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듣는 로파이의 이미지
수년 전부터 음악에 미니멀리즘이 퍼지면서 뉴트로의 흐름이 거대해졌다. 기존 음악이 가진 스케일과 형식과는 다른 무언가를 가진 음악들이 다양하게 퍼져나갔고, 그중 로파이 뮤직(Lo-fi Music) 또한 뉴트로의 흐름에 있었다.
로파이 뮤직의 등장
Lo-fi라는 단어는 Low fidelity의 약자로서 저음질이라는 의미이다. Hi-fi와는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더 선명하고 생생한 음질이 아닌 흐릿하고 모호한 소리를 의미한다. 다양한 음악에서 의도적으로 열화 된 소리를 사용하는 표현은 오랫동안 쓰여왔다. 축음기와 LP의 시대가 지나가고 아날로그적인 매체에서 나오는 잡음들은 디지털 시대에 하나의 표현으로 재탄생했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를 표현하기 위해 샘플링을 저음질로 가져와 사용한다거나, 악기 소리가 희미하고 뭉개지도록 사용하는 방식으로 로파이를 표현했다. 이러한 아날로그적인 잡음의 표현은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불완전한 매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로파이를 표현하는 음악들 사이에서 로파이는 음악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했다. 로파이 자체가 장르로 불릴 만큼 아날로그적인 표현법은 음악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1990년대 그러다 2000년대 초반 재즈힙합이란 장르에서 로파이는 장르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후 시간이 흘러 뉴트로 열풍과 함께 재즈, 힙합, 칠 아웃 뮤직이 결합된 음악을 Lo-fi Music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수년 전부터 로파이 뮤직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 로파이 뮤직을 소개해주는 다양한 유튜브 채널들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스터디, 릴랙스 등의 키워드로 상황의 맞는 무드를 제공해 하나의 감성에 대응하는 장르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Chilled Cow' 채널의 < lofi hip hop radio - beats to relax/study to> 스트리밍 채널은 관리자가 고른 로파이 뮤직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한다. 이 라디오는 1억 회의 조회수를 넘겼으며 채널의 구독자 수는 300만이 넘어간다. 'Ikigai', 'AnimeVibe' 등의 채널들 또한 일본 계열의 다양한 로파이 뮤직을 업로드하며 일본 로파이 특유의 무드를 느낄 수 있다.
유튜브에 로파이 뮤직을 검색했을 때 채널들의 제목에는 공통적으로 'hip hop', 'jazz', 'chill'이라는 키워드가 나타난다. 또한 로파이 채널들의 대부분은 애니메이션 영상을 사용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사용하거나 루프 애니메이션으로 반복되는 영상으로 썸네일을 사용하고 음악 플레이 타임 내내 재생한다. 즉, 힙합, 재즈, 칠 아웃,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네 가지 요소들은 로파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힙합, 재즈, 칠 아웃 뮤직과 애니메이션은 모두 각자 문화적 영역이 다르다. 힙합과 재즈는 장르 자체로 이질적으로 구분되고 둘의 결합인 재즈힙합은 인접 장르의 결합이 아닌 특수한 결합으로 여겨졌다. 또한 칠 아웃 뮤직은 이것들과 또 다른 일렉트로니카에서 파생된 장르였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지금껏 음악 장르의 상징으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영상과 음악의 관계에서 영상이 음악적 장르를 상황에 맞게 사용하는 OST는 있어도, 음악적 장르가 영상의 무드를 구체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요소들은 어떻게 묶이게 된 것일까?
누자베스와 사무라이 참푸르
재즈 힙합과 애니메이션의 결합은 일본의 DJ인 Nujabes와 <카우보이 비밥>의 감독이었던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만든 <사무라이 참프루>(2005)에서 시작한다. 누자베스는 본인의 레코드샵을 운영하며 힙합 DJ로 활동하던 아티스트였다. 그는 클래식, 재즈, 소울, 훵크 등의 장르를 이용해 비트를 만들었으며 그의 특이한 음악적 스타일은 기존 재즈힙합과 감성의 결을 달리해 '시부야계' 재즈힙합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표작인 'Auraian Dance'는 Laurindo Almeida의 'The Lamp Is Low'를 리믹스한 것으로 클래식하고 재즈적인 감성을 활용해 재즈힙합의 무드를 만들어냈다. 원곡 - 리메이크 - 리믹스 버전을 참고해 들어보자.
그의 음악은 당시 일본 언더그라운드 씬에서도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집 발매 이후 <사무라이 참프루> OST 작업에 참여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때 누자베스는 <사무라이 참프루>의 OST로 자신의 재즈힙합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현대적 음악과 중세적 배경의 작중 분위기와 독특한 결합을 이루었다. 문화적 배경으로는 동양적인 OST가 익숙한 상황에서 시대와 문화권까지 다른 사무라이와 힙합의 결합은 새로운 감성을 만들어내기 충분했다. 이 작업에서 'Auraian Dance'와 같은 곡들을 통해 재즈힙합이라는 장르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그렇게 재즈힙합은 애니메이션의 OST로 유명해지며 애니메이션의 무드를 상징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로파이 뮤직의 형태들
로파이 뮤직은 애니메이션과 재즈힙합의 결합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장르의 범위를 만들어가며 발전했다. 음악적으로 어두운 힙합이 <사무라이 참프루>에서 쓰이던 감성이었다면 좀 더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의 로파이 뮤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Mellow Beat'라는 단어로 검색되는 로파이 뮤직들은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로파이 뮤직의 중요한 감성으로 설명된다. 또한 애니메이션의 활용 역시 <바다가 들린다>(1993), <마녀 배달부 키키>(1989), <귀를 기울이면>(1995)와 같은 작품들을 활용해 멜로우 비트와 결합해 로파이 뮤직의 장르를 넓혀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애니메이션 소스를 두고 다양한 음악에서 비공식 팬 뮤비가 만들어져 애니메이션이 음악적 장르에 대응하는 하나의 감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로파이 뮤직이 일본에서 시작된 시부야계 재즈힙합의 영향력이 강했다면, 그 장르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서구권으로의 유입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톰과 제리, 핑크 팬더와 같은 미국의 카툰을 활용한 로파이 뮤직들이 등장하고 있다. 애니메이션과 재즈힙합이라는 결합이 하나의 문화적 코드가 되어 다양한 변용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기존 애니메이션들의 음악을 로파이로 재해석한 작품도 등장했다는 것이다. 보통 로파이 뮤직의 감성을 꾸미기 위해 대중적인 애니메이션인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을 쓰는 일이 많았는데, 역으로 지브리의 음악을 다시 로파이로 바꿔버린 것이다. 동양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던 지브리의 OST들이 재해석된 지브리 로파이는 기존 재즈힙합에 감성과 큰 이질감 없이 표현되어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나루토의 음악 역시 나루토의 따뜻한 이미지와 OST를 골라내어 로파이 뮤직으로 만든 리믹스도 생겨났다.
가끔은 공부할 때, 이어폰을 꼽고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들을 때 로파이 뮤직을 듣는다. 부드럽고 느긋한 비트들은 불완전하고 어딘가 부족하게 들리지만 그 아날로그적인 매력 때문에 계속 찾게 된다. 로파이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포근한 감성을 새롭게 채워준다.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과거로의 향수이기도 하며 과거로부터 오는 감성이기도 하다. 아직은 생소한 장르지만 하나의 음악적 문법으로 자리 잡아 많은 사람들의 취향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