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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영신 Apr 02. 2021

머무는 여행, 도착하는 삶

공정여행가 엄마와 비건 딸이 함께 하는 삶의 여행 0



코로나가 일 년을 넘어서며 줌은 '연결'보다는 '갇힘'과 '단절'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줌으로 수업을 듣고 매일 쪽글과 과제에 쫓기는 딸의 대학생활에 삶은 희미하게 윤곽만 남기고 배움의 기쁨이나 일상의 즐거움은 모두 휘발되기 시작했다. 일상의 흐름이 깨어지고 무너지는 것은 대학생, 시원만의 일은 아니었다. 예정된 강연과 일정들은 번번이 취소되거나 미루어지기 일쑤여서 지난  부터는 일정을 기록하고 쉽게 지워지는 프릭션 펜이 아니면 노트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게 되었다. 쉽게 지워져야 하고 변경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정하는 일의 전제 조건이라니..  아무도 예측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안개 같은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삶은 눅신해지고 무너지기 쉬운 물성으로 변해갔다.


코로나로 인한 멈춤의 시간..그토록 원했던 텅 빈 시간이었으나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하지 않은 채 주어지는 시간은 너무 큰 신발처럼 불편했다.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에서의 시간처럼 아무것도 계획할 수도, 이 기다림이 언제 끝날 지 예측할 수도 없는 시간은 더디고 괴로운 것. 마음의 불편은 늘 몸으로 발화하는 지라 시원의 몸은 위통에서 두통까지 딱히 병명을 붙일 수 없는 괴롭고 고단한 통증들의 집합처가 되어가고 있었다. 줌 덕분에 수업도 회의도, 강의도 가능했지만 삶은 점점 불가능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다면

어디든 머물 수 있지 않을까?


막내가 기숙형 대안학교인 풀무학교에 입학하던 지난 3월, 홍동의 풀무학교에 짐을 내려주고 한 달 후에나 집에 올 수 있다는 막내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문득  풀무에 와서 아이들이 기숙사에 머물듯 우리 역시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얼마든지 머물 수 있는 여행자가 아닐까? 다른 질문이 시작되며 새로운 길을 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묶여있는 이 멈춤의 시간은 자유로이 국경을 넘는 일을 꿈꾼다면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감금의 시간이지만  국경 안에 펼쳐진 이 땅의 어디서든 줌과 인터넷에 연결될 수 있다면 언제든 떠나고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의 시간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기차 플랫폼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열차를 기다리는 대신 거리로 나아가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다시 멈추어 버린 삶에 여행이 깃들기 시작했다.


공정여행가 엄마와 비건 딸의

단순하고 까다로운 여행 계획


한 달에 일주일쯤, 머물 수 있는 곳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막 한국에 도착해 머무는 여행을 시작하기로 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지도를 펼쳐두고 기차로, 버스로  어디든 반나절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여행지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조건은  두 가지, 머무는 동안 거닐 수 있는 숲과 마을이 있는 곳이어야 했고, 자연과 가깝지만 두고 온 일과 삶에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워케이션 패키지를 출시했다는 요란한 도시의 호텔들은 마을과 숲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 의미가 없었고, 너무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들은 안전하지도 책임 있는 여행지도 아닐 터이니 논외였다. 몇 번쯤 가 본 적 있으나 오래 머물러 본 적이 없는 익숙한 도시와 마을들도 새로운 여행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겐 그곳의 새로움을 발견할 때까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늘 우연한 만남과 뜻밖의 발견임을 알고 있으니..

그러나 그곳에 제로 웨이스트로 머물 수 있는 숙소가 있어야 했고, 비건인 시원이가 먹을 수 있는 비건 식당이나 빵집, 카페가 있어야 했고,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다다를 수 있는 거리여야 했다  프랜차이즈나 대기업을 통해 우리가 여행에서 쓴 돈이 다시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는 로컬 기반의 숙소였으면 했고, 그곳에 연결된 지역과 사람, 예술을 마주할 수 있는 여정과 연결되기를 꿈꾸기 시작했다.

 

단순하고 까다로운 여행자들의 여행 계획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여행에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원치 않는 것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꽃의 속도로 올라오는

봄을 마중하는 남도여행으로 마음을 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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