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A Aug 13. 2020

매드맥스, 좋은 영화는 선동문이다

여성성과 모성은 남성성과 폭력의 치료제일까?

밤 늦도록 남아 기사를 쓸 때였다. 존경하고 증오했던 당시 국장은 한 마디 툭 던졌다. “기사는 선동문이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라며 씩 웃었다. 옳은 말이다. 좋은 기사는 선동하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선동해야 한다. 독자의 가슴을 울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재미도 있어야 한다.


좋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좋은 영화는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면서도 철학서이자 선동문이다. 영화만이 아니다. 소설, 만화도 그렇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좋은 작품이다. 매드맥스는 독특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래픽을 자제하고 직접 차를 터뜨린 것이나 서커스단 인력을 활용해 촬영한 액션신은 마치 신화처럼 회자됐다. 특히 전투중 기타를 연주했던 기타맨은 수없이 패러디됐다. 

     

영화에 담긴 마음은 더 깊었다. 'Where must we go… we who wander this wasteland in search of our better selves?- the First history Man'. ‘희망없는 시대를 떠돌고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최초의 역사가’로 번역된 말이다. 


영화는 답을 제시한다. 가야 할 곳은 없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곳에서 싸워야 한다. 그리고 감독 조지 밀러가 ‘희망없는 시대를 떠도는 우리’로 바라보는 이는 여성과 어린이, 노인, 장애인이라고 나는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미니즘’ 영화다     


매드맥스가 개봉하고 나서 논란이 된 주제는 페미니즘 영화냐는 것이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볼 수 없다, 과도한 해석이라는 주장과 누가 봐도 페미니즘 영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페이스북 등 SNS에서 논쟁했다.(실상 이런 논의는 우습다. 페미니즘을 다뤘다고 누군가 해석하고 판단하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지 이를 지나치네 마네를 논평하는 것은 그 무슨 실례란 말인가. 왜 이런 실례가 페미니즘에만 허용되는가.)   

  

주인공 퓨리오사는 여성이자 장애인이다. 그녀는 여성이 주류로서 풍요와 모성, 배려가 핵심가치를 이루던 사회에서 시타델로 끌려왔다. 시타델은 남성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다. '갈고리와 작살은 반역자(여성과 소수자)를 세우려고' 한다.      


퓨리오사는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아 임모탄의 '꽃'을 이끌고 어머니의 땅으로 향한다. 그의 성적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살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모유를 생산하는 가축이 되는 여자들. 이들은 중세시대 유럽에서 여성의 정조를 강요하기 위해 채웠던 ‘정조대’를 차고 있다. 사막에서 버려질 위기에 처했을 때 “무엇이든 다 들고 뛰어오라”는 퓨리오사의 지시에 정조대만 버린 것은 임모탄의 꽃으로서 안락한 삶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으로서 광야에 홀로 서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주목할 점은 배우들이다. 임모탄의 꽃으로 캐스팅된 흑인, 노인이자 여성인 배우들. 국내 영화계는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여성이 주연인 영화는 많지 않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여성을 주연으로 썼을 뿐 아니라 할머니를 액션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160일 더 가봐야 피안의 세계는 없다     


영화의 위기는 퓨리오사가 절망하는 부분이다. 퓨리오사는 어머니의 땅이 사라진 것을 알고 절규한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피안의 세계를 찾아 죽음과 배고픔을 각오하고 소금사막을 건너기로 한다. 그런 그녀를 막은 것은 맥스. 맥스는 160일 더 가봐야 별 거 없다며 돌아가자고 말한다. 대수롭지 않게, 조금은 장난스럽게.


영화의 절정은 그녀가 시타델로 돌아가는 부분이다. 임모탄과 워보이까지 나와 있기에 이제 시타델은 방어력이 약해졌다. 차라리 돌아가 임모탄을 치고 시타델을 점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전투전략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조지 밀러 감독의 선동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남성과 폭력의 세계에서 도망쳐봐야 피안의 세계는 없다’는 메시지다. 죽을 각오로 떠나느니 현실을 바꾸라는 것. 


그리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낸다. 임모탄을 친 퓨리오사는 시타델의 주류가 된다. 잔심부름꾼이었던 어린이들은 패닉에 빠진 워보이를 대신해 그들을 시타델의 탑으로 올린다. 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는 여성뿐 아니라 장애인과 노인도 탔다. ‘가축’이었던 어머니들은 몸을 일으켜 물을 해방시키고 생명을 싹틔운다.

      

시타델이 남성과 폭력의 도시에서 모성과 생명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권력의 이동, 주류 가치의 변화. 그리고 남성으로 대변되는 맥스는 그런 퓨리오사를 응원하며 떠난다. 조력자로서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왜 여성성은 모성의 발로여야 하는가     


잘 만든 영화는 철학이자 선동이며 오락거리다. 매드맥스는 잘 만든 영화다.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투쟁해야겠다, 강해져야겠다, 나 혼자 피안의 세계로 떠나기보다 그 용기와 힘으로 내 주윗사람들도 구해야겠다고 당시 나는 결심했다.


그러나 동시에 답답해졌다. 남성성과 대결하는 여성성은 언제나 모성의 발로라야 하는가? 남성의 세계에서 모성은 신성하며 지켜야 할 대상이자 자존심이다. 자국 여성이 적에게 강간 당하는 순간 신성은 파괴되고 남성의 자존심도 무너진다. 


남성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되는 페미니즘도 이런 사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성은 모성을 가지고 있다, 모성은 신성한 것이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더 나은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모성 때문이다 라는 논리.


여성과 모성의 분리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여성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 이전에 그냥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추악하고 신성하지 않고 천박하다. 또 폭력적이기도 하다. 같은 논리에서 남성성과 폭력을 연관짓는 사고방식도 유치하다. 남성은 인간이기에 아름답고 신성하며 고상하다. 남성의 폭력성과 대결하는 여성의 모성. 모성이 없는 여성은 남성과 대결할 수 없나. 인간으로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참전할 수 없나.


상대방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논리에는 공허한 순간이 찾아온다. 퓨리오사가 멀리 떠나 더 이상 추격할 수 없게 되자 임모탄은 지루해한다. 혼자 주저 앉아 노래를 흥얼거린다. 적과 여성이 존재해야 남성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처럼.


가 보지 못한 길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최초의 역사가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현실이 틀렸다는 것은 알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 최후의 역사가는 그 답을 알까. 매드맥스2가 기대된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 [캐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