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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 직장인 Oct 15. 2023

이순신의 '선승구전'에 대해 생각하다

(2편) 아산에서 충무공의 발자취를 좇으며 느낀 것들

가을은 어느덧 성큼 다가와있었다. 불과 1,2개월 전에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무더위가 무색해지는 맑고 상쾌한 날씨었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는 늘 찌르듯 다가온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세월의 마디를 느끼곤 한다.


개천절 연휴를 이용해 이순신 장군이 무과 급제 이전에 오랫동안 생활했던 아산을 방문했다. 이곳 아산에는 그의 영혼을 기리는 현충사가 있고, 그곳과 멀지 않은 묘소에 충무공은 아내와 함께 잠들어 있다.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현충원은 꽤 길게 이어진 둘레길과 우거진 나무로 퍽 아름다운 전경을 가지고 있어 묘소 참배 목적 이외에도 도심 속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이끈다. 이곳 역시 너른 대지와 우거진 소나무들 사이로 여러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 직접 촬영한 아산 현충사의 전경


1) 한글 현판이 주는 느낌


여러 문을 통과해서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곳까지는 20분여간을 걸으면 도달할 수 있는데, 특기할만한 사항은 문에 걸려있는 현판이 한자가 아닌 한글로 쓰여있다는 점이다. 혹시 독자분들은 유적지에서 한자 현판을 보고도 해석이 어려워 그냥 지나친적이 있었는가? 사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제창한 이후에도 공식 문서는 물론이거니와 민초들의 대문 문패에 이르기까지 한글보다 한자 표기가 더 널리 통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문화 유적의 현판이 한글로 적혀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더욱이 한자 교육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좌→우로 쓰는 우리나라 말과 달리 우→좌 순으로 쓰인 한자 현판은 더욱이 헷갈리게 느껴질 수 있다. (예컨대, 광화문의 현판이라면 한글 자음의 역순인 '文化光' 표기법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한자 표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쩌면 대중들의 의식 부재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말로도 충분히 의미전달이 가능한 '충무문', '충의문', '현충사' 등의 현판을 구태여 한자로 명기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닐까. 한자를 한글과 병기하는 방법도 중의를 갖는 단어에만 참조용으로만 필요할 수도 있다. 검색을 해보니 현충사는 1966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개보수 및 확장이 되었는데, 비교적 얼마 되지 않은 일인 만큼 기존 한자 현판을 한글로 대체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부터 반성하는 차원에서,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보존은 이러한 작은 관심과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 직접 촬영한 충무공의 영정


2) 활쏘기와 검술에 대한 생각


명궁으로 유명했던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함인지 현충사에는 국궁 체험장이 있었다. 적어도 군복무를 한 독자라면 '사격술'에 익숙할 것이라 생각한다. 훈련소에서만 잠시 배웠다고 해도 가늠쇠와 조준선 정렬을 익히고 호흡을 신경 쓰면 소총으로 100M, 200M가 떨어진 표적지를 맞추는 것도 아주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한편 기상과 바람의 변수를 고려하여 줄의 탄력을 이용해 움직이는 적을 화살로 맞추는 궁술은 참으로 난이도가 높은 일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놀란 은 실제로 발사된 화살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 실제 전투에서 강한 파괴력을 가졌을 것이란 점이다. 이순신 장군은 왜란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까지 전라좌수영에서 수없이 많은 활쏘기 대회를 진행하며 전투력을 길러왔음을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로 조총보다 열위한 무기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조선의 수군은 적을 능히 격퇴할 수 있었다.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 부대를 만나면 도망가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은 철저히 준비된 훈련의 결과임을 다시금 깨 닫는다.



현충사에는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이 묻혀있다. 지난 글에서 잠깐 다루었지만 그는 이곳 아산을 침략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순신에게 연전연패를 당한 왜군이 이에 대한 복수로 이곳을 급습했고 아들 면이 적의 칼에 희생당한 것이다. 이면은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고 무예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수의 일본 무사를 당해낼 수는 없었기에 약관의 나이에 삶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죽었다. 충무공은 그토록 어여뻐했던 아들 면의 전사 소식에 지독하게 괴로워했다. 아비를 두고 먼저 떠난 그의 무덤 앞에 서니 슬펐. 나 또한 자식을 가진 부모이지만 전쟁터에서 자식을 잃은 충무공의 심정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아마도 충무공은 이면의 죽음 속에서 그를 처음 마주한 날들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세상 밖을 나온 핏덩이의 조막손을, 송편 같은 한줌의 볼기를, 명징한 생명의 울음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검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참으로 정교하고 난이도가 가장 높은 무예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검을 휘두르는 각도, 그리고 찌르고 베고 피하는 여러 체 동작과 기의 조합은 그야말로 무한대로 수렴할 것이며, 무거운 무기를 오래 동안 파지 할 수 있는 악력과 강한 스테미너 또한 요구될 것이다. 탄환을 적군을 향해 직선으로 발사하는 총술이 2D의 싸움이라면, 면과 선히 얽히고 부딪히는 검술은 3D의 대결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조선 왜군을 상대로 얼마나 불리한 싸움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왜란 이전 100년 이상의 내전을 겪으며 전쟁을 업으로 삼아온 무사들이 수없이 탄생했고 이러한 숙련된 전사들이 바다 건너 조선을 침공해 왔다. 왜군의 전력에서 당시 신무기였던 조총의 역할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조총 부대의 비중은 전체 병력 중 1/4 임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검대 검의 싸움이 주요했던 것인데, 실전 경험이 전무한 의병이나 일반 군관들은 노련한 왜군 무사들을 능히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기본기가 부족한 초심자가 펜싱선수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불리함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실제 1명의 일본 소년 무사를 조선군 3명이 상대하기도 어려웠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왜란에서 가장 충격적인 패배로 꼽히는 용인전투 역시 이러한 극도의 불리함을 증명하고 있다. 독자는 40배가 넘는 전력의 조선군이 왜군에게 패배한 전투를 들어본 적 있는가? 그것은 바로 1592년 7월 용인 전투에서 벌어졌다. 왜군의 맹장 와키자카는 1천6백의 군사로 안갯속에서 조총을 쏘아대며 7만에 달하는 조선의 군대를 기습하고 이윽고 백병전을 전개했는데, 일기당천 하는 왜군의 기세에 밀려 조선군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며 대패했다. 개인화기를 이용한 현대전의 보병 전투라면 이러한 정도의 수적 열세를 뒤집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 보인다. 하지만 검대 검이 부딪히는 과거의 전장에서는 개개인의 전투 역량이 정말 중요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인순신> 中





3) 패배할 수 없는 자의 비애


이순신에 남긴 업적은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의 군사학에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영국 전 해군준장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는 그의 저서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에서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가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닌 진실에 가깝다. 그 이유는 그가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완벽한 임무를 해냈기 때문이다. (중략) 그는 결정적인 결과를 얻어내야 할 때는 전쟁이 마땅히 이뤄져야 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해 냈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는 궁극의 희생으로서 전쟁을 종결했다’ (it seems, in truth, no exaggeration to assert that from first to last he never made a mistake, for his work was so complete under each variety of circumstances as to defy criticism. (중략) he waged war on the sea as it should be waged if it is to produce definite results, and ended by making the supreme sacrifice of a defender of his country.)’



이순신 장군은 작은 규모의 승리를 빼놓고도 23번 싸워 23번 모두 이겼다고 전해진다. 수많은 변수가 산재한 전쟁에서 어떻게 이러한 통계가 가능한 것일까? 그가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오직 승리를 얻은 비결을 ‘선승전(또는 선승후전)’의 자세에 있다고 본다. 선승전은 손자병법의 ‘승리하는 군대는 이겨놓고 비로소 싸운다(勝兵, 先勝而後求戰)' 줄인 말이다. 그럼 이기고 난 뒤에 싸운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뒤집어 말하면 패배할 싸움은 애당초 시작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실제로 이순신은 불리한 상황에서 아가 적과 싸우라는 선조의 명령도 따르지 않아 모진 수모를 겪었을 정도로 선승전의 원칙을 지켰다. 비록 상관의 명을 거역할지라도, 패배가 예고된 싸움은 하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이 바탕된 것이다.


결국 그는 '모험'을 하지 않는 장수였다. 조선 육군이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으므로, 국운이 달려있던 해상전에서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패는 개인적인 죽음뿐 아니라, 국가의 패망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이길 수 있는 시기에 비로소 전투에 임했다. 따라서 그가 내린 결정과 행동은 전투를 하는 행위(fight the battle)를 넘어, 승리를 구하는 일(claim the victory)이었던 것이라 짐작 해본다. 승리에 대한 완벽한 계산과 실행에 따른 결과로 수차례의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받은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다. 그 유명한 한산도 대첩에서는 왜군 전함 47척을 파괴하고 5천여 명의 사상자 피해를 준 반면, 조선군은 전사 3명, 부상 10명에 불과했다고 알려진다. 임진년을 통틀어 적의 군선 약 3백여 척을 격침하고 2만여 명의 사상자 피해를 입혔는데, 조선의 군함은 한 척도 파괴되지 않고 사상자 역시 2여 명 미만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가 어떤 것을 의미할까? 이순신은 애초에 치열한 싸움을 통해 승부를 가린 것이 아닌 압도적인 우세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는 철저한 분석과 사전 준비를 통해 승리를 장담했고,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미 완벽한 승리를 향해 노를 저어 나아갔을 것이다.


사실 <난중일기>에는 열정이나 도전 같은 거창한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철저한 준비와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간절함의 기록이었다. 스스로에게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았던 충무공의 강직함 앞에 나는 어떠한 형태의 비애와 고독을 느꼈다. 사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병가지상사라고 하는데 왜 그토록 자신에게 관대하지 않았던 것일까? 모든 전투에서 적군을 압도하며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했지만, 정작 마지막 전장에서는 스스로의 목숨을 잃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큰 아이러니이며 애달픈 일인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현세에도 다양한 형태로 선악의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다음 편에서는 한 국가 장수인 이순신과 대척점에 있었던 국왕 선조와 원균에 대해서도 다루며 글을 이어가 보려 한다.


P.S : 어쩌다 보니 이순신에 대한 글을 계속 쓰게 되었다. 비전공자로서 대단한 통찰을 써내려갈 역량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어 민망함이 따른다. 이 포스팅은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을 향해 느껴온 마음의 기록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함께 생각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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