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며느리의 시댁입성기
어릴 적부터 TV는 내 친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TV 앞에 붙어 앉아 몇 개 되지도 않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집중하며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정립해나가곤 했다. TV 속 세상을 전부로 알던 나에게 시댁은 애석하게도 두려움의 존재였다. 특히 시어머니에 대한 편견을 키우기엔 완벽한 환경이었다.
시부모님을 뵙자는 남자친구 말에 머릿속에선 자동으로 어렸을 적 영화 전문 채널에서 간간히 본 올가미의 한 장면을 떠올려지기도 했고, 사랑과 전쟁의 신구 할아버지 얼굴이 몇 번 스쳐가기도 했다.
90-00년대 브라운관 속 시어머니는 대단들 하셨다. 물 심부름을 시킨 뒤 며느리가 종종걸음으로 갖고 온 유리컵에 입술만 대더니 인상을 팍 쓰고 못 마땅한 듯 벽에 던져 와장창 깨트리고 "물 떠 오랬더니 찬물을 떠 와?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거냐?" 하며 인상을 팍 찡그렸고 그 옆에서 며느리는 어쩔 줄 모르며 앞치마로 눈물을 찍어내기 바빴다.
걱정으로 굳어있는 내 모습에 "우리 엄마 아빠는 안 그래"라고 걱정을 거두라는 남자친구가 순박하게 웃고 있던 박용우 배우의 얼굴과 겹쳐지는 건 왜였을까? 겉으로는 맞장구치면서도 속으로는 '드라마에서도 다들 그렇게 말하거든? 역시 아들이란 뭘 모르는 부류구만'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동안 남자친구에게 간간히 들은 시아버지는 간첩 잡는 보안과 출신으로 70-90년대를 호령했던 경찰로 정년 퇴직하셨다. 해뜨기 전 출근해 달별과 함께 퇴근하던 게 당연했고, 연과 줄이 중요하던 시기니 인맥 관리 차원에서 술도 많이 드신 분이셨고 그만큼 집안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시어머니는 바쁘신 바깥양반을 대신해 가사를 홀로 맡으셨다. 이미 낳은 자식 셋도 버거운데 본인도 목욕탕에 아들과 함께 가고 싶다는 아버지의 조름에 마흔의 나이에 마지막 임신과 함께 마침내 아들을 쟁취하신 분이었다. 당시 시어머니 40세, 유독 컸던 배를 끌어안고 7살, 6살, 4살짜리 세 딸을 조르르 케어하셨다고.
가부장제가 당연했던 풍토 속에 사셨던 시부모님께서 힘들게 낳은 막내 아들을 향한 애정이 대단하지 않겠냐는 우려와 함께 편부모 가정 아래에서 자란 나는 이래저래 흠 잡힐 수 있다는 생각에 목이 바싹 말라 계속 물을 마셨다.
게다가 시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시부모님과 나의 나이차이는 거의 반백살이다. 정확히 시아버지와 나는 45년, 시어머니와는 42년 차이가 났다. 솔직히 '시'자 보다는 이게 더 문제였다.
엄마와 내 나이 차이도 30년뿐이 안되는데도 매일 같이 싸우고 부딪히는데 그보다 더 가부장제를 세게 겪으신 시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니 이건 부담을 넘어서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두려움이었다. 반백년의 차이는 고정관념의 차이와도 이어진다. 가부장제에서 모시고 산다는 건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모진 말을 듣고 숨어서 울어야 한다는 걸. 모든 말에 네-하며 제깍제깍 따라야 한다는 걸. 객식구니 혈연보다는 뒷전이 되기도 각오해야 하고, 혼자라는 고독에 사로 잡혀도 한 집안에 사니 내 편 하나 없다는 외로움에 덩그러니 놓여진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렇게 풀어놓고 생각하니 갑자기 자신이 없었졌다. 나는 아직 사회적인 스킬도 부족한 스물 몇살에 인생 초보라 '시'라는 강을 건너기도 벅찬데 심지어는 50년의 세월까지 마주해야 한다니. 혹시 부당함을 마주해도 면전에 대고 따박따박 대들만큼 간이 크지도 않으니 지금이라도 같이 사는 문제를 철회하고 조금 멋쩍고 마는 것이 나았다.
이유 모를 답답함이 점점 나를 감쌀 때 접을 땐 접더라도 나는 확인 받고 싶은 게 있어 긴급하게 남자친구와 문답시간을 갖기로 했다. 가감 없이 질문할 테니 거침없이 대답해 달라는 말과 함께.
Q. 같이 살면 밥을 제가 해야 할까요? 저 밥 못하는데요.
A. 아무도 너에게 뭔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나 포함.
Q. 연세가 많으시니 저희가 모시러 가야겠지요?
A. 우리 아빠는 친구 만나러 혼자 양평까지 다니시는 분입니다.
Q. 친구랑 밤 늦게 놀다가 들어가도 되나요?
A. 그러세요.
Q. 시어머니께서 시집살이 시키지 않으실까요?
A. 다시 말하지만, 너는 완전 애기급이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행여나 시집살이를 시킨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Q. 귀한 외아들이신데 나중에 꼭 아들 손자를 원하시진 않으실까요?
A. 그건 아니라고 못하겠지만 티는 절대 못 내실 겁니다. 애초에 난 비혼주의라서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엄마 아빠는 너에게 고마워합니다.
Q.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제가 뭘 해야 할까요?
A. 너 먹은 거 치우고, 너 입은 옷 정리하고, 그냥 너와 내가 벌린 것들만 함께 치우면 됩니다.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덜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그냥 같이 사는 것뿐입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도 조심히 신경쓰실 거다. 그래도 불편하면 언제든 나와도 되니 일단 시작 해보자.
남자친구의 대답은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즉문즉답으로 이뤄진 짧은 문답이었으나 떠보기와 돌려 말하기 없이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솔직한 대답을 들어서인지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안함이란 안개가 조금은 걷혔다. 모든 답변에서 한결같이 유지한 스탠스는 절대 갑과 을이 아니라는 것. 우린 그냥 같이 사는 것뿐 누가 누구를 모시는 건 아니라는 일관성 있는 태도였다. 이건 나에게 중요한 포인트였다.
가족이 되는 결혼이란 결합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건 합가든 분가든 형태와 관계없이 결합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인 셈이다. 왜 나는 시댁살이에선 며느리가 을이라고 단정지었을까? 가족이란 울타리로 엮이기 위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건 나, 가운데를 맡은 남자친구, 거기에 만난지 얼마 안된 다 큰 처자를 며느리란 이름으로 함께 살 시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다 만들어진 울타리 안에 늦게 들어간 내가 같이 조금 더 불편할 수 있지만 주변에서 더 많은 배려를 해준다면 쌤쌤 치고 말 수도 있을지 모른다.
만약, 남자친구가 효자였고 나에게 가부장을 강요했었다면 애초에 결혼 얘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먼저 꺼낸 결혼 얘기에 최대한 신중히 대답한 이 남자에게 나도 그 정도 믿음은 있었다. 그래 아니면 말자하며 일단 한 번 뵙자고 심플한 결론을 내렸다.
최대한 퓨어하게 마인드 세팅을 했다. 어차피 똑똑한 척하려 해 봐야 내가 생각한 몇 수 정도는 인생 선배들에겐 쉽게 들키는 법이니 최대한 순수한 마인드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실수해도 어머나 하고 말아야지 하기로 하고 첫 만남 날짜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