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월 Mar 12. 2022

리셋은 참아주세요

독서모임 트레바리 대표 윤수영님의 플레이리스트

재즈 에비뉴 유튜브


허비 행콕이 마일스 데이비스에게서 배운 것’. 재즈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다. 전설의 재즈 뮤지션 허비 행콕이, 전설 중의 전설로 불리는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협연을 회상하는 영상이다. 사연은 이렇다.    


즉흥연주로 한창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무렵,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이 누가 들어도 틀린 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코드였다. 그런데 마일스 데이비스가 틀린 코드를 이어받아 그에 맞는 음악으로 매끄럽게 이어갔다. 훗날 허비 행콕은 아찔했던 당시를 되새기며, 그날 힘을 발휘한 건 대선배의 노련한 실력이 아니라 유연한 태도였음을 깨닫는다. 틀린 것을 실수라 여기지 않고, 현실의 한 부분임을 받아들이며, 멘털에 타격 없이 헤쳐나간 것.    


독서모임 스타트업 트레바리의 대표 윤수영님은 이 영상을 추천하며 ‘리셋증후군’을 이야기한다. 리셋증후군은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리셋 버튼을 누르듯 현실도 초기화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증상이다. 허비 행콕은 틀린 코드를 치는 순간 리셋하고 싶었겠지만, 리셋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돌발 상황은 언제든 또 발생할 수 있기에 무한히 괴롭고, 리셋은 또 다른 리셋을 부른다. 리셋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수영님도 사업하는 7년간 리셋증후군에 무수히 시달렸을 거다. 팀을 새로 꾸리면, 서비스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면, 신사업을 벌이면 술술 잘 풀릴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리셋하지 않았다. 촘촘하게 이어진 위기와 변화 가운데 비전, 아이템, 시장 등 큰 틀은 초창기 그대로다. 심지어 코시국에도 오프라인을 놓지 않는다. 용케 리셋 없이 버틴 힘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수영님에게는 늘 큰 그림이 있었다. 7년 전 수영님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귀에 인이 박이게 들어온 말이 있다.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들을 더 친하게.’ 읽고, 쓰고, 대화하면서 덜 편협해지고 일상이 풍요로워지는 세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설파했다. 그 세상의 크기란 게 탈한국 수준이었다. 그런 세상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허비 행콕의 실수쯤은 현실 안에 희석할 수 있다. 그 큰 그림이 수영님에겐 현실이니까.    


큰 그림이 내 리셋증후군에도 특효일까. 사실 내겐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징크스가 있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그 건물 전체가 삽시간에 못 쓰게 돼버린다. 유리창이 깨졌을 뿐인데 사람들이 낙서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며, 노상 방뇨를 한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고 곧이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된다. 보통 슬럼화되는 지역을 설명할 때 쓰는 개념인데, 어찌 된 일인지 내 자존감도 이 법칙을 따라 황폐해지곤 한다. 일이든 관계든, 한번 크게 수틀리면 속수무책으로 지속력과 추진력을 잃는 것이다.    


물론 오랜 징크스가 영상 하나, 반례 하나로 쉽게 사라지진 않을 테다. 하지만 생각 하나를 고쳐먹기로 했다. 내 건물은 엄-청 크다고. 유리창 좀 깨져도 대세에 지장 없고, 구멍 난 모양새마저 빈티지한 멋을 살려주리라고 말이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수영님처럼 배포 크게 생각해보련다. 파일 하나 안 열린다고 초기화할 건 아니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