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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A Apr 19. 2022

꿈일기-내가 죽는 꿈1

죽음의 시나리오

삶은 순회공연 같았다. 1번, 2번, 3번 등으로 불리는 행성을 전전하며 살고 죽기를 거듭했다. 사는 것도 죽는 것 만큼 괴로웠다. 그래서인지, 신은 특별한 권리를 선배들과 내게 줬다. 어떻게 죽을지 결정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택지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각 행성에서 얼만큼의 빈부를 누리는지, 가족구성이 어떤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방식은 많기도, 적기도 했다. 중요한 건 그 틀 안에서 죽음의 방식을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여러 행성을 전전하며 살고 죽기를 반복하는 우리를 배려한 조치였을 거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 실상 배려인지도 확실치 않기도 했다. 


실제 어떤 선배들은 이건 배려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죽음의 방식을 선택했다는 걸 정작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선배들과 나는 오직 꿈 속에서만 내가 행성을 순회하는 존재이며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배들의 존재도 꿈 속에서만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의 방식 역시 꿈속에서만 정할 수 있었다. 


깨어나는 순간 꿈속의 모든 것을 잊는다. 내 존재의 굴레도, 선배들도, 내가 죽음을 택했다는 것도, 내 죽음의 방식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도. 그건 꿈 속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낮에 눈을 뜨고 했던 모든 활동들이 마치 오래 전 일처럼 가물가물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무한히 재연되는 무성영화처럼 느껴졌다. 점차 꿈 속의 나와 낮의 내가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런 생각 때문일까. 처음에는 되도록 내가 아프지 않게,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방식이 지겨워졌다. 선배들과 대화가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날이면 화풀이 삼아 '낮의 내'가 고통스럽게 죽도록 했다. 혹은 엽기적인 방식으로.  


첫번째 행성에서 나는 돈은 별로 없었지만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다. 배우자의 눈물과 자식들의 통곡 속에서 원하는 만큼 유언을 남기고 보드라운 침구를 느끼며 죽어갔다. 죽는 순간이 흡족스러워 시신에서도 미소가 남아 있었다. 


네 번째 행성에서는 좀 달랐다. 하필 죽음을 선택하는 날 선배들과 다퉜다. 다툼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거였지만 꽤 화가 났나보다. 낮의 내가 자다가 집에서 불이 나 죽게했다. 질식사고로 죽게 했어도 됐으련만 나는 더 잔인한 방식을 택했다. 방문고리가 뜨거워져 방 안에 갇힌 채 동동거리다가 무너진 책장에 깔렸다. 맨정신으로 고통에 겨워하는데 커튼으로 올라온 불이 몸에 옮겨붙었다. 옴싹달싹도 못한 채 맨정신으로 모든 고통을 느끼다 죽었다. 


네 번째 행성에서 돌아왔을 때는 어쩐지 기진맥진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오래 전 일처럼, 남의 일처럼 느껴졌어도 말이다. 내게는 네 번째 행성에서 겪은 죽음과 관련해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고통은 남의 일이라도, 보는 것만으로 힘들었단 걸 깨달았다. 다섯 번째 행성에서 다시 살고 죽기가 무서워질 정도였다. 


지금 나는 일곱번째 행성에 있다. 다시 죽음을 택할 때가 됐다. 


이 행성에서 나는 일흔살의 여자다. 여자라기보다 할머니다. 자세가 꼿꼿하고 키가 크고 마른 할머니다. 염색하지 않고 짧게 잘라 파마한 머리가 하얗게 곱슬거리는. 주로 검은 옷을 입는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적잖은 재산을 모았다.  


굳이 선배들과 상의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 날은 왠지 내 죽음의 방식을 선배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나 시골에서 죽고 싶어". 


A선배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나쁘지 않네. 마치 자연으로 돌아가듯 말이지?" B선배도 덧붙였다. "부자들이 오히려 그런 데서 죽고 싶어하더라. 수목장이니 뭐니 하는 거."


난 도리질쳤다. "아냐, 그런 방식이 아냐. 캄캄한 밤에, 허물어져가는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집 마당에서 죽을 거야." 


A선배와 B선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 선배들은 벌써 50번째 행성을 돌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C선배가 눈빛으로 다음 말을 기다려줬다. 


"그리고 허접한 개집에 머리를 쳐박은 채로 죽을 거야." 


그 말이 끝나고서야 A선배와 B선배가 날 쳐다봤다. A선배가 말했다. "몸통은? 몸통까지 다 개집에 넣을 거야?"


"아니, 조그만 개집에 어떻게 다 들어가? 머리만 개집에 넣고 몸통은 바깥으로 나와서 대자로 뻗어있는 거지."


A선배가 코웃음쳤다. "야, 그 재산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죽는다고? 살해된 줄 알텐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죽어도 맥락에 맞게 죽어야지. 너무 튀게 죽는 것도 다음으로 넘어가는 데 피곤해."


"무조건 자살이야. 자살로 할 거야."


B선배가 물었다. "방법은?"


"몰라. 이제부터 생각할 거야"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C선배는 다시 눈빛을 돌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고 A선배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B선배는 내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B선배의 눈길을 피했다.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 폐가같은 시골집 마당의 개집에서 그냥 머리를 쳐박고 죽고 싶었다. 그 기괴함이 좋았다. 솔직히, 기괴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편안할 것 같았다. 몸은 별빛을 맞고 머리는 착한 누렁이가 살다간 흔적 속에서 편안해질 것 같았다.


그 날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내 시나리오에 선배들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잠이 더이상 오지 않는다며 낮으로 돌아가버렸다. 혼자 꿈 속을 서성이다 나도 다시 낮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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