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유하는 직장인 Aug 05. 2023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1편) 인간 이순신을 통해 삶을 생각하다

1) 인간 이순신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한국 문학에 쏟아지는 축복이라는 찬사를 받은 <칼의 노래>의 첫 문이다. 기자 출신인 김훈 작가는 특유 미문으로 전란을 마주한 이순신의 심리를 치열하게 그려내어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충무공 이순신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여러 매체를 통해 다뤄진 이순신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아마 용맹한 전쟁 영웅의 모습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삶이 참으로 애닯고, 또 그가 고통과 좌절을 딛고 마침내 이뤄낸 일들은 어떠한 매체 온전히 담을 수 없을 만큼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왜란 이전 그는 북방의 오랑캐를 물리쳤고 임진년과 정유년의 전쟁에서는 우리의 남해에서 일본의 주력 선단을 무수히 격파했다. '전쟁의 핵심은 보급'이라는 말이 있다. 해상에서의 이순신의 승리는 단순히 일본의 수군을 멸하는 것이 아닌 왜군 보급선의 차단을 의미했기에 이는 적의 숨통을 끊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왜적의 침입에 맞서 수많은 조선의 뛰어난 장수들이 전국 각지에서 목숨을 바쳐 활약했지만 나는 진정으로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 아래 놓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 (좌) 영화 <명량>, (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이번 여행을 통해 그가 목숨을 바쳐 지켜 낸 남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섬들이 버려진 마을처럼 질서 없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섬에서 꽃과 풀은 무성했다. 사실 <칼의 노래>의 김훈 작가는 성웅(聖雄) 이순신보다는 고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한 인간의 심리를 자세히 그려냈는데, 나는 섬과 섬 사이로, 그리고 안개 너머 까맣게 몰려든 왜선을 보며 그가 느꼈을 두려움을 상상했다. 그것은 한 군단을 이끄는 장수로서가 아닌, 한 개인이 감당했어야 할 처절한 공포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개별적인 공포만큼은 충무공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 숙소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이곳에서 나는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 자주 울었다. 난중일기에서 그는 전을 지켜야 했기에 어머님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마땅히 3년 상을 치르지 못하는 통탄함에 울었고, 왜적과 싸우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이순신은 장군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울었고, 개인의 고단한 운명과 싸웠다. 그리고 섬과 섬 사이로 파고드는 적의 선단이 필경 두려웠을 것이나, 마침내 한 인간으로 여러 감정을 극복하고 왜군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


<난중일기 中(1597년 10월 14일)>




이순신을 통해 나는 '늦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평균 수명이 50세 남짓하던 시절 이순신은 34의 나이에 무과를 급제하고, 한 나라의 장군에서 무계급자로 강등을 당하는 백의종군을 번이나 경험했다. 특히 두 번째 백의종군에서 당한 문초의 후유증은 전쟁 내내 그를 괴롭혔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보직해임이라는,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처절한 늦음'을 다시금 견뎌야 했을 것이다. 이 또한 한 인간의 몸으로 온전히 받아 내야 할 실체적 고통이었을 것임을 생각다. 노량에서 전사할 당시 충무공의 나이가 54세이니, 사실 관직에서 고작 20년을 보낸 셈이다. 그리고 그의 20년은 한 나라의 역사를 바꿨다. 나의 사회생활이 어느덧 10년 남짓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맞서고 있는 세월에 대해 생각해본다.






2) 버려진 섬과 꽃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문장을 보면 사실 조선의 의병들에 대해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달아나 명나라로 망명을 하려던 무능한 왕을 보면서도 우리 민초들은 이 땅에 남아서 괭이와 죽창을 들고 조총과 맞서 싸웠다. 벌레 하나 밟지 않으려 조심하던 승려들은 무리 지어 산을 내려와 무기를 집어 들었다. 


사실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패배한 군주는 할복하고 모든 백성들은 침략자에게 즉시 항복하는 일이 통상이었다. 약 20일 만에 한양을 정복하면서 전쟁이 끝나리라 생각했던 왜군들에게 조선 왕의 도주와 의병들의 출몰 적지 않은 당황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의병들의 활약은 훗날 전세를 역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성리학 기반의 신분제가 강했던 조선 사회에서 의병장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예컨, 경상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김덕령은 죄를 뒤집어쓰고 무나도 젊은 나이에 고문으로 사망했고, 의령의 부호였던 곽재우는 사비를 털어 의병을 조직하고 무수한 전공을 세웠지만 유배를 당하고 말년에 무일푼으로 죽었다. 수많은 의병장들이 무명(無名)의 용사로 싸우다가 왜적의 칼에 죽거나, 살아남은 자들은 쓸쓸하게 죽었다.


3) 역사의 역설


자신과 다르게 탁월한 지휘 능력을 가지고 있던 이순신에게 오랫동안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원균은 무리하게 왜군과 맞서다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의 거의 모든 전선과 정예 수군들을 수장시키기에 이르렀다. '거의'라고 붙인 이유는 배설 장군이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전투 전에 도망을 쳐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군이 사실상 궤멸되고 제해권을 잃은 까닭에, 선조는 백의종군을 하고 있는 이순신에게 권율과 합세하여 육지에서 싸우라 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바다에서 적을 가로막아야 비로소 조선 강토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기 의 명령에 반대하는 장계를 올렸다. '今臣戰船尙有十二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금신전선상유십이미신불사즉불감모아)'이라는 명언의 유래이다. '12척의 배가 아직(尙) 남아있으며, 신은 죽지 않았기에(不死),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不敢侮我)'라는 문장은 정말 강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됐든 제 아무리 이순신이라고 해도 전투선이 한 척도 남아있지 않았다면 선조의 에 반박할 수 없었을 테지만, 적이 두려워 도망친 배설이 남긴 배들이 있었기에 명량해전에서 신비 가까운 전술을 통해 왜선 2백여 척을 격파할 수 있었다. 사실 배설은 명량해전에서도 겁을 집어 먹고 탈영을 하였고 훗날 한양으로 압송되어 목이 베어졌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때론 참 우습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칼과 포탄을 주고받으며 왜적과 조선군들은 뒤엉켜 싸웠고, 수없이 많은 이들이 바다에 빠져 시체조차 수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강토를 짓밟은 왜적을 동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국의 바다에 수장된 왜군의 비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바다 아래 그들비로소 해 했기를 바라본다.


사실 역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에 대해 적개심을 가져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으리 생각한다. 아마도 강제 징용되어 전쟁에 끌려왔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눈 앞의 상대를 반드시 죽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한 강제적 운명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신산하다. 한편 명분 없는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조선에 투항해 용맹하게 싸운 항왜 장군 김충선(본명 '사야가')은 정말 특기할만한 인물이다. 그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 '악의 평범성'에 정면으로 맞선 몇 안 되는 인물이라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그의 후손들이 일본의 순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야기 가슴 저리게 한다.


5) 현세에서의 안도


로마가 하루 만에 만들어지지 않듯 우리의 금수강산은 수 천년에 거쳐 많은 이들의 피로지켜져 왔음을 안다. 전라도 남원성이 왜군의 침략으로 무너지던 날, 성 안에 있던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 몰살 되었다'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단 하루 밤에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이 동시에 끝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슬펐고, 또 믿기지 않았다. 중과부적을 딛고 필사로 지켜온  무너지던 , 8월의 보름달이 새벽까지 유난히 밝았다는 기록은 비통함을 더한다.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적의 총탄에 맞거나 처자식이 도륙당할 일이 극히 드문 현세에 태어났음에 묘한 안도를 느꼈다. 그리고 이 평화 결코 공짜가 아님을  기억자 한다.


생경한 왜군의 조총에 맞서 활을 쏘며 대항하던 우리는 여전히 궁을 이용한 스포츠에서 최고의 입지를 가지고 있고, 판옥선과 거북선이 활약하던 이곳 옥포에선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가 우뚝 서있었다. 이 광경에 나는 숙연했고 또 안도다.


* 통영 충무공 공원의 이순신 장군의 흉상(좌)과 그곳에서 바라본 옥포조선소(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