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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A Jun 08. 2019

여전히 아무도 벗어나지 못했다.

전족 : 10cm 발에 갇힌 여자의 운명-더봄 중국문학전집 03

집에 강도가 들었다. 강도는 칼을 들고 휘둘렀다. 강도를 피할 길은 맞서 싸우다 죽든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든가 둘 중 하나다. 창문으로 뛰어내려 죽기를 택한다. 자살일까, 타살일까?


자의와 타의의 문제 

자발성의 문제는 골치가 아프다. 시점을 어디까지 놓고 보느냐. 권력이나 힘의 작동방식을 어디까지 고려하느냐에 따라 자의와 타의의 판단이 달라진다.      


비단 강도를 피하기 위한 투신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다이어트, 하이힐 신기, 정장 입기 그리고 전족의 문제도 여기에 해당된다.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것은 나지만 그 결심을 내리도록 작동한 사회의 시선을 고려하면 이건 자의일까 타의일까? 신발을 사서 발을 욱여넣는 건 나지만 하이힐을 신거나 화장을 하지 않았을 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는 상사가 두려워 감수한 고통이다. 한여름에 넥타이를 차는 것, 그리고 딸의 발을 묶어 발뼈를 부러뜨리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권력자와 약자의 답이 다르다. 권력자는 이 모두를 자의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내가 못마땅해 한 것은 사실이지만 너에게는 이것을 거절할 권리와 힘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걸 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보내거나 사형에 처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반면 약자는 권력에 떠밀려서 한 일이니 타의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이걸 거부한다면 사회적으로 고립될 테니까.      


차라리 한 세대에만 작용하는 권력이라면 자의와 타의의 답을 내놓기는 쉽다. 그러나 이 권력이 수 세대에 걸쳐 내려오는 것이라면? 어느덧 약자조차 이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답을 내리지 못한다. 권력자의 시선에 물들어 그들의 시선으로 타인을 대하기 때문이다.     


[전족]은 약자의 딜레마를 그린 소설이다. 과향련은 자신을 사랑하는 할머니의 강압 때문에 발을 묶었다. 이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느끼자 스스로 발을 묶었다. 그리고 그녀가 속한 사회는 발을 묶은 이에게만 권력과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딸이 그 고통을 감수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과향련은 딸을 떠나보냈다. 그런데 사회가 변했다. 이제 전족은 더 이상 권력의 상징이 아니며 구태의 상징이 됐다. 전족을 구태로 몰아가는 데 딸이 앞장섰다. 과향련은 죽음을 택했다.      


과향련이 전족에 집착하는 모든 행위는 마치 자발적인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발을 묶고 심지어 전족을 주장하는 이들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작가는 전족을 막기 위해 딸을 떠나보내는 행위를 통해 그녀의 행위가 생존을 위해 타의에 떠밀려 진행된 것임을 보여준다.      


약자는 시선을 점유하지 못한다     

강자는 바라본다. 권력을 가진 자는 평가하고 명령할 뿐이다. 시선을 점유한 강자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정한다. 다시 말해 규율과 기준을 세울 수 있다. 약자는 시선의 대상이 된다. 약자는 강자의 기준을 따르거나 고립되거나 둘 중 하나다.      


이런 사례는 주위에서도 흔하다. 상사의 자리는 사무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면서도 타인의 시선은 비껴갈 수 있는 곳에 있다. 말단 사원의 자리는 모두의 눈에 띄는 곳에서 모두에게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곳에 있다. 설사 아무도 그 말단사원을 쳐다보지 않더라도 말단사원은 시선을 받을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위축된다.      


과향련이 전족에 매달린 이유는 시선을 점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집안의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하는 내내 시선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녀가 전족경연에서 승리해 집안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권력은 시아버지에 의해 부여된 것일 뿐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듯 여겨졌던 그녀가 딸을 떠나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시아버지는 죽어가지만 그가 세운 질서는 집안에서 여전히 작동했다. 시아버지가 죽었어도 그 질서가 그녀에게 힘을 부여해줬기 때문에 그녀는 이를 놓을 수 없었다. 질서를 깨는 순간 그녀는 권력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딸 연심이 고통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딸과 생이별하면서도 조카들에게 기존의 질서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사회가 바뀌었을 때 과향련이 보련여사로서 적극적으로 전족을 옹호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전족의 몰락과 폐해를 인정하는 순간 그녀는 완전히 몰락해 생존의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전족을 풀고 거리를 절뚝이며 돌아다니는 노인이 그녀의 미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항변할 수밖에 없었다.      


과향련은 그저 자기의 생존을 두고 강력하게 작용하는 외부의 권력기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다. 전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발을 묶었다. 이미 발이 망가져 전족 외에 돌아갈 길이 없는 상황인데도 다시 전족을 풀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그녀는 발을 묶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품위 있게 설득했다.      

과향련은 끝까지 피해자였다. 다만 적극적 피해자였을 뿐이다. 그녀의 의지를 묻지 않고 그녀에게 이랬다 저랬다 바뀌는 외부세계가 끊임없이 폭력적이었을 뿐이다.      


과향련의 발도딸 연심의 발도 끝내 해방되지 못했다      

얼핏 보면 오이디푸스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딸이 어머니를 넘어섰으니까. 구태로 대변되는 어머니의 시대가 끝나고 딸이 여는 새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설은 끝까지 비극이다. 과향련이 죽으면서 느낀 것은 ‘구태의 종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끝까지 우리는 약자구나”하는 비참함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심의 신발은 마치 주체적인 신여성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진정한 해방이었다면 딸 연심은 서구열강의 것이 아닌 스스로 고안해낸 새로운 신발을 신고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연심이 택한 것은 서구에서 들어온 하이힐이었다. 하이힐도 억압이긴 마찬가지다. 발뼈를 부러뜨리지 않을 뿐 전족처럼 발을 꽉 옥죈다. 여성의 발에 해악이 되긴 마찬가지다. 이 역시 폭력적으로 중국을 침략해들어오는 서구 열강을 대변하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연심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족’을 하지 못해 전족세계에서 최하층으로 사느니 차라리 하이힐 세계의 권력자가 되기를 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소설에서도 쓰여 있듯 과향련은 전족을 해야 할 시기에 딸 연심을 탈출시킴으로써 연심은 전족할 적기를 놓쳤다. 큰발로서, 못생긴 여성으로 살게 되는 것보다 하이힐 시대의 신여성이 되는 게 연심으로서는 합리적 선택이다.      


과향련의 발도, 딸 연심의 발도 끝까지 해방되지 못한 셈이다.      


왜 여성의 발인가     

여성의 몸은 전족과 하이힐처럼 이념의 격전지가 되어 왔다. 계급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전족 모양새를 갖춘 여성은 신분 높은 이에게 시집을 간다. 코르셋을 졸라매 가늘디 가느다란 허리를 만든 여성은 귀족 중에서도 높은 계급에게 시집을 간다. 먼나라 이웃나라 얘기가 아니다. 한국도 그랬다. 조선의 여성은 신분이 높을수록 절을 하다 목이 부러져 죽을 정도로 무거운 가채를 이고 있어야 했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열심히 공부하면 신부의 얼굴이 바뀐다”라는 급훈이 써있었다는 남학교의 교실의 우스갯소리가 전혀 우습지 않다. 열심히 공부해 계급이 올라가면 아름다운 신부를 얻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 지금은 바뀌었을 뿐이다. 옛 중국에서는 전족 모양새를 놓고 미를 따졌다면 지금은 말랐을수록 선이 가늘고 길수록, 피부가 흴수록, 눈이 클수록, 그리고 어릴수록 등등으로 논할 뿐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대부분의 미의 기준들은 여성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주체가 되는 데 훼방을 놓는 경우가 많았다. 전족이나 코르셋, 가채를 한 채로 뛰어다닐 수 없다. 미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집안에 묶여야 한다. 마른 몸매와 희고 고운 피부를 갖는 데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스트레스와 장시간 노동으로 피로가 쌓이는 몸으로 마른 몸매, 희고 고운 피부를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신화’다.      


남성은 사회, 경제적 주체이므로 육체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였으므로 남성의 권력과 계급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여성과 여성의 대결이 아니다     

이 소설을 잘못 읽는다면 모녀의 대결, 여성과 여성의 대결이 주제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약자로서 겪어야 하는 분열이 주제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 같다.      


벗어날 수 없는 외부세계의 폭력적 권력 앞에 과향련도, 연심도 고통받았다. 그리고 끝까지 해방되지 못했다. 이 둘은 각각의 측에서 앞장선다는 점에서 주체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없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분열양상을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한국은 그 어떤 것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없었다. 서구열강, 중국, 일제의 힘이 거세게 들어오는 통에 각각의 것을 억지로 선택하지 않으면 죽음으로 내몰렸다. 결국 한국 국민은 저희들끼리 내분되어 서로 싸우게 됐다. 외부 권력의 대리전을 우리의 피로 치른 셈이다.      


여전히 여성의 몸은 이념과 계급의 격전지다. 이 격전은 여성 스스로가 느끼는 자책감, 자괴감을 되돌아와 마치 스스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마치 전족처럼.      


현재 벌어지고 있는 거친 젠더갈등은 자각과 혼란, 그리고 각 측들의 거친 항변이 봇물처럼 터지면서 발생한 소용돌이라고 여겨진다.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소설 속에서는 과향련이 자살함으로써 이런 대결이 막을 내렸지만 현실에서는 자살할 과향련도 없거니와 누군가의 자살로 끝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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