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자꾸만 기가 죽는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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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백화점 데스크는 도급사다. 백화점 측에서 직접 사람을 뽑아 운영하는 것이 아닌, 외부 회사와 일정기간 계약을 맺고 그 회사가 전적으로 인력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백화점 소속이 아닌, 백화점이 계약한 A이라는 회사의 직원이고 일만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백화점에는 백화점과 계약한 아주 많은 도급사가 있고, 우리가 아는 백화점의 수많은 매장들(코스메틱, 의류, 리빙 매장 등)도 계약을 맺고 들어와 일을 하는 형태이니, 이 커다란 백화점 안에 ‘진짜 백화점 소속’ 직원은 몇 없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부 사정을 알게 된 이후, 우리 같은 직원들이 제일 선망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은 '백화점 소속 직원'이다. 양복을 갖춰 입고,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앙다문 표정으로 곳곳을 시찰하러 다니는 진짜 백화점 직원들. 총무, 인사, 그리고 각 층을 담당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백화점 소속 직원들은, 그 소속감 때문인지 옷차림 때문인지는 몰라도 항상 시니컬하고 멋지게 느껴졌다.




이런 관계가 묘하게 우열(優劣)로 느껴지는 것은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어디에서도 정규직으로 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항상 나는 '파견'이라는 꼬리를 달고 있었고, 회사가 직접 고용한 정규직들이 내뿜는 특유의 아우라를 늘 부러워했었다. 서른 하나가 된 지금도 느껴지는 이 우열관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 처지를 조금은 슬프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자격지심일까.


내가 일하는 데스크는 식품관 귀퉁이에 딸려있는 쪼그만 데스크로, 아주 많은 경우 식품팀의 지시와 관리를 받는다. 그런 내게, 내가 일하는 층인 식품관을 총괄하는 식품팀 직원들은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직함도 있었다. 주임, 대리, 과장, 차장. 서로 '언니'라는 호칭을 쓰며 아무 직급 없이 지내는 우리와는 아주 대비되는 모습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식품팀 직원들이 지나갈 때마다 확 쫄아붙곤 하는데, 아마도 이는 내면에 굳게 자리 잡은 그들과 우리의 서열 때문이리라.


우리 모두는 멋지고 싶다. 한쪽엔 회사 로고가 박힌 다이어리를 끼고, 근사한 세미 정장을 입은 채, 여기저기 일이 잘 돌아가고 있나 시찰하고,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스스로 회사의 제대로 된 부품이라고 느끼고 싶은 게 누구나의 마음이리라.


물론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처지를 비관하면 곤란할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입은 항아리 같은 유니폼이 자주 부끄럽고, 할머니 같은 쿠션신발도 꽤 자주 부끄러운 건 사실이다. (백화점이라고 유니폼이 모두 세련된 건 아니다) 이 일에 생계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맘과는 달리 자신감이 하락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일할 때 외모에 자주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유니폼도 구린데 얼굴이라도 화려하자는 주의로. 정갈한 머리와 똑 부러지게 한 화장으로라도, "아 저 여자는 좀 만만하지 않아 보여" 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을까. 아무도 모르지만 귀걸이도 꼬박꼬박 착용하는 데다, 향수까지 뿌린다. 이런 내 의지가 타인에게도 전달될 일인지는 몰라도, 그러면 어쨌든 내 기분은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세일용 양파가 너무 간절했던 나. (사진출처:핀터레스트)


그러던 어느 날, 아니 며칠 전의 일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식품관 매출이 저조해 정기세일을 하던 날이었다. 금액에 상관없이 식품관에서 물건을 산 사람들에게 무료로 양파를 나눠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주부인 나는 이를 놓칠세라, 아침 쉬는 시간을 활용해 급하게 장을 보고 양파를 받으러 뛰어갔다.


그런데 캐셔 여사님들이 나눠주는 줄로 알았던 증정 양파를, 양복을 차려입은 식품팀 직원들이 직접 나눠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날 근무시간에 양파나 얻으러 오는 한심한 직원으로 생각할까? 고객들에게 줄 양파를 채가는 나쁜 직원이라고? 아님 이까짓 양파 하나 살 돈도 없어 부리나케 달려오는 추한 여자로 보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내가 양파를 탈 차례가 되었고, 내 걱정과는 달리 식품팀 직원은 너무도 친절히 내게 양파를 건넸다. 그리고 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건넸다.



뭐지. 경외하던 회사 총수에게 칭찬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양파를 받아 들고 돌아가면서 괜한 걱정이었나 싶다. 생각해보니 나도 당당하게 장을 본 고객인데 뭐하러 쫄았을까. 그리고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양팔을 걷어붙이고 동네 아저씨처럼 웃으며 고객에게 양파를 건네고 있는 양복쟁이 직원들을 보고나니, 그들이 내가 두려워하던 것처럼 뾰족하게 각 진 사람들은 아니란 것이 느껴졌다.


저들도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직무를 수행하는, 나와 별반 다를 거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비장한 표정으로 시찰을 하러 다니지만, 오늘 같은 날엔 평생 만져볼 일도 없었을 양파망을 들고서 인사를 해야 하는.


그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집에 와서 양파를 손질하며 다시 한번 웃었다. 오늘 하루 종일, 한 트럭 양파만 나누어주다 녹초가 되었을 그분들은 잘 퇴근했으려나. 내 안의 불필요한 열등감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해당 글은 에세이 <어쩌다 백화점>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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