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나 싶었는데 역시나.
지금 일하고 있는 데스크에서는 교대근무가 이루어져 중간 중간 한 시간씩 쉬는 시간이 있다. 이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다. 온돌방 같이 생긴 직원 휴게실에 드러누워 낮잠을 잘 수도, 볼거리로 가득한 백화점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이쇼핑을 할 수도, 그도 아니면 핸드폰을 부여잡고 백화점 밖 세상은 어찌 돌아가는지 시시각각 확인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쉬는 시간으로 한 시간은 뚝딱이다.
오늘 나는 오전부터 주어진 한 시간의 쉬는 시간 동안 책을 읽기로 마음먹고 직원식당으로 올라왔다. 사실 그동안 쉬는 시간에 무얼 할지보다 더 큰 걱정은 '어디서' 시간을 보내나였는데. 직원식당은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의 식당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다, 더욱 큰 장점은 어떤 음료를 시키지 않아도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백화점의 화려한 카페에선 커피 한잔을 시킬래도 기본 4천 원으로 시작이다)
여느 때처럼 오전의 직원식당은 고요하다. 커다란 통유리 창이 난 곳의 자리를 나는 제일 좋아한다. 그곳에 앉아 문체가 소담스러운 내 스타일의 책을 읽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누구의 간섭도 없다. 이런 짤막한 여유가 각박한 매일의 삶에 참 단비처럼 느껴졌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나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백화점에 와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퇴근을 해 남편과 저녁을 지어먹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잠시 쉬다가 남편이 씻는 사이 설거지를 하고. 나도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시간이 대충 밤 열 시 언저리. 잠깐 남편과 티브이를 보거나 떠들다 보면 금세 잘 시간이 된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어쩌면 일 년이 갈 것이다.
황금같이 주어진 휴식시간에 휴식을 하지 않고 얼마간이라도 책을 읽으려는 건 그런 반복적인 일상에서 오는 일말의 허탈함 때문이었다. 이대로 하루의 시간을 다 써 버린다는 아쉬움, 철저히 노동과 생계만을 위해 하루가 소비되는 것에 대한 약간의 공포. 그 감정들은 내게 어떤 강박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때마다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라도 일으켜 조금이라도 깨어있고 싶었다.
이런 나의 모습은 사실 이곳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일 때가 참 많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많은 직원들은 근무시간 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는 거의 지쳐있기 마련이다. 가만히 여유롭게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쉬는 시간에는 모두들 넉 다운이 되어 직원 휴게실에 몸을 눕힌다. 어찌 보면 그게 이곳의 보편적이고 응당한 문화랄까. 나도 초반에는 무조건 자기 바빴다. 그러니 지친 직원들 사이에서 홀로 고상한 척 책을 펴고 앉아있는 게 때로는 민망하고 화끈거리는 일이기도 하다. 남들 눈엔 "쟨 왜 여기서 이러는 거야"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되도록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렇게라도 자투리 시간에 뭔가 내가 하고픈 것을 하고 싶으니까. 내 하루에 이렇게라도 온전한 내가 있어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이런 나의 고집이 어디로부터 기인됐나를 생각해본다. 남들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하고픈 뭔가를 꾸역꾸역 해내려는 모습. 무엇보다 나만의 감성을 중시하는 그 태도. 나의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엄마. 엄마는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생계형 아줌마로서 50여 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하나뿐인 딸자식을 키워내느라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늘 싼 옷을 찾아 사 입었고, 샴푸나 린스도 늘 마트에서 파는 대용량을 썼으며, 딸이 쓰다 남긴 화장품을 가져다 얼굴에 발랐다. 그런 엄마의 삶은 늘 고됐고 여유는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다른 아줌마들과 조금 다른 게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밤낮없이 일하며 살아가는 와중에도, 늘 종이신문을 구독해 보았고 책을 읽었으며, 당신의 입맛에 맞는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들을 어떻게든지 찾아서 보았다는 거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사다 달라고 하는가 하면, 얼마 전엔 넷플릭스를 깔아달라고 하더니 <리틀 포레스트>나 <가버나움> 같은 영화를 보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내게 <오베라는 남자>를 보라며 추천해주기도 했다.
어찌 보면 모두 엄마의 투박한 일상과는 꽤나 괴리가 있는 감성이었다. 하지만 50년을 전투적으로 살아낸 아줌마의 감성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것들도 그렇게 엄마는 늘 관심 있어 했고, 보고 들으려고 했다. 도대체 현실에 치인 엄마가 어디서 그런 영화를 매번 알아내서 보는 걸까. 왜 다른 아줌마들처럼 막장 일일연속극에 빠져 살지 않는 걸까. 그런 엄마가 유별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때때로 퍽 존경스러운 건, 그녀가 내 삶의 커다란 긍지였기 때문일까.
돌이켜보면 엄마는 평생에 걸쳐 내게 영화 얘기, 정치 얘기, 사회문제 얘기 등 여러 가지를 얘기해왔다. 그 모든 소스들은, 엄마가 생활에 치여 살면서도 뭔가를 손에 쥐고 의식적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을 열려는 의지에서 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생활에 의식이 갇히는 것을 싫어했고 꿋꿋이 엄마 당신만의 감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 의식이, 의지가, 당신의 삶 자체를 구원할 수는 없었지만 엄마의 마음만은 풍요롭게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이제는 딸인 내가 이어받아 고집하고 있는 걸 보면, 유전의 힘이란 게 참 어찌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다. 이런 미세한 부분까지도 엄마를 닮아, 이렇게 오늘날 백화점에서 서비스 노동을 하면서도 내 감성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니. 나에게 주어진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는, 조금이라도 깨어있고자 하는 이 의지는, 엄마가 내게 남긴 유산임이 틀림없다. 아무리 삶이 고되고 지치더라도 세상을 보는 눈을 닫지 말라는 것. 내 세상을 좁히지 말라는 것. 그러고 보면 엄마의 참 좋은 점만을 나는 닮았다. 가끔 욱하는 성질머리를 빼고는.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엄마가 추천한 <오베라는 남자>를 보았고,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았다. 어찌 엄마가 알려준 영화는 실패하지 않는지 그것도 참 신기하다.
해당 글은 에세이 <어쩌다 백화점>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