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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A Aug 04. 2019

소설 [캐롤]

테레즈의 성장소설, 내 스무살을 돌아보며

스무살      


스무살. 쓰든 소리를 내든, 읽기만 해도 진부한 신파처럼 느껴진다. 많은 문학작품에서 스무살은 그런 나이로 묘사된다. 발그레한 뺨에, 어른에 대한 선망, 수줍음, 성에 눈을 뜨고, 그렇지만 순수하고, 적당히 영악스러운 나이. 그렇게 묘사되는 스무살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 나는 그때 비참했다.      


[캐롤]의 테레즈는 내 스무살을 돌아보게 한다. 당시 나는 8호선의 세계와 2호선의 세계를 오갔다. 대학교로 가는 2호선에는 이상자아가 있는 세계였지만 8호선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세계가 있었다.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 부에 대한 갈망, 부유하고 똑똑한 친구들이 2호선의 세계에 살았다. 8호선에는 끔찍했던 학교의 규제와 구질구질함, 가난함 등이 있었다.      


2호선 대학교에서 아무렇지 않게 5000원짜리 ‘아메리카노’와 1만원짜리 밥을 사먹고 놀다가 8호선에 올라 과외나 수업을 하러 학원에 가는 길이면 노동의 고단함과 지긋지긋함,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가난과 그들에 대한 연민, 책임감같은 것들이 온몸에 덕지덕지 올라붙었다. 내 힘겨움조차 누군가에게는 사치라는 사실이 더 역겨웠다. 시간시간 역겨움과 부러움을 오갔다.      


[캐롤] 1장의 로비체크 부인에 대한 테레즈의 감정도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대 디자이너’라는 꿈을 품은 것만으로도 테레즈는 자신을 특별하게 느꼈지만 몸담은 현실은 구질구질한 백화점의 판매원. 로비체크 부인은 그런 일상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다. 테레즈가 그녀에 대한 연민과 끔찍함을 느낀 것은 로비체크 부인과 자신이 혹여나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상자아-캐롤     


그 비참함에 익숙해졌을 무렵, 내가 멋있게 느꼈던 사람은 어른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익숙하게 처리하면서도 권태로워하는 어른. 무심하게 양복을 툭 걸쳐입고 지겹다는 듯이 모든 일들을 척척 처리하는 키아누 리브스나 관대하고 익숙하게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이순재, 매사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장난스럽게 일을 해치워버리는 잭 스페로우같은 사람이 난 좋았다. 핵심은 생활고를 모르는 것이다. 생계 걱정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일들을 해내는 것.     


‘테레즈는 왜 캐롤을 사랑했을까’에 대한 대답이다. 역자의 후기에 따르면 테레즈는 캐롤에 본인은 느끼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느꼈고 캐롤은 테레즈에게 딸 린다의 결핍에 따른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사실 나부터도 영화 ‘캐롤’에 나온 것 같은 케이트 블란쳇이 멋드러진 모피코트를 걸치고 광채를 뿜는 금발로 하이힐을 신은 채 또각또각 걸어온다면 사랑에 빠질 것 같다. 그러나 그녀에게 느끼는 건 모성이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 ‘나를 내가 바라는 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지. 실제로 테레즈가 캐롤에 빠진 백화점에서의 인상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캐롤은 테레즈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부유함, 아름다운 외모, 적당한 직업의식. 그녀와 있을 때 테레즈는 발을 딛고 있는 생계를 잊는다. 돈 몇 푼을 세는 고통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진공의 세계로 들어간다.      


결핍된 모성과 이상자아     


캐롤은 테레즈가 자신의 집에 놀러와서 우유를 가져다주며 말을 놓는다. 우유는 유아성을 뜻하는 메타포로 자주 사용된다. 캐롤과 테레즈는 미국을 여행하며 온갖 술이란 술은 다 마신다. 감정이 깊어지고 고통이 더해진다. 테레즈는 캐롤이 여행에서 먼저 돌아가 힘겨운 현실에서 딸 대신 사랑을 택하는 사이에 ‘아픈 만큼 성장한다’.     

뉴욕으로 돌아간 테레즈는 외양은 물론 목소리까지 달라진다. 관계까지도. 여행하는 순간까지만 해도 캐롤이 테레즈에게 말을 놓고 대부분 명령조로 툭 던지는 말투였다면 카페에서 재회한 뒤 캐롤은 테레즈에게 권유형, 의문문을 사용한다.      


이 장면 때문에 나는 이 둘의 관계를 모성의 결핍 때문에 비롯된 관계로 보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의 묘사처럼 테레즈는 본인의 비어있는 악보를 캐롤이라는 음계로 채운다. 만일 이 둘의 관계가 모성과 딸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었다면 재회를 했더라도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테레즈가 성장한 이상 캐롤은 더 이상 모성이 될 수도, 캐롤이 테레즈에게서 딸을 느낄 수도 없을테니.     


이 부분에서 [캐롤]은 전형적인 연애소설의 서사를 따르고 있다고 본다. 우월한 남성어른이 아직 미숙한 어린 여자에게 사랑과 고통, 삶에 눈 뜨게 해주는 게 대부분의 연애소설의 흐름이다. 미숙한 여린 여자들의 상당수도 부성의 부재를 겪다가 남성어른에게서 그런 면들을 채우기도 한다. 테레즈가 캐롤에게서 모성을 발견했든 이상자아를 발견했든 둘다 연애소설의 서사라는 측면에서 새롭지 않다.      


너는 왜 내 적수가 될 수 없나     


캐롤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리처드와 하지의 존재다. 둘은 꽤나 ‘부드럽다’. 결코 폭력이나 감금으로 테레즈와 캐롤을 억압하지 않는다. 치기 어린 외도로 여겨 기다린다. 성관계를 해도 질투하기보다 그저 자신의 옆에 없다는 것에 분노감을 느끼는 것 같다.      


리처드와 하지가 테레즈와 캐롤을 연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을 이등시민으로 여기기 때문일까?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기 때문일까?     


후자라고 생각했다. 동성과 동성의 깊은 감정은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이 뿌리깊이 박혀 있다. 이 둘이 성관계를 했대도 일단 충격을 먼저 느끼지 않을까. 이성과 성관계 장면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것같은 분노보다도.      


역자의 후기에 따르면 이 때문에 캐롤은 꽤나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에 동성애의 말로는 대부분 린치에 의한 죽음, 자살, 사회적 고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캐롤은 비록 전남편의 추격을 당했으나 사회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테레즈 역시 마찬가지다.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쓸데없는 말솔직한 후기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쓰고보니 죄다 푸념이다.      


나는 이 소설을 연애보다 성장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읽느라 조금 힘들기까지 했다.      


테레즈의 연애감정에 대부분 공감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캐롤은 좋지만 그녀의 명령조나 강압적인 태도까지 왜 받아들이는지를 모르겠다. 전반적으로 테레즈의 연애감정은 짜증스러웠다. 글을 쓰기 위한 땔감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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