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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견과상념 Jun 15. 2024

5월의 캘리포니아에서 폭설에 갇혀본 적이 있나요

뜻밖의 폭설, 뜻밖의 타호 호수, 그리고 뜻밖의 스키장

5월에는 2주 간격으로 섭씨 40도 차이의 날씨를 넘나들었다.


 5월 5일에는 폭설로 무릎만큼 쌓인 눈을 헤치고 등산을 하느라 푹 젖은 등산화를 난로 앞에서 말리며 추위에 떨었고, 5월 19일에는 후텁지근한 더위에 자꾸만 달라붙는 청바지를 거추장스러워하며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5월에 방문한 두 곳 모두 출장 전후로 방문한 출장지의 근교였는데 샌 브루노 출장 전에 방문한 캘리포니아의 타호 호수에선 영하 5도의 날씨를, 텍사스 오스틴 출장 전에 방문한 샌 앤토니오에선 영상 35도의 날씨를 겪었다. 그중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타호 호수 여행기로 5월 결산을 갈음해 본다.




 Lake Tahoe (타호 호수)는 미서부의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에 걸쳐있는 미국에서 가장 큰 산정호수로, 호수 자체의 규모만 서울 면적의 80%에 달한다. 면적도 면적이지만 설악산과 지리산의 중간쯤 되는 해발고도 1,800m 이상에 위치해 있어 흔히 캘리포니아 하면 떠오르는 LA, 샌프란시스코 등의 서부 해안가 도시의 날씨와는 전혀 다른 기후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명색이 5월이라 가볍게 맨투맨에 바람막이 정도 걸치고 호수에서 2박 정도 머물며 여유롭게 카누도 타고 하이킹을 할 요량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차를 렌트해 타호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보통 샌프란시스코에서 세 시간 반 정도 동쪽으로 가면 도착하는 거리라 열심히 고속도로에서 액셀을 밟고 있었는데, 한 시간 반 정도 지점을 지나자 이상하게 아무리 달려도 남은 시간이 줄지 않았고 어느 시점부터는 오히려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급히 구글맵을 살펴보는데 극심한 혼잡을 나타내는 빨간색이 우리가 가야 하는 도로 위에 드리웠다. 그리고 정체의 원인은 다름 아닌 Snow storm, 즉 폭설이었다. 타호가 스키로 유명한 지역인 건 알았지만 5월에 폭설주의보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지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속도로 근처 한 호텔에 차를 댔다.


폭설주의보로 인해 전혀 남은 시간이 줄지 않았던 구글맵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서 상황을 묻자 절망적인 대답이 들어왔다. 타호가 워낙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길이 상당히 경사가 급하고 커브가 많아 폭설주의보가 내리면 도로가 통제되고, 스노 체인이 있거나 사륜구동 차량이 아닌 이상 도로 통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폭설로 인한 교통 통제는 나름 계획형이라 자부했던 우리의 플랜 B, C에도 없는 시나리오라 혹시 시간이 좀 지나면 눈이 멈추지 않을까, 구글맵에서 자꾸 야금야금 멀어져 가는 예상 도착 시간도 다시 줄어들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보았지만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있던 한 시간 여동안 상황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오늘밤 타호로 향하는 길을 허하지 않겠노라는 자연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예약해 둔 타호 근처의 숙박을 포기한 후 겨우겨우 근처 호텔을 잡아 (그나마도 우리처럼 발이 묶인 사람이 많았는지 여기저기 전화를 몇 통이나 돌린 후에 겨우 빈 방을 찾을 수 있었다) 하룻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도로 상황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도 도로 통제는 풀린 듯했지만 뜻밖에 이중으로 지불하게 된 숙소비와 지체된 시간에 속이 쓰렸다. 조금이나마 빨리 도착하기 위해 열심히 속도를 내는데 눈앞에 눈이 부실 정도의 순백의 눈을 잔뜩 얹고 있는 침엽수림이 나타났다. 



 불과 24시간 전에는 수증기였던 것들이 찬 공기와 만나 알알이 뭉쳐 땅으로 떨어지고 쌓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간단한 과정을 거치자 모두의 눈과 입은 바쁘게, 발은 느리게 하는 풍경을 자아냈다. 서둘러 페달을 밟던 발에선 자연스레 힘이 빠졌고 조수석에 앉은 친구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손이 바빠졌다. 그리고 점점 가팔라지고 사방으로 구부러지는 도로를 지나며 무슨 짓을 해도 어젯밤에 눈으로 덮인 이 도로는 통과하지 못했을 거라 이야기하며 푸스스 웃었다.


 마침내 타호에 도착한 후엔 예정대로 하이킹을 하기 위해 등산로를 찾았다. 당연하게도 눈이 잔뜩 쌓여있어 발이 푹푹 빠졌지만 앞서 간 누군가가 남긴 발자국에 걸음을 맞추며 산을 올랐고 이내 눈앞에 펼쳐진 사방이 눈으로 덮인 타호 호수가 펼쳐졌다. 시리도록 청명했던 하늘과, 못지않게 푸른 호수는 잠시나마 추위마저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 시간 반 정도 눈밭을 헤치고 나가다가 오를수록 두텁게 쌓여있는 눈 때문에 결국 안전을 위해 중간 지점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눈꽃 산행에는 전혀 준비가 안되어있던 터라 바람에 손이 곱고 등산화는 푹 젖어버렸지만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이 거대한 이불보처럼 덮여있던 산등성이와 설산 너머의 호수는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눈의 결정체처럼, 잊을 수 없는 고유한 추억을 남겨주었다.


발이 푹푹 빠졌던 등산로와 산 위에서 보였던 아름다운 레이크 타호

 하산 후엔 잠시 몸을 녹이며 타호에서 머무를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도로 통제로 예약해 두었던 숙소를 취소한 탓에 새로운 숙소가 필요했는데 친구와 열심히 검색을 하던 중 예상치 못한 선택지가 떠올랐다. 바로 스키장 리조트.


 타호가 워낙 고산지대에 기온이 낮고 스키로 유명한 지역이라 한들, 계절이 계절인지라 5월에 운영하는 스키장이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타호 근처의 스키장을 알아보았는데 놀랍게도 메모리얼 데이 휴일, 즉 5월 말까지 운영하는 팰리사이드 타호 (Palisades Tahoe)라는 스키장이 한 군데 있었다. 역시 계절이 계절인지라 리조트의 숙소에도 빈 방이 많았고, 여전히 5월과 스키를 연결 짓는 것이 영 어색하게 느껴졌던 우리는 우선 숙소는 리조트에 잡되, 스키를 타는 것이 가능할지는 직접 가서 파악해 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날, 여전히 기대감과 의심이 뒤섞인 마음으로 장비 렌털샵에 가서 스키 가능 여부를 물어봤고, 인상 좋은 사장님이 눈썹을 찡긋하며 대답해 주었다.


“Oh, it’s gonna be a beautiful day for skiing”


 당연히 스키는 예상 액티비티 목록에 없었던지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장비를 다 빌리고 스키장에 발을 들이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 보였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마침내 첫 발을 디딘 슬로프는 폭설 덕에 기대 이상으로 상태가 좋았고, 타호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슬로포의 뷰는 단연 유일무이에 가까웠다. 지난 1월 미국 북동쪽의 버몬트 주에서 방문했던 스키장은 Icy east coast라는 별명에 걸맞게 다소 설질이 딱딱했는데, 5월의 캘리포니아에서 오히려 푹신한 눈 위의 스키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네 시간 반 동안 열심히 곤돌라와 리프트를 오가며 스키장을 누볐고, 렌털샵 사장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맞닿아 있는 팰리사이드 산자락을 온몸으로 느끼고 왔다.


청명하기 그지없었던 하늘과 비현실적이었던 설산 너머의 타호 호수 뷰


 다시 한번 자연과 인생 앞에 겸손해졌다. 갑작스러웠던 폭설은 하루치의 시간을 앗아갔지만 5월의 눈꽃 산행과 스키를 선물해 주었다. 조바심과 짜증이 경탄과 즐거움으로 바뀌었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이 정도로 대처할 수 있었음에 이내 감사해졌다. 결론적으로는 도로에서 발이 묶여 이용하지 못했던 기존의 숙소도 카드사를 통해 환불받아 아름답게 (?) 여행을 마무리했다. 무엇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특별했던, 폭설과 함께한 5월의 캘리포니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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