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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Nov 22. 2021

너는 세게 쥐면 놓치는 모래 같아

모래시계

J는 해외여행이 가능해지자마자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 그가 연락에 최선을 다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샌프란과 보스턴을 넘나드는 시차에 답답함이 쌓여갔고, 며칠째 삭이던 분노가 한계점까지 치밀어 올랐을 무렵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전화할 시간을 내라고.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한 감이 먼 통화에서 그는 위기감 없이 그곳의 풍경을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둥의 말을 했고, 나는 그 온도차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이번 연애는 어른답게 해보자 싶어 차근차근, 그가 놓치고 있는 내 작은 위기를 전달해주었다.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멀었네.


정말 놀란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만 마음이 약해져 불만을 더 표하려다 말을 아꼈다. 더디게 진전된 대화는 다행히 해결점에 도달했지만, J는 안심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는 나를 알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너는 세게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 같아.
또 곱게 쥐어보려고 벙어리장갑을 끼면 더 이상 너를 느낄 수가 없게 되고.


말의 맛을 잘 살리는 그답게 비유가 찰져 마침내 웃었지만 - 내가 나의 문맥 속에서 홀로 쓸쓸해하는 동안 그도 자주 막막하지는 않았을까. 제가 정성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함빡 안겨줘도 스르륵품에서 몸을 빼고서, 무얼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가만히 기다리는 나를 보며 아득하지는 않았을까.


연애를 그저 외롭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애인이 생기면 뭔가 더 마음이 따땃할 것만 같은 기대감이 차오른다. 하지만 빛이 물체에 부딪히면 필연적으로 그림자가 지는 것처럼, 연애 극초반의 의무감 없는 달달함이 지나고 나면 인간과 인간 사이 반드시 존재하는 간극을 타고 관계 고유의 외로움이 세어 나온다.

누구 하나가 큰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인간들이어서. 

우리는 절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받을 수 없어서 외로워진다.


그래서 그제 나는 울었고, 오늘 그의 손에 모래가 버석이게 했다.

우린 다른 시차에서 비슷한 모양으로 밤새 뒤척일 것이다.




다정하고 확실한 J는 자주 미래에 대해 말한다. 장난스레 뱅 앤 올룹슨 스피커와 운중동 타운하우스, 좀 더 무게를 담아서는 함께하는 동남아와 보스턴 여행에 대해.

그의 상상은 빈틈없이 우리를 향하고 있고 꽤나 구체적이다. 나 또한 타고난 망상종자로서 그 생각의 속도를 좇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떠올려본 적이 있다. 비행기에서 그에게 기대어 책을 읽다가, 값싼 기내 와인을 맛있다고 마시다가, 기절하듯 잠드는 것. 휴양지의 낮,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나 이미 아-까 일어났을 J를 불러 함께 브런치 메뉴를 고민하는 것. 온통 단풍으로 물든 미국의 대학도시를 걸으며 쓸데없이 MBA를 고민하는 것 등.


하지만 나는 경험적으로 이 상상들의 유약함을 알고 있다. 

좋은 날들에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신남을 배가시켜주지만 나쁜 날들에 그가 말하는 미래는 나를 침묵하게 한다. 현재가 불안정하면 망상은 쉽사리 도피가 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내 꿈의 불씨가 너무 커 현재의 섬세한 결들을 송두리째 불태워버렸던, 조금 더 어린 날들의 화상 자국들은 내 시야의 범위를 좁아지게 했다. 

더 이상 '나중에'를 읊조리며 지난한 지금을 흘려보내지 못한다. 


썼다 하면 판타지 소설이고 훗날 비엔나에서 살 집의 서재 도면까지 그려두곤 했던 내가 더 이상 먼 꿈을 꾸는 몽상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나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하지만, 동시에 마침내 현실성이라는 것을 획득한 것 같아 묘하게 뿌듯하기도 하다. 


오래도록 뒤처져있던 현실 세계의 시차가 성큼 좇아온 요즘 

나는 오늘의 날씨와 눈앞의 그를 명징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쁨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중이다. 

동시에 '지금 당장'의 만족감을 위해 관계 속에서 참을성 없이 욕심을 내기도 한다.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나중에 나랑 가자' 보다 '잘 잤어? 몸은 어때'인 날이 있다.

'다음에 이거 하자' 보다 '한 시간 뒤에 시간 나는데 잠깐이라도 목소리 듣자'인 날이.

먼 미래의 우리가 아닌, 지금의 나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목소리가 듣고 싶고, 

오늘 그의 감정과 애정을 담은 카톡이 보고 싶은 날이 있다.

먼 미래를 믿기에는 오늘 하루 내 마음도 잘 모르겠는, 그런 희미한 날의 깊은 바람.


그런 날들의 나는 끊임없이 흐르는 거대한 모래시계 같다.


어느 한 시점의 알갱이를 짚어내기엔 너무 사사롭고 다채로운 흐름의 집합체.

그럴 때 내게 가장 와닿는 것은 의외로, 섬세하게 내 일상의 맥을 짚어주는 말들이다.


잘 잤어? 
오늘 날씨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어.
보고 싶다.


하는 소담한 언어들에 묻어 나오는 지금, 나를 향하는, 진심들.

너는 뭐 하고 있어? 기분은 좀 어때 - 하는 현재 시제의 상상력을 상대방이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온기가 나를 다시 한번 더 안심시킨다. 


내가 제대로 마주하려 애쓰는 현실이 참 예쁜 것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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