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트레바리 대표 윤수영님의 플레이리스트
‘허비 행콕이 마일스 데이비스에게서 배운 것’. 재즈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다. 전설의 재즈 뮤지션 허비 행콕이, 전설 중의 전설로 불리는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협연을 회상하는 영상이다. 사연은 이렇다.
즉흥연주로 한창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무렵,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이 누가 들어도 틀린 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코드였다. 그런데 마일스 데이비스가 틀린 코드를 이어받아 그에 맞는 음악으로 매끄럽게 이어갔다. 훗날 허비 행콕은 아찔했던 당시를 되새기며, 그날 힘을 발휘한 건 대선배의 노련한 실력이 아니라 유연한 태도였음을 깨닫는다. 틀린 것을 실수라 여기지 않고, 현실의 한 부분임을 받아들이며, 멘털에 타격 없이 헤쳐나간 것.
독서모임 스타트업 트레바리의 대표 윤수영님은 이 영상을 추천하며 ‘리셋증후군’을 이야기한다. 리셋증후군은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리셋 버튼을 누르듯 현실도 초기화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증상이다. 허비 행콕은 틀린 코드를 치는 순간 리셋하고 싶었겠지만, 리셋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돌발 상황은 언제든 또 발생할 수 있기에 무한히 괴롭고, 리셋은 또 다른 리셋을 부른다. 리셋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수영님도 사업하는 7년간 리셋증후군에 무수히 시달렸을 거다. 팀을 새로 꾸리면, 서비스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면, 신사업을 벌이면 술술 잘 풀릴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리셋하지 않았다. 촘촘하게 이어진 위기와 변화 가운데 비전, 아이템, 시장 등 큰 틀은 초창기 그대로다. 심지어 코시국에도 오프라인을 놓지 않는다. 용케 리셋 없이 버틴 힘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수영님에게는 늘 큰 그림이 있었다. 7년 전 수영님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귀에 인이 박이게 들어온 말이 있다.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들을 더 친하게.’ 읽고, 쓰고, 대화하면서 덜 편협해지고 일상이 풍요로워지는 세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설파했다. 그 세상의 크기란 게 탈한국 수준이었다. 그런 세상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허비 행콕의 실수쯤은 현실 안에 희석할 수 있다. 그 큰 그림이 수영님에겐 현실이니까.
큰 그림이 내 리셋증후군에도 특효일까. 사실 내겐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징크스가 있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그 건물 전체가 삽시간에 못 쓰게 돼버린다. 유리창이 깨졌을 뿐인데 사람들이 낙서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며, 노상 방뇨를 한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고 곧이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된다. 보통 슬럼화되는 지역을 설명할 때 쓰는 개념인데, 어찌 된 일인지 내 자존감도 이 법칙을 따라 황폐해지곤 한다. 일이든 관계든, 한번 크게 수틀리면 속수무책으로 지속력과 추진력을 잃는 것이다.
물론 오랜 징크스가 영상 하나, 반례 하나로 쉽게 사라지진 않을 테다. 하지만 생각 하나를 고쳐먹기로 했다. 내 건물은 엄-청 크다고. 유리창 좀 깨져도 대세에 지장 없고, 구멍 난 모양새마저 빈티지한 멋을 살려주리라고 말이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수영님처럼 배포 크게 생각해보련다. 파일 하나 안 열린다고 초기화할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