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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연재 Jun 24. 2024

삶은 종종 뒤통수를 때린다

<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16화

종수가 12월 31일 행사에 가 있는 동안 소연은 혼자 중문 관광단지를 돌아다녔다. 몇 년만의 제주도인지. 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제주도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연말 분위기까지 더하니 꽤 낭만적이었다. 카페들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았고, 예쁜 풍경을 담느라 사진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 베이커리 앞에는 케이크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중문 단지의 거리 풍경과 환상적인 조명, 그리고 사진 찍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 어쩐지 모든 게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느껴졌다.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행복이 깨지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조금 추워서 종수가 오기 전 가고 싶었던 카페에 들어왔다. 귤피차를 파는 카페, 규래차. 귤껍질을 정성스럽게 말려서 차를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온라인으로 구입해 마셔본 적이 있는데, 맛이 너무 좋아서 제주도에 가면 꼭 이 카페에 오고 싶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답게 손님이 많았다. 다행히 2인석이 남아서 혼자 그곳에 가서 앉아 차를 주문했다. 물 위에 귤피 티백을 넣자 진한 주홍색이 물에 피처럼 번졌다. 그 색과 퍼지는 모양이 너무 예뻐서 감탄하고 있을 때, 귤피의 향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추위에 언 몸과 가득했던 긴장을 다 녹이는 상큼 달콤한 향이었다. 소연이 규래차를 천천히 마시며 책을 보는 동안, 종수가 카페에 들어섰다. 많이 기다리지 않았냐는 말에 소연은 아니라고 말하며 속으로 이런 기다림은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호텔에 들어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이럴 때 문이 닫히자마자 뜨거운 눈빛을 나누다가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서로를 물고 빠는 장면이 연출되지만, 종수와 소연은 들어가자마자 호텔 방의 뷰에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 여기 완전 외국 같아요. 너무 예쁘다.”

바닷가를 앞에 두고 호텔 정원에 조성한 조명 아트들이 너무 예뻐서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소연이 바깥 풍경을 보는 동안, 종수는 술을 준비했다.

“소연 씨. 샴페인 좋아해요?”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소주나 막걸리보다는 이 분위기에 맞다고 생각했다. 소맥을 좋아하긴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샴페인이 훨씬 나으니까.

“술을 잘하진 못하지만 좋은 일 있을 땐 마셔요.”

종수가 사 온 샴페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돔 페리뇽. 최고급 샴페인이었다. 언젠가 친한 동생들이 “소연 언니 남자 생기면 돔 페리뇽 마시자”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돔 페리뇽이 뭔가 해서 찾아봤다가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샴페인을 여기서 만나다니. 참 인생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두 사람은 창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자신한테 남자가 생기면 후배들이 돔 페리뇽을 마시자고 했다는 이야기를 종수에게 하자 종수가 웃으면서 “운명인가 봐요”라고 했다. 알코올이 들어가자 소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술만 마시면 얼굴이 빨개져서 웬만하면 술을 안 마시거나 친한 사람들하고만 마셨는데 지금 상황에서 안 마시는 것도 웃기고, 돔 페리뇽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달아오르는 얼굴은 당황스러웠다. 소연이 자꾸 얼굴을 만지고, 컵을 얼굴에 대자 종수가 열이 오르냐고 물었다.

“제가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어서 그런지 술만 마시면 온몸이 빨개져요.”

소연이 손으로 얼굴을 식히려는데, 갑자기 종수의 손이 소연의 뺨에 닿았다.

손으로 소연의 뺨을 대고는 “괜찮아요.”했다. 그 순간, 소연은 올 것이 왔구나 했다.

‘드디어 그 타이밍인가.’

좀 무안해서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상황에 자신을 맡겨보자고 생각하던 찰나, 종수의 얼굴이 다가왔다. 소연도 눈을 감았다.     


몇 시쯤 되었을까. 아직 바깥은 캄캄했고, 소연은 잠에서 깼다. 옆을 보니 종수는 자고 있었다. 깨지 않게 살금살금 일어나서 창가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종수를 쳐다보았다.

염려했던 그와의 밤은 염려가 무색할 만큼 좋았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소연에게 중요한 것은 ‘매너’였다. 종수 역시 긴장한 것이 티가 났는데, 그럼에도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는 것에 급급해하지 않고, 부드럽게 배려하며 소연을 맞춰주었다. 그의 배려 덕분에 오랫동안 휴지기를 가졌던 소연의 몸이 깨어났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할 수 있지?’

소연은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 행복을 시기해서 깨트릴 것만 같은 불안이 올라왔다. 가방에 있던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다. 깜깜하던 바깥에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깥으로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론가 떼를 지어 날고 있는 새들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동이 터오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들. 그때 소연의 어깨에 가만히 카디건이 올려졌다. 종수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떤 얼굴로 봐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했는데, 자연스럽게 이어폰을 빼고 일어났냐는 안부 인사가 나왔다.

“참 아름답네요. 좋은 건 같이 봐야죠.”

종수가 소연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충만한 느낌이었다.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로 종수와 소연은 부쩍 가까워졌다. 종수는 자신의 집 키 번호를 소연에게 알려주었다. 데이트를 종수의 집에서 하는 경우도 많아졌고, 종수가 집에 없더라도 소연이 가서 쉬다 오는 날도 점점 늘었다. 종수는 동거를 원했지만, 소연은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같이 사는 걸 선호하는 종수와 어떻게 의견을 맞춰가야 할지가 소연에게는 숙제였지만 자신의 스타일과 가치관만을 고수하는 게 맞는 건지 계속 고민이 되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는 그러다 종수가 떠날까 봐 두려웠다.

종수와 저녁을 먹기로 한 날. 소연은 장을 봐와서 종수의 집으로 퇴근했다. 종수가 좋아하는 김치찜을 해보겠다고 등갈비를 사 왔다. 생전 등갈비김치찜은 해 본 적이 없지만, 레시피를 보니 생각보다 어려워 보이진 않아서 도전해 보기로 했다. 식탁에 장 봐온 것을 내려놓고 소연은 나선에게 전화를 했다. 등갈비찜을 할 예정이라고 하니 나선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래. 지금은 밥 먹다 돌이 나와도 이뻐 보일 때니까. 열심히 해봐.”

소연은 나선에게 종수가 동거를 원하고 있고, 자신은 망설여진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자기가 거절하면 자신한테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이 깨지거나 날아갈까 봐 두려운 마음도.

“산 넘어 산이네. 남자 만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더니만.”

나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열 가지 중에 서너 개만 맞아도 된다는 말이 있잖아. 열에 아홉이나 열 다 맞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걸? 그리고 너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니? 어디 있을지 모르지만 찾다가 호호 할머니되겠다.”

나선의 말에 소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종수랑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시간을 보니 7시. 종수가 올 시간이었다. 종수는 자신의 집에 들어올 때도 초인종을 눌렀다. 소연이 집에 있을 경우, 준비할 시간을 주는 거였다. 소연이 화장실에 있거나 옷매무새를 살펴야 할 때, 준비할 수 있는 시간. 종수는 그런 배려를 하는 사람이었다. 소연은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현관으로 가며 “누구세요?”하고 장단을 맞추었다. 문을 열었더니, 한 여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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