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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연재 Jul 01. 2024

유예된 진실은 언젠간 드러난다

<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17화

소연이 새로 이사 간 곳은 지은 지 10년 된 아파트였다. 그래서 아파트 내부 조경이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플라타너스 길. 양쪽으로 웨딩 아치처럼 펼쳐져 있는 그 길은 지나갈 때마다 근사한 곳에 소풍 나온 것 같은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요즘은 좁은 공간에 많은 세대를 구겨 넣어야 하다 보니 닭장 같은 아파트가 대부분인 데 비해, 이곳은 조경을 잘해놔서 숨통이 트이게 해 주었다. 

춘자가 걷기 운동이나 산책을 하기에도 안전하고 적당해서, 예전에 이 아파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다음에는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소연에게 큰 만족을 주면서도 한편으론 아픔이었다. 이 아파트를 계약할 때 종수의 결정적 도움이 한몫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자동으로 종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연은 종수를 지우고 더 좋은 추억거리를 쌓기 위해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선이 생일이어서 친구들과의 약속 자리에 망설이다 나갔다가 소연이 헤어진 줄 모르고 “이번에 놓치면 환갑이나 칠순 넘어서 만날지도 모르니까 꽉 잡어”하며 놀리는 말에 소연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냐며 버럭 화를 냈다. 그냥 웃자고 한 농담에 죽자고 달려든 소연을 보며 친구들은 사랑싸움했냐면서 또 속을 긁어서 소연은 가방을 들도 나와버렸다. 

하루는 방송국에서 디제이와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래가 나가는 사이, 종수가 들려주던 음악이 나오자 다시 울컥해서 디제이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고 애를 썼지만,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소연은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특히 춘자가 걱정 한 가득인 표정이었는데,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춘자의 모습을 보니, 자신이 의도치 않게 춘자를 벌세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소연은 퇴근길에, 지하철역에 있는 꽃집에 들어갔다. 노란 금계국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쳐다봤다. 안개와 함께 금계국을 사서 집에 온 소연은 웬 꽃이냐는 춘자에게 꽃을 안기며 말했다. “엄마. 나랑 오래 같이 살자.”

이제 다시 사랑이 올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익숙했던 삶으로 다시 돌아온 것뿐이니 종수가 들어왔던 삶의 자리만 편집해서 도려내고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상을 다시 정돈하기 위해 소연은 춘자와 함께 동네 가게들을 탐방했다. 김밥집, 떡볶이가 맛있는 분식집, 가성비 있는 커피 맛집, 혼술 하기 좋은 선술집 등등…. 소연은 여러 번 가보고 먹어보며 데이터를 쌓아갔다. 

꼼꼼한 테스트 끝에 소연이 고른 원픽 카페는 해이빈. 좋은 것만 대접한다는 뜻의 카페였다. 이곳의 커피에서는 약간 탄 맛이 느껴져서 처음에는 생소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소한 풍미가 느껴졌다. 산미가 있는 커피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던 터라 입맛에 딱 맞았다. 특히 소연이 좋아하는 메뉴는 해이빈의 시그니처, 유기농 제주 볶은 녹차를 베이스로 수제 연유, 우유로 만든 밀크티와 코코넛 커피였다.

밀크티는 보통 홍차로 만드는데, 해이빈에서는 제주 유기농 어린잎을 한 번 더 볶고 갈아서 전혀 떫거나 쓴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숫가루 같은 진한 고소함이 느껴지는데 뒷맛에 따라오는 녹차 향이 정말 좋았다. 주문하면 주인인 승아가 차선으로 격불해서 내어 주는 것도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코코넛 커피는 사장이 직접 대만에 가서 배워온 레시피로 만들었다는데 얼려놓은 코코넛을 간 다음 거기에 에스프레소를 넣은 음료다. 진짜 대만에 온 것 같은 맛이었다. 무엇보다 그 가게를 단골로 삼은 이유는 맛이 가장 큰 이유이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이유는 사장인 승아의 철학과 태도 때문이었다. 

이사 오고 나서 지켜보니 승아는 1년 365일 영업을 하는 눈치였다. 주말은 물론이고 웬만하면 쉬는 1월 1일이나 설날, 추석에도 문을 연다고 했다. 실제로 소연이 이사 오고 나서 한 번도 해이빈이 문을 받은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실함을 응원하고 싶어서 소연은 해이빈의 단골이 되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냥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날에는 ‘이슬’이라는 작은 선술집에 가곤 했다. 그곳의 주인은 적당히 무심하고 적당히 친절해서 혼자 가도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자연히 단골이 되어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해서 기껏해야 하이볼 한두 잔에 어묵을 먹는 정도지만 가볍게 마음 편히 혼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건 삶의 질을 올려주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 소연은 해이빈으로 갈까 이슬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밤에 써야 할 원고도 있어서 해이빈으로 향했다. 오늘도 밀크티를 주문하고 격불하는 승아의 뒤통수를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카페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승아가 돌아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소연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정호가 서 있었다. 놀라기는 정호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서로 ‘네가 여기 왜 있니?’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동시에 “여기 웬일이세요?”라고 말을 했다.

“저 여기 산 지 오래됐어요.” 정호가 말하면서 ‘그러는 너는 여기 왜 있니?’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전 여기 이사 온 지 3개월 됐어요.” 소연이 답하자 승아는 뒤를 돌아보면서 신기하다는 듯이 서로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고 답하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어서 둘 다 핸드폰만 쳐다보는 사이, 어느덧 소연의 음료가 나왔다. 가볍게 인사하고 나오는 길에 이 동네 이렇게 카페가 많은데 하필 여기서 정호를 만난 게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저 인간을 여기서 만날 게 뭐야.’ 그렇다고 좋아하는 카페를 끊을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로 정호가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중요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걸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오늘처럼 마주친 날은 회사에서처럼 그냥 인사만 나누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청취율 조사 기간에 집중했다. 3개월에 한 번씩 2주 동안 청취율 조사를 하는데 이때가 되면 라디오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긴장모드에 돌입한다. 

소연도 예외가 아니어서 청취율 조사 기간 일주일 전부터 엔진을 장착하기 시작한다. 음악 FM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곡. 이 부분은 피디의 영역이므로 소연이 크게 관여할 필요가 없지만, 청취자 참여와 인지도를 높이는 건 소연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전화 설문으로 이루어지는 청취율 조사에서 청취자들이 당황하지 않고 답변을 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이름을 효율적으로 인지시키는 것이라든지, 다른 때보다 참여하는 청취자들에게 조금 더 후하게 선물을 보낸다든지, 답신 문구를 보내는 것 등등 알게 모르게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특히 답신 문구는 촌스럽게 “저희를 찍어주십시오”라는 말 대신 좀 더 세련되면서도 전화를 잘 받아주셔야 저희 프로그램이 오래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섞어서 보내야 한다. 날마다 다른 메시지를 작성해야 하고, 청취자와의 소통도 중요하다. 

“이번 달은 커피 쿠폰을 좀 더 많이 쓸 것 같은데 부장님한테 조금만 더 충전해 달라고 해주시면 안 돼요?”

“참여를 위해서 퀴즈 같은 것도 해보죠.”소연은 담당피디에게 이것저것 요청했다. 하루는 청취자가 청취율 조사 전화를 받았는데 너무 당황해서 제목이 생각 안 나는 바람에 답변을 못 했다는 문자를 봤던 게 생각났다.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지역 번호 02로 오는 전화를 받도록 하는 것, 둘째는 전화를 받고 프로그램명을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묘안이 필요했다. 

“우리 프로그램 이름 생각 안 나서 답변 제대로 못 했다는 분들 계세요. 우리 로고송을 좀 더 귀에 때려 박히는 거로 다시 만들면 어떨까요?” 소연이 제안하자 피디는 좋은 생각이라면서 만들어 보자고 했다. 그래서 소연은 중독성 강한 <아모르 파티>에 프로그램명을 개사해서 디제이가 직접 부르게 했다. 결과물로 나온 로고송을 들으니 웃음이 터졌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를 “가광(가요광장)은 필수, 상디(디제이 상훈의 첫 글자와 디제이를 합한 단어)는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말하면 돼. 아모르 파티~”

이렇게 일에 파묻히니 오히려 마음이 갈 곳이 있어 좋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일이라는 건 얼마나 좋은 도피처인지. 물론 도피처라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덮어두는 쪽이어서 언제고 다시 터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도피처가 썩은 동아줄이어도 잡고 싶었다. 그렇게 파묻혀 지내다 보니 거짓이어도 괜찮은 것 같았다. 그 괜찮은 것 같은 마음에 균열이 생긴 건, 문자 때문이었다. 

“정말 미안하면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미안한 사람이 있는데….”

골든벨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 짧은 문자에 소연은 그동안 지켜왔던 마음이 무너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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