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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Sep 06. 2017

인간의 운명 1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33

인간의 이성은 끊임없이 회의하고
세계를 향해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
회의는 삶에 대한 부정도 아니고,
직면한 사태에 대한 절망도 아니며,
부조리에 대한 좌절과 패배도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위대해지고자 하는 만큼 어리석어지는 역설적인 동물이다. 그저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 인간 존재의 실체다. 


사유를 통해 비참이라는 실존을 일깨우려고 하였으나, 인간 존재는 아마도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 진실을 외면하려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창조한다. 존재자는 그러한 모순된 비참이라는 실존적 현실을 바탕으로 사상과 예술을 비롯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한다. 또한, 인간 존재는 이 창조의 위대함 앞에서 스스로 신적인 도취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 위대한 자아 도취가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인간 삶의 의미 자체를 회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 존재가 무리에서 벗어나 고유한 주체적 자아로서 사유하며 인식에 눈을 떠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현재 우리 인식의 나태함이, 의식의 저열함으로 인한 탐욕이 이 세계의 운명을 재앙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나긴 잠에 빠진 의식을 새롭게 일깨워야 한다.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달에 의해 물질적 풍요에 젖어 나태해진 인간 정신에 인식의 문을 열어젖히고 빛을 비추어 주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명은 양심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인간 존재의 운명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운명이 인간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의 삶이 인류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은 인간 존재의 운명과 미래를 낙관만 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이 인류나 인간 존재의 내면을 몰락시키는 것이라고도 단정지을 수 없다. 인간 존재가 인류라는 진정한 존재자들의 공동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존재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신뢰를 일구어 가야 한다. 그것은 존재자와 타자의 개별적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개별 인간 존재와 다수의 인간 존재를 엮어주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매우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지만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끈과 같은 것이다. 인식이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과 같은 참된 인간성에 대해서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


인식의 나태를 벗기 위해서 인간은 회의라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이 회의가 새로운 대상이 아닌 동일한 인식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면 이것은 맹목적인 불신으로 고착화될 수 있고 인간의 관념과 의식을 좌절시키게 된다. 좌절은 존재자의 의식은 물론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개별 존재자와 존재자의 관계를 파탄낼 수 있고 이 개별 존재자들 관계의 붕괴는 곧 인간 사회 전체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지적 회의는 인간 존재의 욕망과 쉽게 타협하려는 속성 역시 가지고 있다.


인간은 지성을 도구로 삼아 많은 이유를 들이대며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할 수 있다. 욕망 자체를 구현한 현대의 경제, 사회 체제들은 이미 인간 스스로의 욕망을 대변하는 이론—대표적인 것이 경제학 이론이다. 이 지구 상의 주류 경제학과 노벨경제학상은 한 학파와 소수의 거부들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타락했다. 이들의 금융경제학의 폐단이 가져온 자본주의의 민낯과 인간 존재와 인간성의 파멸을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해야만 한다. 따라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수학 방정식이 지배하는 순수 경제학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공동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 사회 체제 혹은 국가 체계의 울타리로서 <정치경제학>이어야만 한다—들로 인해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그 결과로 어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을 잃고 죽음에 이르고 어떤 인간은 이성을 잃고 감당할 수 없는 부와 탐욕 속에서 살아간다. 이 모두가 온전한 인간의 운명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그 자체로는 순수하며 운명을 관조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현실의 지평선에 닿는 순간 탐욕과 교만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끊임없이 회의하고 세계를 향해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 회의는 삶에 대한 부정도 아니고, 직면한 사태에 대한 절망도 아니며, 부조리에 대한 좌절과 패배도 아니다. 이성이 갖는 진지한 회의는 인간 존재의 참된 지성과 양심의 이정표와 같다. 


인간의 운명이란 결코 죽음이라는 허무의 종착역을 향해 떠밀려 가는 거역할 수 없는 조류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지만 허무와 고통이 지배하는 암흑의 바다에서 인간의 운명은 별빛을 향해 나아가며 생명과 존재를 지향하는 역동성을 품어야 한다.


인간의 운명은 죽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삶이라는 모든 과정의 역동성들을 통해 고유한 존재자로서 개별화되어지게 되고 또 그렇게 분화되고 개별화된 각 존재자들의 조화가 이루는 사회와 문명 속에 남겨지게 된다. 인간은 그저 그런 패거리에 휩쓸려 떠도는 부유물이거나 부속품으로서 허무 속에 잊혀지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잘 들어보라. 인간 본질의 심연에서 요동치는 영혼의 고동 소리를, 그 존귀한 소리를. 신마저 초라하게 만드는 인간 존재의 심연은 그의 운명을 결국 죽음이라는 것조차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완성시켜 준다. 

우리는 신이 인간을 왜 고귀한 존재로 빚었으며 창조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조리한 세계는 인간이 만들며 그 부조리는 신을 향한 이해를 거부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들이 일군 문명의 부조리에 대해 세계를 탓한다. 눈부신 현대 문명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의식으로 인해 거대한 야만이 되어가고 있는 인간 문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모순되며 역설적인 존재, 그러한 인간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별 존재자 스스로—집단의 평균율에 의지하지 않는 존재자—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고 운명의 방향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의미가 적어도 내 삶을 더욱 깊은 곳으로 데리고 가며 더 나아진 삶—이것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그런 무통무비(無桶無悲)의 삶을 일컫는 것이 결코 아니다—에 대한 태도를 갖게 한다. 우리는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미숙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는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미련에 눈길을 두기 보다 존재자로서 자기 자신을 위한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들이 미미하다고 말하는 삶이란 너무나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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