라 여기는 사람을 만났지만 이미 내가 결혼한 상태라면 그냥 그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까. 사람의 감정은 한순간에 싹트기도 하지만 서서히 물들기도 하는 건데,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과 서서히 감정이 물들어간다면 어느 순간부터 불륜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등등.

물론 나는 결혼하지 않았고, 결혼 적령기 따윈 애저녁에 넘었고, 사주를 봐도 결혼하지 않을 팔자라고 나오니 전쟁 날까 염려하는 어처구니없는 걱정이지만 그래도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다행히 한국 드라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차고 넘치도록 불륜이 등장하니, 여러 가지 상황에 나를 대입해볼 수 있다.

재미나게도 드라마의 강력한 시청자층인 30~50대 기혼 여성 시청자들이 불륜 이야기에 강하게 반응하곤 한다. 왜 그렇게 불륜이 많이 등장하는가, 기혼녀들은 왜 그리 불륜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묻는다면, 웹툰 <어쿠스틱 라이프>의 작가 난다가 한 말이 적절할 것 같다. “안전한 곳에서 불구경하는 재미지, 뭐.”


2004년 방영한 <12월의 열대야>도 불륜을 다룬다. 대부분 남자의 외도를 다루는 것과 달리 결혼한 지 10년인 주부, 아이가 둘이나 있는 주부의 불륜을 다뤄 당시 눈길을 끌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주인공의 불륜을 중심 소재로 하여 그것을 ‘사랑’으로 다룰 때는 파장이 크다. ‘가정이 있는 남녀가 단지 성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바람난 것을 사랑이라 포장하다니!’라며 ‘불륜 미화 드라마’라는 낙인을 찍곤 한다. <12월의 열대야>도 그랬고, 그 이전에 <애인>이 그랬고, 심지어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사의 찬미>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에도(사실을 바꿀 순 없잖아요) 불륜 미화 논란이 있었다. 하물며 <12월의 열대야>의 주인공은 멀쩡하고 번듯한 남편과 아이가 있음에도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간다. 남성 시청자들이 보기엔 기가 차고 코가 막히는 것을 넘어 무서움을 느낄 만한 이야기다.


푼수기 충만한 오영심과 잘난 그녀의 남편 지환. 사실 이 드라마에서 원조 불륜(!)은 '소울메이트'임을 주장하는 지환과 첫사랑 친구 가흔이라 볼 수 있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시동생도 의사인 집안의 맏며느리 오영심(엄정화).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는 보건의로 내려와 있던 남편을 짝사랑하던 와중 하룻밤 실수(!)로 아이를 임신하여 결혼한, 남들이 보면 ‘인간 승리’로 여겨지는 표본이다. 내로라하는 의사 집안 맏며느리에 아들딸을 두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이요 빛 좋은 개살구다. 10년 내내 영심은 구박덩어리 며느리에, 가사도우미 대체자일 뿐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직 책임감으로 결혼한 남편 지환(신성우)은 영심과는 데면데면 대하지만, 첫사랑 친구 가흔(김호정)에게는 ‘소울메이트’라는 명목으로 여전히 마음을 나눈다. 하기야 샤갈을 사랑하고 클래식을 즐겨 듣는 지환과, 샤갈을 사과로 잘못 듣고 나미의 ‘빙글빙글’을 열창하는 영심은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그러던 중 우연히 영심의 인생에 나타난 것이 스물일곱 살 청년 박정우(김남진)다. 시어머니가 자신을 지지고 볶든, 시누이가 자신에게 온갖 비아냥을 퍼붓든 소 닭 보듯 하는 남편과 달리, 정우라는 청년은 일면부지의 영심이 곤경에 처할 때 용감하게 나선다. 서른 살 아줌마의 마음이 주책없이 흔들린다.

그 남자, 정우는 상처가 많다. 전도유망한 건축공학도지만 끝을 모르는 집안의 가난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7년을 사귄 여자도 자신을 떠나 부잣집 의사와 결혼했다.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인데, 우연히 그의 인생에 끼어든 아줌마가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바라본다. 알고 보니 그녀는 정우가 사랑했던 지혜(최정원)의 동서. 우연과 필연이 거듭되며 지혜를 멀리하고 영심도 더 이상 만나지 않으려 하지만 청천벽력, 악성 뇌종양으로 3개월도 채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는다. 악에 받친 정우는 지혜에게 복수하고자 영심을 유혹하려 든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얼굴을 바라봐주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의미인가. 사랑이 아니어도 그런 존재는 꼭 필요하다. 영심에겐 정우가 그랬다.


많이 보고 들어온 전개 아닌가? 드라마 전문가가 아니어도 영심과 정우가 결국은 진짜 사랑에 빠질 거란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12월의 열대야>는 쉽게 불륜을 미화하지는 않는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한 여자의 자아 찾기로도 볼 수 있기 때문. 가정이 있는 여자라지만 시가와 남편은 영심을 온전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영심은 그저 아이들 엄마, 집안 궂은 일을 도맡는 사람일 뿐이다. 남편이 있음에도 평생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들어보지 못한 영심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 말하며 여자로 바라보는 남자가 생긴 거다.

첫사랑을 시작한 그녀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꿈꾸지 않는가. 그렇게 사랑을 시작한 영심은 시한부를 선고받은 정우를 위해 의사인 남편 앞에 울며불며 살려달라 애원도 마다하지 않는다. 표면만 보면 정말 말할 수 없이 나쁜 년이지만, 영심의 마음을 따라 달린 시청자라면 함께 눈물 흘릴 여지가 충분하다.


드라마는 소위 바람이 난 영심의 상황을 냉정하게 비춘다. 남편은 물론이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등 시댁 식구 모두가 영심의 바람을 알게 되는 건 물론, 친정 어머니와 심지어 어린 아들까지 그 사실을 알게 만든다.

채 두 달도 못 살 정우를 위해, 막판에 영심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남편이 붙잡는데도 영심은 홀연히 정우와 떠나지만 그 마지막 순간 또한 아름답게만 비추지는 않는다. 농담처럼 정우의 영정 사진과 장례 절차를 의논하다가도, 뇌종양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보기 싫다며 바락바락 싸우는 모습도 보인다. 그래도, 시가에 있던 영심보다 깊은 산골 낡은 집에서 정우와 함께하는 영심이 더 그녀다워 보이기에, 은연중에 응원을 보내게 된다.


12월을 보내며 간만에 <12월의 열대야>를 다시 보다가, 문득 궁금증이 일어 기혼 친구들에게 물었다.

“결혼했는데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나면 어떡할 거야.” 자칭 연애 산전수전 겪었다는 대다수가 말했다.

“야, 그놈이 그놈이야!”

반면 다른 의견도 있었다. “자식 있으면 자식 앞길 때문에 접을 텐데, 남편만 있음 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둘 거야. 끝날 때까지 끝나봐야 남편이 가족인 거지, 사는 동안은 그저 동료거든.”

내 배우자가 한겨울의 열대야 같은 사랑에 휘말려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면, 평소 굳건한 믿음과 사랑을 쌓아둬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드는 대답 아닌가.



*이 글은 2018년 12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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