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5일 수요일
기록자: 수아
“3월 8일부터 일본으로 입국하는 모든 한국인에 대한 조치가 강화될 것이며…”
나는 이 소식을 가장 빠르게 접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그날 저녁, 야림이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연락이 올 때까지.
코로나19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설 이전이었다. 뉴스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지라, 여러 외신을 두루 살피는 것이 일과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SCMP가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생한 ‘정체불명의 폐렴’에 대한 기사를 지속해서 다루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기사는 그냥 넘겼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세 번째, 네 번째… 우한 폐렴은 이제 우한에만 머물지도, 폐렴에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SCMP는 이미 ‘사스’를 언급하고 있었다. 전 세계 언론이 고요한 가운데 중국만 유독 소란스러웠다. SCMP의 조심스러운 추측을 독자에게 전한 날, “추측을 너무 사실인 것처럼 전해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설이 지나고, 한국에도 코로나19가 본격 상륙했다. 을지로 한가운데, 명동 맞은편에 있었던 회사는 빠르게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얼마간 집에서 근무하던 팀원들은, 오래 가지 않아 다시 회사에 나오고 재택하고를 반복했다. 서울 및 수도권에는 확진자가 많이 없던 시절이다. 대표님의 주의 아래 사무실을 드나들 때마다 손을 소독했고, 마스크를 잊지 말라며 서로에게 농담 섞인 주의를 건넸다. 여전히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다른 회사 사람들 중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가 많았고, 그들은 종종 부주의하게 비말을 전파했다.
코로나를 대단히 무서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이러스가 내 생활에 파고드는 걸 무방비하게 바라보지만은 않았다. 성실하게 마스크를 썼고, 손을 씻었다. 고양이가 잠시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도 늘었다. 야근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바이러스는 자주 잊혔다. 매일 코로나 기사를 접하고 쓰면서도 그러했다.
나는 야림이 일본으로 급하게 돌아가고 나서야, 동그라미가 독일에 가지 못하고 발이 묶이고 나서야, 뽈이 영국에서 모든 것이 셧다운 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때야 코로나를 실감했다. 누군가는 코로나로 인해 삶이 뒤바뀔 정도로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글자가 아닌 누군가의 삶으로 생생하게 느낀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나의 태도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했고, 곧이어 나를 변호하고 싶어졌으며, 다시 부끄러워졌다.
겪어보지 않은 고통을 함부로 상상하는 것. 나는 그 행동을 그만두자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