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어제오늘
별안간 포트와인이 마시고 싶었다. 너무 지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아무리 심하게 덜컹거려도 눈을 감고 잘 수 있는 쪽잠은 다 자야만 했던 날이었다. '이렇게 피곤한데 무슨 와인이야.' 집으로 돌아와 대강 밥을 해 먹고 빨래를 돌리며 한 시간을 누워 있었는데도 피곤은 가시지 않고 포트 와인을 향한 갈망만이 커지었다.
결국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겠다고, 숙제처럼 읽어야 하는 책을 들고 집에 나섰다. 웃옷은 맨투맨으로 바꿔 입었지만 여전히 바지는 잠옷 차림. 그만큼 가까운 곳에 포트 와인을 파는 가게가 있다는 건 연남동 주민이기에 누릴 수 있는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서
이곳의 이름은 어제오늘(昨日今日). 오픈한 지 80여 일정도 되었지만 이름을 안 건 최근의 일이다. 간판이 내걸려 있지 않기 때문에 오며 가며 이름을 알아채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대신 유리문 바로 옆에 메뉴판을 걸어 어떤 공간인지 살짝 힌트를 주었다.
어제오늘은 주로 한국 전통주와 와인,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다양한 요리를 판매한다. 맥주는 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소주는 없다. 대신, 다양한 증류주와 탁주*를 시도해볼 수 있다. 와인은 잔으로 판매하는데 잔당 가격이 비싸지 않은 편이라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서 한두 잔 마시기에 안성맞춤이다. 밥을 든든히 먹은 날이면, 안주로는 사장님이 직접 만든 밤조림을 선호한다. 달곰한 맛이 배어든 밤은 의외로 와인에도 잘 어울렸다.
*막걸리와 탁주는 다른 술이다.
가장 먼저 술을 걸러내는 과정에서 술을 짜내면 쌀뜨물보다 조금 더 진한, 탁한 액체가 나오는 게 이를 탁주라고 부른다. 이때 만들어진 탁주는 18~19 정도 되는데, 여기에 물을 섞어 6~8도까지 온도를 내리면 막걸리가 된다. 탁주가 막걸리보다 큰 개념인 셈이다.
종종 막걸리나 동동주를 마시고 '나는 탁주는 안 맞아'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술을 권하고 나면 탁주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텁텁한 맛이 없이 목 넘김이 깔끔하고, 다음날 숙취도 적기 때문이다.
가게에는 총 10개 남짓의 좌석이 있는데, 모두 바 자리다. 그렇기 때문에 사장님이 어느 손님과 대화를 시작하면 혼술러는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어느새 시계를 보니 자정을 훌쩍 넘겨 있었다. 오늘이 어제가 되었고 내일은 오늘이 된 것이다. 어제 들어와 오늘 나가는 곳. '어제오늘'이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따뜻함이 필요한 날에는
한 잔만 마시고 집에 돌아와 일찍 자려는 나의 계획은, 사장님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무산되었다. 대화의 물꼬를 튼 건 가게의 작은 고양이 춘삼이 덕분이었다. 며칠 전 누군가 가게 앞에 유기했다는 작은 고양이는 여전히 사람의 품이 그리운지 낯선 이의 무릎을 자꾸만 파고들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려고 지갑까지 다 준비해놓았건만 춘삼이가 무릎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쌕쌕 잠드는 바람에 한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고양이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쩌다 보니 연남동 상권으로, 그리고 다시 전통주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갔다. 가끔 시음해보라며 술을 한 잔 권하시기도 하고, 옆 가게에서 가져왔다는 김치를 안주로 꺼내 주시기도 하며, 또 가끔은 친구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계산할 즈음 결코 과하지 않은 한 마디를 건네는 곳. 아는 체와 모르는 체를 적절히 섞어 단골을 만든다면, 이 정도가 적당하겠다 싶었다.
아직 낯선 곳이지만, 자꾸 발걸음 하고 싶은 이유는 사장님의 인간미 때문일 것이다. 작은 고양이를 보듬어 안는 일도, 받은 것을 함께 나누는 일도, 무언가를 물었을 때 정말 열심히 대답해주는 일도 모두 따뜻한 맛이 있는 행동이니까. 아 참, 그리고 아직은 편의점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포트 와인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