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여백
‘잘 알지도 못하면서’
라는 가게가 있다. 지난겨울 긴 밤거리를 걸어 드럼을 배우러 다니던 때, 홍대 골목 한 켠에 박힌 이 작은 술집의 간판은 술 ‘잘 하지도 못하는’ 나의 발걸음을 몇 번이나 멈춰 세우곤 했다. 어쩐지 보는 것조차 서러워서. 어딘지 내 평생 가슴 한구석 숨 참듯 가둬 온 말인 것만 같아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다는 탓을 넘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는 설움이 목구멍까지 시큼히 받쳐 오르는 시절을 지나고 있다. 누구 나한테 뭐라 한 사람이 쏟아져서가 아니라, 타인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을 나도 모르는 새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탓에 나와 상대의 상호작용 속 어느 쪽의 것이건 그 해석이 나 홀로 빠른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어제의 상담사는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외로움과 결핍을 주제로 3회 차쯤 진행된 시간이었다.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에 그렇다고 했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당신이 말하는 이런저런 수식과 이유 없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다. 다시 한번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내가 참 애틋하다 했더니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곁에 두고 싶어 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나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일 것 같냐는 질문을 했다. 나의 가장 여리고 약한 부분을 여지껏 털어놓은 입은 얼었다.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게요, 제가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부족하다 생각하며 살았네요. 이러면 점점 더 외로워질 테니 잘못된 제 마음을 고쳐먹도록 하겠습니다.’ 건조해진 입술을 꾹 물며 대신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왜 저를 판단하려고 하세요. 제가 말한 것 외엔 저를 모르시잖아요.
오늘은 함께 일하는 파트너사에게 되게 싫은 소릴 했다. 내가 카피라이터 시절 클라이언트로부터 가장 듣기 싫어했던 이야기들을. 내가 카피 해봐서 알아, 하는 화룡점정까지 찍어대면서.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그들만큼, 저녁을 거른 위장에 소화불량이 들 정도로 내 속이 아프다. 그런 말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런 말을 해야만 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했을 뿐, 하나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네이버 미친x’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나로 인해 누군가 맘 다쳤을 생각을 하면 물도 안 넘어간다. 속 모르는 동료들은 웃으며 내게 워-워- 한다. 위장이 쿵쿵거린다.
타인이 나의 여백을 어찌 알까마는, 적어도 모두에겐 ‘내가 모르는 여백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정말 순진한 바람일까.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라는 소설 속 말처럼, 내 앞에서 웃는 이 사람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울음을 우는지, 얼마나 많은 한숨을 물도 없이 삼키느라 먹먹해진 가슴을 치는지, 서로는 애초에 알 리가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일까. 나도 타인에게 타인이면서, 그들의 여백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쩌면 그래서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다고 생각하는 거면서, 가장 여백이 많은 플랫폼에 이렇게도 긴 글을 적고 있다.
‘극히 일부’가 전부가 되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압도하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면, 나는 가랑비에 맘 다치는 습성을 고쳐야 할 텐데. 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실바람 하나에 아이가 되는 나를 본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군요.’ 하는 한 마디를 조르는 순진한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