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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Mar 09. 2021

[서평] 『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노래해 주시오, 여신이여

영문학의 호메로스 번역 역사

한국어로 호메로스의 작품이 완역된 판본은 천병희 교수님의 작품밖에 없지만, 영미 문학계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마치 문화올림픽처럼 16세기부터 21세기에 오기까지 몇 년에 한 번씩 번역되고는 한다. 21세기에 와서는 오히려 호메로스의 번역과 출판의 빈도가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오히려 고대 그리스어보다, 영문학 쪽에서 호메로스를 파기 시작하면, 너무나도 판본이 많아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번역가라는 직업이 전문적인 직종이 아니라 인문학자들의 부업이었던 시절인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 이 두 작품을 영어로 완역한 번역가들의 면모를 둘러보다 보면, "어, 당신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른 분야에서 쟁쟁한 시인, 학자들이 포진해 있다.


(左) 조지 채프먼, (右) 존 키츠 [출처: Wikimedia Commons]


17세기 초에는 셰익스피어의 라이벌 격이었다고 추측되는 시인 조지 채프먼이 번역했는데, 번역의 결과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나머지 약 2세기 후 이 작품을 읽고 불과 약관의 나이였던 존 키츠를 불세출의 낭만주의 시인으로 각성시킨다. 17세기 말에는 『리바이어던』의 작가인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완역하였다.


18세기 초에는 지금 읽어도 가장 유려한 번역이라고 평가되는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번역이 출판되었고, 18세기 말에는 낭만주의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는 시인 윌리엄 쿠퍼가 존 밀튼의 『실낙원』에 영향을 받은 번역을 출판하였다.


20세기에는 호메로스 번역이 꽃피기 시작했는데,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원전의 운문 번역이 아니라 산문으로 번역한 에레혼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의 번역이 출판되었다. 20세기 중반에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20세기의 풍운아, T. E. 로렌스도 『오디세이아』 한 작품을 번역하였다. 한편,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의 작가로 더 유명한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일리아스』 한 작품을 산문으로 번역하여 발표했다.


2차 대전이 종식된 후에는 아예 호메로스와 그리스 고전 번역에 일생을 바치는 고전학자들이 나타났는데, 이 중 호메로스의 두 작품을 모두 번역하고 21세기에 와서도 자주 읽히는 작가들은 리치먼드 래티모어, 로버트 피츠제랄드, 로버트 페이글스, 스탠리 롬바르도가 있다.


이 중 1990년대 초반에 발표된 로버트 페이글스의 작품은 20세기 번역 중 고전미를 잘 살렸다는 평이 지배적이며, 뒤이어 1990년대 후반에 발표된 스탠리 롬바르도의 작품은 지금까지 호메로스 번역 중 가장 현대적이고 현실감 있게 전쟁을 묘사했다는 찬사와, 한편으로는 발칙하고 선을 넘은 번역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The Iliad』, (左) 로버트 페이글스, (右) 스탠리 롬바르도 [이미지 출처: Folio Society, Amazon]


페이글스의 작품은 수집용 고급 양장 전문 출판사인 폴리오 소사이어티를 통해 고전에 어울리는 커버와 함께 발매될 정도로 그 고풍스러운 문체를 인정받고 있다. 롬바르도의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촬영한 〈사신의 입 속으로 (Into the Jaws of Death)〉를 커버로 사용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두 작품이 번역의 방향성과 그 평가에서 얼마나 넓은 간극을 가지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장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21세기에 와서도 수많은 번역이 출판되고 있지만 가장 주목을 받고, 학계에서도 21세기 최고라 평가받는 작품은 처음으로 『오디세이아』를 완역한 여성인 에밀리 윌슨의 판본으로, 2021년 현재 『일리아스』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세세히 적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자, 시인, 소설가, 번역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 '호메로스'를 역사에 남기기 위해 도전하고, 출판을 해왔다. 저작권이 소멸된 대부분의 작품은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에서 무료 전자책으로 만나볼 수 있고,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다양한 판본을 『일리아스』의 유명한 첫 줄 "노래해 주시오,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해", 그리고 『오디세이아』의 첫 줄 "노래해 주시오, 여신이여, 그 복잡다단한 인간의 삶에 대해"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비교한 문서를 따로 분리해 놓기도 했다.


호메로스, 운문과 산문, 원전에 대한 존중

대학교 시절 미국에서 고전학 수업을 들은 후, 호메로스에 빠져 한동안은 수많은 판본들을 다시 읽는데 시간을 보냈고, 위에 기재한 번역본 중, 『일리아스』는 포프, 페이글스, 롬바르도의 작품을, 그리고 『오디세이아』는 페이글스의 작품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렇다, 나는 항상 『일리아스』를 더 좋아했다. 오디세우스의 허풍되고 허무한 귀향보다는 실제 전쟁과 군상극에 가까운 『일리아스』가 더 포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교의 고전학 수업은 전직 영국 군인 출신의 젊은 교수님께 배웠는데, 아직도 그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는 (본인의 과거를 적절히 수업에 첨가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고루한 고전 문학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전쟁을 회고하는 참전 용사의 후회 섞인 무용담으로 읽을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한편 그는 내게 산문(prose)으로 번역된 호메로스는 태생적으로 운문(verse) 번역보다 열등하다는 인식 또한 함께 가르쳤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호메로스의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들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구전으로 1인 공연을 하던 내용에 기반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구전되었기 때문에 그 전달 방식을 살리고, 내용을 암기하기 쉽도록 운율을 가진 형태로 기록되었다. 아마 호메로스라는 개인, 또는 집단이 처음으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완성한 이후에도 몇 세기 간 수많은 음유시인들의 입과 수정을 거치고 나서야 글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교수님은 작품의 뿌리가 운율을 가진 구전에 있기 때문에 운문 번역을 읽는 것이 더 완벽한 독서 경험을 제공하지 않을까, 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한편,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불분명하지만, 몇 년 전 로버트 페이글스의 번역을 오디오북으로 처음 접했던 한 학생이 수업에 와서 옆 자리 학생의 책을 보고서야 실제 텍스트가 운문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우스갯소리도 곁들였다. 실제로 소리를 내서 읽어보거나, 개행에 적응만 되면 운문도 읽기 쉽다는 의미였다.


그를 통해 다양한 번역본을 비교하며 읽어보는 재미도 알게 되었고, 실제 군인이 할법한 신랄한 욕설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롬바르도의 『일리아스』 번역은 두 번이나 읽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채프먼의 번역을 읽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본인의 잠재된 능력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키츠처럼 미망에서 깨어나 문학에 각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후자 때문임이 분명하다.


한편 유명한 산문 번역인 새뮤얼 버틀러의 작품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실제로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호메로스에 빠져 있던 시기를 지나,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읽게 되었는데 그레이브스의 실감 나는 역사 묘사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레이브스의 글을 더 읽지 못해 발을 구르던 와중, 그의 작품집을 찾아보그가 『일리아스』를 산문으로 번역했다는 내용을 접했다.


『The Anger of Achilles』, 로버트 그레이브스


그레이브스의 판본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이유는 그가 제목을 『아킬레우스의 분노 (The Anger of Achilles)』라고 각색했기 때문이었다. 홀린 듯이 전자책으로 구매한 그레이브스의 산문 번역은 몇 가지 이유로 큰 놀라움을 선물했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그리스 토기 위에 스텐실처럼 그려진 인물들이 움직이는 형태, 또는 디즈니 만화 〈헤라클레스〉(1997)의 애니메이션으로 상상해왔던 『일리아스』의 내용이 마치 할리우드 황금기에 만들어졌던 전쟁영화들, 즉, 나바론의 요새〉(1961), 댐 버스터〉(1955), 대탈주〉(1963), 또는 실제 『일리아스』의 영상화인 트로이〉(2004)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이견이 없을 정도로 우아한 그레이브스의 문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문 번역 자체가 가진 장점이기도 했다. 소설을 산문으로만 이해해온 현대인이 가진 한계일 수도 있다.


그레이브스는 호메로스를 '영어로' 완전하게 번역하기 위한 방법은 그 작품이 고대 그리스에서 어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지까지 보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다시 말하면, 고대 그리스 음유시인의 공연장(배경과 문맥)-고전 그리스어(언어)의 관계를 고려해, 고전 영어에 어울리는 배경과 문맥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고대 아일랜드의 서사시가 기본적으로 산문으로 집필되고, 중간중간의 연설, 독백, 또는 강조 부분만 운문시 형태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산문으로 번역했다 (출처).


또한 고대 그리스 시절, 호메로스의 작품이 운문으로 구전되고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이 공연을 찾는 관객들이 문맹이었다는 배경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운문이라는 형태와 서사시라는 예술 자체가 음유시인의 전달을 돕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시대 상황의 한계 때문에 태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한계가 그 예술성을 폄훼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되지만, 만약 호메로스가 문맹률이 낮은 현대에 태어났다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소설을 통해 『일리아스』를 전개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左) 기원전 540년 경 제작된 암포라, (右) 〈트로이〉(2004)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YouTube]


두 번째는 그레이브스가 원전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몹시 대범한, 심지어 발칙하다고 볼 수도 있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원문으로 사용되는 고대 그리스어 판본조차 호메로스라는 개인, 또는 집단의 첫 창작 이후 긴 시간 동안 능력이 떨어지는 음유시인들의 해석과 수정 때문에 그 정수가 오염되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본인의 결정에 기반해 맥락에 맞지 않거나, 우아함이 떨어진다고 보이는 분량은 아예 삭제했다. 어떠한 문단을 운문으로 남겨 번역할지, 어떠한 내용을 산문으로 번역할지 또한 본인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레이브스의 산문 번역은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지, 어떻게 보면 각색 수준으로 편집이 되었고, 이는 운문이라는 형태의 보전을 포함, 원전에 대한 존중이 번역가의 신조라고 생각해왔던 내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서양문명 최고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를 이렇게 자유롭게 변주할 수도 있다니.


그레이브스의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문학 2차 창작물을 찾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팬픽션 수준으로 생각해왔던 이 지점에, 살아있는 거장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가 있었고, SF 소설의 고전인 댄 시먼스의 일리움, 올림포스가 있었다. 최근에 읽었던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까지, 호메로스의 작품은 걸출한 현대 작가들에 의해 짜릿할 만큼 발칙하게 재해석되면서, 서가에 어련히 꽂혀있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먼지를 털고 다시 한번 읽어 보게 만들고 있다.


노래해 주시오, 여신이여

호메로스를 아무리 읽어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문학적 각성은 존 키츠 이후, 매들린 밀러 작가에게는 일어난 것 같다. 매들린 밀러는 2019년 시카고 인문학 페스티벌에서 진행했던 너데트(Nerdette, "Nerd"의 여성형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팟캐스트의 진행자 그레타 존슨과 1시간 정도의 흥겹고 따뜻한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단서를 제공했는데, 이 와중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호메로스가 그녀의 내적 각성에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https://youtu.be/nGAbXvhzSII


재미있는 부분은 오랜 시간 동안 매들린 밀러는 창작에 대한 고민과 호메로스에 대한 애정을 분리해서 생각했다고 한다. 어쩌면 나처럼 고전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었던 나머지 엄숙에 가까운 존경심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매들린 밀러 작가는 대학시절 셰익스피어 연극인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연출에 참여하면서, 본인이 존경하고 애정 해왔던 『일리아스』를 창작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매들린 밀러가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집필하는 데는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대부분의 시간은 물론 자료 조사도 있었겠지만, 『일리아스』를 이야기 위한 완벽한 목소리를 찾기 위해 사용했다. 약 3명의 번역가의 작품밖에 읽지 않은 나조차도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미국 인문학의 최전선인 브라운 대학, 시카고 대학, 예일 대학에서 고전을 수학한 밀러는 어땠을까. 이 준비시기에 관련한 밀러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호메로스 번역은 모두 읽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자료 조사가 아니라, 다양한 번역을 접하면서 본인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아킬레우스의 노래와 키르케에서 모두 '노래'라는 테마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원문이 되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모두 "노래해 주시오"라고 여신에게 간청하며 시작이 된다. 하지만 여신이 불러주는 노래는 음유시인이라는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이 된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화자, 파트로클로스는 천진난만하고 우아하게 리라를 뜯으며 노래하는 아킬레우스를 바라보며 자라고, 성인이 되어서는 동일한 우아함으로 전쟁터에서 노래의 주인공이 되는 아킬레우스를 바라보며 고통받는다. 신들의 간교와 장난 속에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인간적인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키르케의 화자는 신성을 가진 모든 신 중 가장 하급신인 님프라는 태생을 가지고, 심지어 신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 사실은 어린 그녀에게는 열등감의 근원이 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 순간, 본인의 목소리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매들린 밀러는 한편,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출판 즈음에 본인의 은사에게 책을 보여주기가 겁났다고 고백을 한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를 직접적인 동성 연인 사이로 묘사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은사는 밀러가 『일리아스』를 기반한 작품을 썼다는 말을 듣자마자, "둘을 연인으로 그렸기를 바란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작품을 완독 한 소감으로는, 이런 지점에서, 특히 북미 문학계 출신이, 겁을 내고 고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사실 소설 중간에도 나오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 동성애는 청소년 사이에 유행했으며,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현대적으로, 특정 종교 또는 사회에서 국지적으로 터부시 되는 일 때문에 과거 시대를 다룬 현대의 문학작품이 근대적인 도덕관념을 적용한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어쩌면 이 또한 동성애 자체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원문을 캐논으로 대하는 매들린 밀러의 학문적 기반에서 온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물론 책의 주제가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둘 다 남자이기 때문에 지극히 표면적인 레이블로는 동성애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범성애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책을 읽다 보면 자명해지는 사실은, 매들린 밀러의 이야기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순수한 애정을 담은 노래에 가깝다.


2010년대 TV계를 강타한 〈왕좌의 게임〉 TV 시리즈를 관람하며, 원작 소설과 영상 작품이 가지는 가장 큰 차이가 인물의 어떠한 부분에 가장 집중하는지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원작에서 '꽃의 기사' 로라스 티렐은, 기본적으로 유능한 기사인데 동성애자일 뿐인 인물이었다면, 드라마에서 로라스 티렐은, 기본적으로 동성애자인데, 유능한 기사일 뿐인 인물로 묘사가 되었다. 알아차리기 힘든 차이점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 무시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그 어떠한 변주보다 원작에 대한 깊은 흠모와 경외감이 독자에게까지 스며드는 각색 작품이다. 동성애라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키워드를 사용했지만, 이는 신과 인간의 차이를 묘사하기 위한, 인간적인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기본적인 뼈대는 신화와 역사의 언저리에 있는 아킬레우스라는 영웅과 그의 자만심(hubris)을 21세기에 읽어도 깊은 공감이 되도록 파트로클로스라는 인간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는 서사시다. 왜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의 명령을 거부하고 태업을 했는지, 왜 브리세이스라는 인물이 그렇게 중요했는지, 왜 두 친구는 전혀 관계없는 헥토르와 얽혀버렸는지, 독자는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마치 댄 시먼스의 <일리움>에 등장하는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인간의 이야기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렇게 매들린 밀러는 노래를 완창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일리아스』는 신화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하는 지점에 위치한 작품이다. 인류가 가장 처음으로 구전으로 전달한 서사 중 하나라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인간이 상상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로 지식을 넘기면서, 고대 문명이 시작했다는 해석을 해 볼 수 있다. 매들린 밀러는 이러한 『일리아스』의 외적인 특징을 작품 내적에도 고스란히 담아낸다. 신들의 이야기를 인간의 목소리로 풀어내면서, 미신의 영역에 있던 과거를 기록된 역사로, 인간의 이야기로 남긴 것이다.


『오디세이아』의 이야기에서 짧게 다루어진 내용에 상상을 가미하여 전개한 『키르케』와는 달리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오히려 독자는 끝이 다가올수록 초조하고, 답답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트로이 전쟁에 출전한 이후는, 마치 충돌하기 직전의 열차를 보는 느낌으로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레 넘기게 된다. 이 폭력적이고 종말론적인 경험 중 유일하게 독자를 구원하는 손길은 매들린 밀러가 찾아낸 인간의 목소리, 파트로클로스의 목소리다. 5세기에 걸친 유구한 번역사와, 10년에 걸친 목소리에 대한 고민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끝)


『아킬레우스의 노래』(2020), 매들린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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