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통영> 읽기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표현은 통영의 어원을 알려주려는 듯하다. 1930년대 통영항의 사진을 보면 항구 인근에 꽤 많은 집들이 있고, 높은 구릉에도 가옥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통영은 가난한 조선의 항구가 아니었다. 자원이 풍부한 남해의 중심지여서 식민지 초기부터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와 집단거주를 한 곳이다. 일제는 본국에서 이주한 일본인들을 위한 각종 시설을 마련했고 거기에는 상수도 시설까지 있었다고 한다. 백석이 찾을 무렵의 통영은 이미 근대적 항구 도시가 되어 있었다. 백석은 천희를 만나기 위해 통영에 왔고, 시 <통영>(1935)을 썼다.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줄기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 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등잔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알라딘 eBook <백석 시집 사슴>에서
<통영>의 화자는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를 ‘천희千姬'라 명명한다. 그리고 통영에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천희千姬'가 고유명사가 아님은 금방 알 일이다. 경남 사람들은 젊은 여인들을 '처니'라 불렀다니 '천희'는 음역 표기일 것이다. 화자는 그 천희, 바로 통영의 젊은 여인을 만난 것이다. 여러 천희 중 화자와 대면한 천희는 누구였을까? 화자를 정념에 사로잡히도록 한 여인이었을까?
둘이 만난 장소가 객줏집 마루방이라고 하니 생각이 복잡해진다. 식민의 땅에서 내지인으로 행세하는 일본인들이 '오랜 객주집'에 드나들 리 없었을 것이니, 거기에는 거친 바다에서 목숨을 내맡긴 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몰려들어 술에 취해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는,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억센 사내들이 취한 채 내뱉는 고성으로 객줏집은 시끌벅적하고 가끔은 무례한 농지거리에 육두문자가 뒤섞였을 곳에 화자가 들어선 것이다. 거기 한편에서 화자는 천희를 은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생선 가시'가 있는, 지저분한 마루방에서 만난 천희, 천희의 자태는 단아했고 몸가짐은 우아했으리라. 모든 이들이 흘긋거리는 천희를 화자는 마루방에 앉아서 바라본다. 천희의 시선 역시 화자를 향했으리라. 서로를 향한 그들의 시선은 각별했을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논리로 천희들의 사랑을 규정한다. 그녀들은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 사랑을 한다고 한 것이다. '~다는'의 표현으로 확신을 비껴가지만 고개를 들어 천희를 바라보니 그녀에게는 그런 사랑을 하리라 믿을 만큼의 눈빛이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그 사랑에 헌신하며 자신의 삶을 바치는 그런 여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만을 스스로 '탈수'시키는 그런 사랑 말이다.
아니면 통영의 천희를 만나 그런 사랑을 하리라는 화자의 꿈일 수도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말라가다가 껍질만 남긴 채 사라지는 그런 사랑 말이다. 천희와 마주치며 아무 말 없이 보내온 눈빛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화자는 그 사랑이 그렇게 이어지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시인이 꿈꾸었을 만한 사랑이다.
<통영>을 아름답게 만든 부분은 마지막 행이다. 이 시행에는 분명 욕망이 스멀거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은폐시키고 있다. 슬쩍 보이기는 해도 겉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동여매고 있다.
유월이면 습기를 가득 머금은 해풍이 몰려온다. 모든 사물은 축축하게 젖는다. 때로 숨을 턱턱 막으면서 덮쳐오는 습기는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다. 화자는 후각을 살리며 욕망의 정도를 조절한다. 바로 '조개도 울을 저녁'에 내리는 비와 함께 퍼지는 '김냄새'이다.
이제부터 공간 전체는 후각으로만 인식되기 시작한다. 비릿함! 객줏집 너머 어둑한 바다, 어선들, 드나드는 사람들, 소리들, 모두 '김냄새'의 비릿함 속으로 스며든다. '김냄새 나는 비'는 공간 모두와 그 공간 속의 세부들을 하나로 묶어버린다. 감춰진 욕망의 대체물인 비릿함, 천희의 눈빛, 그리고 화자의 정념만 남고 모두 사라진다. 풍경을 이루던 요소들은 작은 점묘로 바뀌어 희미해지고 천희의 자태만이 양각으로 도드라진다. 화자는 한껏 도취되지만 욕망은 조절된다. '절제된 도취'이다.
'도취'는 흥분된 상태에서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순간을 포함한다. 그 순간 감정의 균형은 무너진다. 매우 위험하다. '도취'가 치닫는 끝에는 무시무시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르러 격정에 사로잡힌 채 옴짝달싹 못한 자신은 파괴되고 사랑은 끝내 소멸되고 만다. 완전한 소유의 꿈, 제어가 불가능한 욕망이 내면에 휘몰아쳐 파멸에 이르고 만다. 사랑하는 대상의 완전한 소유, 무절제한 도취를 꿈꾸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 그/그녀가 나에게 매혹되기를 바라는 것, 또는 내가 그/그녀를 사로잡기를 원하면서 '나'의 기나긴 악몽은 출발한다. '소유'란 그/그녀에게 나를 각인시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나를 기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독한 탐욕이다.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도취에서 출발한다. 무절제한 도취로 인해 자신을 통제할 힘을 잃은 채 허덕거리다 작은 외력에 의해 와르르 무너진다. 그래서 무절제한 도취는 '불온한 욕망'과 맞닿아 있고, 결말은 비극적이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도취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고, 비너스의 여사제 헤로와 사랑에 빠져 밤마다 해협을 헤엄쳐 건너던 레안드로스의 도취 역시 비극적 운명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도취'가 불완전한 사랑의 형식이라고 해도 그것이 운명처럼 찾아온 것임을 알아차렸을 때 거부하기란 불가능하리라. <통영>의 화자 역시 천희에 대한 사랑이 도취로 나아갈 것임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것을 애써 숨기고 그 흔적만 슬쩍 내보이고 있기에 우리는 지금 <통영>을 읽으면서 찬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