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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May 12. 2024

날마다 요리하는 여자

단편소설

1.

  새벽 6시.

  델마르 카페, 음악이 조금씩 울림을 퍼뜨린다.  평화를 깨뜨리는 교회 종소리 같다.  핸드폰의 알람 음악, 델마르 카페...  천천히 안방을 건너 팔십 평 남짓한 아파트 실내를 흔들어대기 시작한다.  음악의 파장은, 일정한 진동을 유지하면서 안방을 건너 서재를 휘돌아 ㄱ자 모양 통유리 거실 가죽 소파를 감싸 안았다.  건너 대리석 식탁과 간이 조리대를 넘어 주방 장식 문을 통과해서 현관 옆 넓은 통로를 휘감았다.  그리고,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 옆에 나란히 놓인 아이들의 방 두 개씩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고 있었다.  어느덧 음악은 복도 끝자락 어딘가에서 대리석 벽과 마주하며 소리 파장을 돌이키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 파장이 온 집안을 뒤흔들고 안방 문어귀에 부서져 내릴 즈음, 입 꼬리에 미소를 머금으며 행복한 마음이 온몸을 흔들면서 일어난다.  아이보리색 레이스 커튼 사이로 아파트 단지 길 가로등이 희미하게 아른거리고 몇 년 사이 제법 자란 벚나무가 굵은 꽃송이를 망울망울 피우고 있다.  핸드폰 음악을 그대로 둔 채 잠시 그 아름다움과 정적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음악의 파장을 천천히 깨는 또 다른 짧은 음의 파장이 순간 비집고 들어온다.  띠 띠 띠 삐리릭-  현관 자동문 열리는 소리.  남편이 왔다.  밤새 포르말린 냄새를 풍기며 메스 하나로 전투를 벌이고 이제야 퇴전 노장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로 들어서는 시간이다.  내가 만든 이 완벽한 아름다운 가정 안에.  침대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안방 문을 열렸는데, 남편이 쓰러지듯 온몸을 밀며 들어온다.  나는 넘어질 듯 그를 안아 겨우 침대에 눕혔다.  그는 일어나려는 내 팔을 당기며 살짝 이마에 키스한다.  쉬어요.  그는 이 한 마디에 만족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눈을 감는다.  조심스럽게 드레스 룸에 그의 옷과 가방을 두고 욕실에서 목욕물을 받았다.  나올 때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문을 살짝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온 밤을 새우며 수술을 집도하고도 남편은 언제나 짜증스러운 표정 한번 보인 적이 없다.  그런 날이면 항상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게 더 미안해했고 아이들에게도 더 친절하게 대했다.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뛰어난 머리 하나로 명문대 의과대를 나와 대학병원 전문의까지, 개천에서 용 난 놈들은 다 독하고 모진 구석이 있다며 처음에 결혼을 은근히 탐탁잖게 여긴 친정아버지도, 두어 번 그를 탐색하고는 인품이며 사람됨이 남다르다며 믿었다.  지금도 그는 내게 최선의 표정과 평화를 선사하지 않는가.  정말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냉장고 문을 연 채 잠시 머뭇거리고 섰다. 아침에는 어떤 메뉴가 좋을까. 아이들이 입맛 없어하니까 게살 수프에 닭 가슴살 샐러드를 해 볼까. 그게 좋겠다. 아침 식사용 식빵은 지금쯤 적당히 발효가 되었을 것이고 신선한 딸기가 얼마간 남았을 것이다. 어제 산지 직송으로 주문한 대게도 있으니 안성맞춤이다. 식재료들을 꺼내 싱크대 위에 하나씩 올려놓는다. 부엌의 라디오 주파수를 클래식으로 맞추고는 천천히 재료들을 씻기 시작한다.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신성한 아침 요리가 시작되는 이 평화로운 시간.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지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지 않은가. 한 번 쪄서 가져온 대게의 다리 두어 개를 가위로 자르며 게살을 분리한다. 어젯밤에 발효시켜 놓은 반죽이 발효기 안에서 잘 부풀어 있다. 스위치를 눌러 식빵을 굽기 시작한다. 닭 가슴살은 밑간을 해서 담아두고 신선한 샐러드용 야채들을 꺼내 씻어 냉동실에 차게 둔다. 그리고 딸기를 흐르는 물에 씻어 역시 냉동실에 차게 둔다. 그 상태로 믹서에 갈면 멋진 스무디가 된다. 


 이 즈음이면 아이들을 깨울 시간이다. 7시. 다영의 방문을 열자 침대 사방으로 레이스가 다 내려져 있다. 긴 머리의 다영은 먼 이국의 공주처럼 아름다운 자태로 잠들어있다. 인생에서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시절, 여고생. 다영의 잠든 얼굴을 마치 큐피드가 사랑의 마법에 걸린 여인을 바라보듯 훔쳐본다. 천천히 다영의 몸을 흔든다.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인다. 알았다는 신호. 그즈음이면 다혜 방으로 갈 차례다. 다혜 방 안 침대 구석에서 모기소리만 한 음악 소리가 나고 있다. 엠피쓰리. 어젯밤에 음악을 듣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다. 이불을 다 걷어찬 채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자고 있는 모습이 귀엽고 앙증맞다. 나는 다혜의 엉덩이를 톡 때린다. 다혜는 으~음 하면서 고개만 다른 방향으로 바꾼다. 이 정도면 일어날 것이다.


 이제 냉동실의 딸기를 꺼내 믹서에 갈고 갓 구운 식빵을 먹기 좋게 자르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닭 가슴살 샐러드를 버무려서 은근한 불에 올린 게살 수프가 넘치지 않도록 가끔 저어주면 오늘 아침은 성공이다.     


 아이들은 닭 가슴살 한 조각과 딸기 스무디 한 모금을 마시고 일어난다. 나는 강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다영이는 어제도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새벽 1시에 귀가했다. 다혜도 연습실에서 밤 11시 넘어 들어오지 않았는가. 안쓰러울 뿐이다. 나는 얼른 일어나 안방 문을 살며시 열고 화장대 위 차 키를 꺼냈다. 아이들은 벌써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다리고 섰다. 침묵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파트 입구는 출근 차량으로 줄을 이었다. 나는 리모컨으로 차 시동을 켰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자 가로수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백미러로 두 아이를 보았다. 무표정하고 창백하며 피곤해 보인다. 둘 다 각자 고개를 돌린 채 유리창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애써 말을 걸려다 그만둔다. 그저... 이 침묵의 시간 또한 아이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을까. 다영이는 정문이 마치 대학교를 연상시키는 외국어 고등학교 앞에서 내리고, 다혜는 한 블록 위의 중학교에 내린다. 이제 혼자다. 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에프 엠 클래식으로 맞추었다. 아침에 아이들이 탈 때는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라디오를 꺼둔다. 혼자가 될 때는 언제나 잔잔한 음악을 듣는다. 오래된 버릇이다. 오늘따라 피가로의 결혼 서막이 나오고 있다. 볼륨을 있는 대로 올리고 유유히 시내를 돌아온다.


 그리고 9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편이 목욕 가운 차림을 하고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라면서 식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내게 가벼운 키스를 빠뜨리지 않았다. 남편을 위해 따로 놓아둔 곡물 식빵을 꺼내고 게살 수프를 다시 불에 대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냉동실에 남겨둔 딸기는 믹서에 갈아지고 있었다. 그즈음 냉장고에 남편 몫으로 차게 넣어둔 닭 가슴살 샐러드가 나올 차례다. 그는 신문을 보고 있다. 나는 순간 작고 여린 어느 왕국 요리사가 되어 왕에게 바치는 신선한 요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릇 하나하나 나르면서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바친다. 나의 왕은 만족한 미소로 답한다.  음- 신선한 샐러드향, 오늘 아침은 게살 수프가 더 맛있는데.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행복한 몇 마디. 그는 어쩌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잘 알까, 아니 잘 헤아릴까. 수프를 후루룩 떠먹다 갑자기 생각난 듯 그는 방으로 급히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은 나이답지 않게 각이 진 실루엣이 더욱 멋져 보인다. 식탁 위에 봉투 하나를 건네며 다시 수프를 떠서 먹는다.  화사한 봄 옷 하나 사.  그는 살짝 미안한 듯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오늘도 수술 스케줄 잡혀 있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는다.  하루 이틀인가? 환자들에 신경 써요!  그는 오늘 아침 따라 더욱 부드럽다.  고마워!  그는 잘 다려진 하얀 셔츠에 세미 정장 차림을 선택했다. 손수건을 건네자 살짝 볼에 입을 맞추고는 경쾌하게 현관 쪽으로 간다. 이 정도의 황홀한 스킨십이라면 백 번의 서투른 섹스보다 훌륭하지 않은가. 나는 그윽한 눈빛으로 남편의 자취를 따라갔다.  다녀올게.  네.  띠리링- 현관 도어가 닫힌다. 아- 텅 빈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며 나는 베란다 정원 쪽으로 갔다. 한순간의 이 정적을 빨리 지우고 싶은 것이다. 정원의 화초들은 오늘따라 더욱 생기가 있다. 나는 호스 밸브를 열어 샤워 버튼을 누르며 화초들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다시 현관문 도어 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종종걸음 소리가 났다.  조금 늦었어요, 차가 막혀...  나는 못 들은 척하던 일을 계속했다. 얼마 전 새로 온 아주머니라 그런지 아직 서로 익숙하지 않다. 개의치 않고 싶었다. 그리고 이 평화의 시간을 쓸데없는 것에 시간 낭비하기도 싫다. 완벽하게 나 혼자만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것이다. 밸브를 조금씩 더 세게 켜며 화초에 물을 흠뻑 주었다.      


  자기야, 나랑 청담동 안 갈 테야?  민주 엄마의 하이 톤 목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었다.  모임 전에 머리 손질하고 손톱도 좀 다듬고...  음... 좋아.  민주 엄마는 그 밖에도 자질구레한 것들을 몇 가지 일러두고는 끊었다. 어차피 오늘 스케줄에 미용실 머리 손질은 들어있었고 같이 갈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 점심 모임은 다영이 학교 엄마들 몇 사람의 정기 모임이다. 민주 엄마의 제의로 모임에 들었는데 꽤나 중상층 부류들이라 어울려 해가 될 것은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유쾌한 외출인 셈이다. 시계를 봤다. 거실 벽시계가 아홉 시 반을 가리킨다. 입고 갈 옷은 골라뒀으니 화장만 하면 끝이다. 이렇게 완벽한 일상은 항상 나의 자랑이자 자존심이지 않은가.          



2.

   사모님, 머릿결이 조금 상하셨어요.  그렇지?  언제 시간 되실 때 한 번 들르세요.  통 시간을 뺄 수가 없어.  두피 마사지도 좀 받으시고 헤어 팩도 받으시고...  정말 그래야겠어.  민주 엄마는 연신 떠들어대는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꼬박꼬박 대구를 한다. 잘 맞는 만담 콤비와 같다. 나는 긴장감 풀린 느긋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길게 펼친 채 손톱을 다른 이에게 한껏 내맡기고 있었다. 넓은 통유리창 너머로 낮은 돌담길을 따라 만개한 벚꽃들이 보인다. 천천히 물들어가는 손톱 색깔이 옅은 분홍을 띠며 그 위에 하나씩 정성껏 박아 넣는 큐빅들이 바깥의 벚꽃을 옮겨놓은 듯하다. 봄이구나. 내 손톱에 내려앉은 봄. 눈이 부신 연분홍 벚꽃 망울망울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 서서히 내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알 수 없는 맑은 눈물.      


  점심시간의 백화점 식당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 모임에서 예약한 뷔페식당은 점심 특선 메뉴를 선보이는 곳이라 더욱 그러했다. 단독 홀을 예약하긴 했지만 바깥 홀은 사람들이 넘쳐 났다. 민주 엄마는 모임의 회장 격인 양현이 엄마를 쳐다보며 양 미간을 찌푸렸다.  호텔 뷔페로 하자니까...  양손에 금반지 두어 개에 금팔찌까지 휘두르고 통통한 손으로 스테이크를 써는 일에 열중하던 양현 엄마는 잠시 민주 엄마를 곁눈질한다.  호텔 예약이 늦어져서 그래. 담에는 좀 조용한 데로 하지, 뭐.  양현이네 이번에 공장부지 또 매입했다면서?  반대편에 앉은 바비 인형같이 생긴 유라 엄마가 샐러드를 몇 조각 포크로 찍으며 말을 꺼낸다. 보톡스를 맞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벌써 입가에 주름이 늘어져있다.  음-  뭐 조금 무리했지.  돈은 그 댁에 다 가나 봐!...  참, 이번 여름에 필리핀 안 갈 테야? 내가 새로운 골프장 봐 둔 데 있는데....  그러게 내가 그 회사 상장 되기 전에 주식 좀 왕창 사 두라니까, 이제 늦었지 뭐....  승원이 담임은 명품 백 하나면 오케이야!...  싸게 먹히지 뭐....  우리 딸은 S대 미대 가야 돼.  내신 좀 맞춰 달래야지.  안 그럼 애 잡어.  실기 레슨 받고 학과 공부하고 언제 다 해 내?...  피로감이 밀려온다. 재잘대는 소리가 마치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 씹히는 잡음처럼 톡-톡 귀를 찌르며 좌르르 쏟아진다. 나는 포크를 든 채 접시 위 음식들을 헤집고 있었다.  자기, 오늘 야식 당번인 거 알지?


  민주 엄마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어? 으흐-음.  다영이네는 야식 하나로 선생들 꽉 잡고 있잖아.  덕분에 우리 야식 때마다 신경 쓰여 죽겠어!  돈도 많은 집에서 여름 넘기지 말고 담임한테 뭐 하나 안겨 줘.  야식 값이 더 많이 들겠어.  까르르 웃음이 쏟아진다.  솔직히 말해 봐! 그거 어디서 매번 주문해 오는 거야? 아니면, 요리사 이름이라도 좀 알려 줘. 응?...  무슨 소리들이야?  민주 엄마의 단호한 목소리가 왈칵 들린다.  다영이 엄마가 매번 만들어 오는 거 자기들 몰라? 정성이지, 무슨...  다들 조금 누그러진다.  음식 솜씨가 부러우면 그렇다고 솔직히들 말해, 우리끼린데 무슨 오징어 뒷다리 꼬는 소리들이야?  아유, 자기는 말을 꼭... 그렇게...  부러워서 그런 거지.  이럴 게 아니라 다음 모임은 아예 다영이네서 하는 게 어때?  그 댁만 못 가봤잖아, 우리!  그럴까?... 나는 입가에 웃음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흔쾌히 승낙했다. 언제부터인가. 아주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매일 아침 학교 교문으로 승용차에 태워져 등교하고 자기들과 다른 꽃수가 놓인 수입품 옷들만 입는 나를 향해, 반에서 꽤나 산다는 집  아이들이 말 꼬리에 언제나 비아냥과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를 장식품처럼 달아대며 말했다. 너무나 익숙한 화술들. 


  식사를 마치고 몇몇은 바쁜 듯 가고 또 몇몇은 아주 한가한 듯 쇼핑을 하기로 했다. 화려한 샹그리에와 조명 아래 수입 화장품들은 진열장 안에서 금가루를 뿌린 듯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여자들 틈에 끼여 샤넬 향수를 한 병 샀다. 향이 그윽한 것이 꼭 봄꽃들을 다 퍼다 담아 놓은 것 같다. 여자들은 옷이며 가방들을 가격표도 보지 않고 척척 사 댔다. 나는 지난번부터 봐 둔 구찌 가방을 하나 구입했다.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것이 쏙 마음에 들었다. 마치 아무도 모르는 외도를 잠깐 하고 돌아온 듯 가슴 설레면서도 산뜻한 기분이다. 쇼핑은 여자를 매료시키는 유혹이다. 여자들의 쇼핑을 조금 거들며 다니다가 나는 따로 떨어졌다. 지하 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리라. 어떤 누구와도. 언제나 계획한 요리를 준비하기 위해 장을 볼 때 나는 혼자 간다. 여자들은 물건을 고르거나 옷을 사면서 바람을 피우는 것 같은 짜릿함을 느낀다지만, 나는 요리할 재료를 천천히 혼자 고를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누구에게 들킬 것 같은 불안과 쾌감을 동시에 느낀다. 오늘의 야참은 케밥. 모든 요리는 재료가 신선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정성껏 골라야 한다. 나는 우선 유기농 야채 코너부터 들렀다. 그리고 천천히 필요한 해산물들을 고르고 국내산 한우를 부위별로 조금씩 골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벌써 카트 안에는 물건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서영이. 분명하다. 살이 조금 오르고 배가 나오긴 했지만 내가 알던 내 친구 서영이가 맞다. 바코드로 물건들을 찍으며 가끔 고객에게 살짝 미소를 짓는 그 모습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인디언 보조개에 매력적으로 피어오르는 그 서영이가 분명하다. 앞치마에 유니폼가지 입고 있지만 요란한 화장법 대신 내추럴하게 밑 화장만 하고 간단한 루주를 바른 상태로 보이지만 그 오래된 기품과 선이 아름다운 자태는 여전했다. 왜 저기 있는 것일까. 대학 4학년 때 자기는 기필코 세계적인 소설가가 될 거라고 큰소리치던 서영이, 도대체 왜 저기. 밤새 원고지 쓰던 그 손으로 바코드 찍는 기계를 쉴 새 없이 두드리고 있는 서영. 무엇이, 왜, 어째서.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명문대 영문과 출신의 내 친구가, 왜 저기서, 무엇을 위해서.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애써 고개를 조금 숙이고 천천히 카드 서명기기 쪽으로 가서 섰다. 서영은 여느 캐셔와는 조금 달랐다. 쇼핑한 물건들을 바코드 기기를 대며 찍고는 도장을 찍듯이 물건을 하나하나 옆으로 넘겼다. 고객이 산 물건을 짐 던지듯 내던지는 다른 캐셔들에 비하면 고객의 입장에서는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서영이 맞다. 그녀는 아직 시선을 화면에 둔 채 나를 보지 못했다. 그때, 핸드백 속의 폰이 맑은 피아노 소리를 울렸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주섬주섬 핸드백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영의 눈길이 느껴졌다. 점점 강하게. 폰 속의 피아노소리는 그칠 줄 모른다. 


  -채연이... 맞지?


  그녀는 나를 향해 해맑게 웃었다. 나는 마치 어른 몰래 뭔가 굉장히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까지 발개져 당황하고 있었다.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 카트에 물건을 담는 둥 마는 둥 서로의 연락처를 급하게 찍어주고는 황급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내 뒷모습은 세상에서 제일 급한 일이 발생한 사람 같았을 것이다.           

3.

  정작 전화를 한 사람은 은주였다. 세상에 하나뿐인 시누이. 남편에게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동생. 자기를 위해 인생을 희생한 한없이 미안한 동생. 울먹이는 은주 목소리가 폰 밖으로 들려온다. 백화점 근처 찻집 안은 한산했다. 은주는 얼마나 울었던지 두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한서방이 회사 그만뒀소, 언니.  아니, 왜... 저희 오빠가 뭐 서운하게라도...  은주는 애써 양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 부인했다.  못 나서 그렇지 뭐. 학벌 없다고 직원들이 하도 눈치하고 구박을 하니, 회장 백 사장 백 있음 뭐해요? 그래, 내가 차라리 잘했다 했어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치 내 아버지와 오빠가 모욕을 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집 근처에 작은 치킨점이 하나 나와서 봐 뒀는데...  개업할 때까지 목구멍에 풀칠은 해야겠고...  가게 개업할 때까지 생활비는 그럼 보내드리게요.  은주는 순간 다시 울상을 한다.  개업할 돈도 없소.  그건 오빠와 상의하세요. 그것 까지는 제 소관이 아니에요.  시무룩한 표정이더니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차. 조금 전 백화점에서 산 명품 가방 쪽으로 은주의 시선이 돌고 있었다.  언니는 세상 부러운 게 없겠수. 누구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누구는 몇 백만 원짜리 명품 백에...  아가씨, 요새 오빠 매일 야간 수술에 파김치 돼서 새벽에 들어와요. 우리도 쉽게 살지 않아요.  그러게, 우리 오빠만 고생이지. 그런다면서요? 의사들만 불쌍하지 의사 마누라들이 세상에서 제일 팔자 편한 사람들이라고.  뒷덜미가 뻣뻣해져 왔다. 결국 그 명품 가방은 이십 여 분 내 손아귀에서 놀다가 바로 은주의 손으로 들어갔다. 은주는 명품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먼저 간다는 말을 남긴 채 한들거리며 찻집을 나갔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는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기가 막히고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남편이 알면 또 얼마나 속상해할 것인가.


 친정아버지와 오빠의 회사에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는데, 견디기 어려웠단다. 하기야 나는 잘 모른다. 이제껏 내 손으로 직접 단 돈 십 원도 벌어본 적이 없으니 직장 생활의 어려움이나 고단함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참아야 하는 시점과 견뎌내야 하는 일마저 무사통과는 아니었다. 인생은 그렇게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각자 나름의 몫이 있으니. 그러나 은주는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아주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튀기고 사는 재벌 집 며느리 정도로 여기고 산다. 그러면서 자신을 나와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어리광을 부린다. 진저리가 난다, 이제. 나는 재벌 집 며느리가 아니지만, 정작 은주 자신은 재벌 집 딸보다 더 응석받이로 자라지 않았는가. 늦둥이 막내로. 은주가 유일하게 집안을 위해 한 희생이라고는 하기도 싫은 공부 더 이상 안 하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취직해 오빠의 등록금을 댔다는 것이다. 결국 근 일 년을 모아 산 명품 백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오래오래 아껴 쓰고 아이들에게 물려주려 했는데. 막 일어나려는데 문자가 들어온다. 은주다.  언니, 생활비 조금 보내줘요!


  온몸에 기력이 다 빠진 것 같다. 천천히 걸어서 근처 현금지급기로 갔다. 아이들도 어리고 당장 생활비가 없으면 힘들 것이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이체를 시키고 돌아서는데 폰이 울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다혜 바이올린 레슨선생이다.  어머니, 저기... 다혜가 요즘 따라 자꾸 손이 자주 떨립니다. 혹 어디가 아픈 건지 걱정이 돼서요. 피로감도 자주 느끼고...  나는 당황했다.  요사이 몸이 좀 안 좋은가 봐요, 선생님. 컨디션이...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왜 미처 몰랐을까. 이름만 엄마일 뿐, 순간 나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때, 또 다른 문자가 폰을 울린다.  여벌옷은 있으니 애써 안 와도 되겠어. 사랑해 여보.  이 문자 한 통에 은주에 대한 원망도 피로감도 일시에 사라져 버린다. 정말 근사한 남편이다. 남편이 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더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 근사한 남자를 돕는 일이지 않는가. 또 한 번 폰이 울린다.  언니, 근데 이 가방 혹 짝퉁은 아니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폰을 꺼버렸다.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커브 길에 급발진을 하다 차가 살짝 뒤로 밀렸다. 지상으로 올라와 주차비 정산 부스에서도 정지대를 하마터면 박을 뻔했다. 주차비 정산 요원은 조수석에 수북하게 쌓인 쇼핑백들을 넘겨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통과하라고 한다. 우회전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미처 못 보고 있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차가 강하게 클락션을 울렸다. 그 소리가 마치 ‘정신 차려!’하는 것 같았다. 핸드폰이 피아노 소리를 냈다. 


  -채연아, 나 서영인데. 


  반가움과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너, 지갑 두고 갔어.


  그제야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곁눈질로 열린 핸드폰 속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지갑이 없다. 당황하여 계산대에 두고 온 것이다.


  -신용 카드 3장, 체크카드 5장, 현금 10만 원, 운전 면허증, 신분증... 맞니?


  지극히 사무적인 내용인데도 부드러운 서영이의 목소리가 차츰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저녁 시간에 백화점 마치는 시간 즈음 만나기로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근 이십 년 만의 만남이다. 어쩌면 내가 심하게 의식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서영은 담담하지 않은가. 자신의 직업이나 처지가 어찌 됐든 오랜 친구를 위해 애써 노력하지 않는가.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서영은 언제나 나를 부끄럽게 하는 친구였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말아야 했던 서영의 대학 시절. 삼 학년 일 학기말, 서영이 처음으로 전액 장학금을 놓친 적이 있었다. 그 장학금은 내게 돌아왔다. 나는 미리 알고는 조교와 교수님께 장학금을 사양했고 차석인 서영이 받게 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버린 서영이, 늦은 밤 내게 전화를 걸었다. 집 근처라는 것이다. 골목에는 해가 져 어둑했고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하얀 후드 티셔츠를 입은 서영이 양손에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서 있었다. 서영은 나를 보더니 해맑게 웃으며 그것을 건넸다.


  -이거.


  얼떨결에 받아 쥐니 따뜻했다. 


  -고마워. 채연아.


  나는 그때도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고구마 맛 탕이야. 너 좋아하잖아.


  그제야 일 학년 처음 간과 엠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서영이 그때 맛 탕을 해 보였는데 과 친구들 전부 맛있다고 난리였다. 그 가운데 유달리 내가 좋아했었다. 냄비에 남은 것까지 박박 긁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마음 받기로 했어. 정말 고마워.


  맛 탕을 받아 돌아서는 내내 부끄러웠다. 친구의 자존심을 건드렸구나. 그런 나를 위해 맘 상할까 봐 도리어 서영이 조심하고 있지 않은가. 진심으로 가슴이 오랜만에 다시 뻐근해왔다.    


  3시.

  아파트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자 입구에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서 있다. 나이는 사십 대 후반 정도인데, 몸이 빠른 편이다. 차 시동을 끄는 동안, 그녀는 벌써 장 본 물건들을 들고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지런함과 빠름이 결합된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집 안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재료들 냉장고에 넣어 주세요.  사모님, 오늘 메뉴는 뭔가요?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다.  굴 구이, 쇠고기 떡갈비, 미소 된장국, 가지나물, 과일 샐러드... 야참 케밥!  노래를 부르듯 안방으로 걸어가며 나는 되뇌었다. 오늘 저녁도 근사한 요리들로 내 가족을 만족시킬 것이다. 비록 가족들이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거나 포르말린 냄새를 맡으며 수술실에서 밤을 새울지언정 그들을 기다리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나는 차려 놓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아주 어릴 적, 가끔 지방 출장을 가서 하루나 이틀이 지나 돌아오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언제나 따뜻한 아랫목에 아버지의 밥 한 그릇을 수건에 똘똘 싸서 묻어두곤 했다. 무겁고 두툼한 놋그릇은 밤새 거기서 우리의 발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밥은 다음날 아침이면 식은 밥이 되어 집안일을 돌보는 찬모들의 입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밤을 지내고 올 때마다 이런 의식을 반복했다.  요리가 마무리될 즈음, 피크닉 바구니를 꺼내 한지 기름종이로 싼 케밥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도우미 아주머니는 딸기를 갈아 생과일주스를 만들기 시작한다. 굴은 가족들이 오면 언제든지 바로 구워 먹을 수 있게 손질해 두었고, 쇠고기 떡갈비는 노릇노릇 잘 익은 채 채반에 가득 담겨 있어 먹기 전 조금만 데우면 된다. 미소 된장국은 오늘따라 맛이 깔끔하게 잘 우러났다. 가지나물 무침과 약간의 밑반찬은 냉장고 신선 칸에 보관해 두었고, 과일 샐러드는 바로 버무릴 수 있도록 포장해서 넣어두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나는 앞치마를 벗고 안방으로 급하게 들어갔다. 화장대 앞에 서서 머리와 얼굴을 매만지며 정리를 한 후 버버리를 꺼내 입었다. 저녁은 쌀쌀하다.        


4.

  6시 30분.

  도로에는 퇴근 차들로 혼잡하기 시작했다. 다영의 학교는 시내 한가운데 있다. 나는 신호를 대기하면서 옆 좌석에 있는 피크닉 바구니와 주스 상자들을 자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포장된 케밥이 오십여 개, 생과일주스가 오십여 개. 이 정도면 반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내일은 또 어떤 메뉴를 낼까. 내일은 햄버거를 만들어야겠다. 입이 짧은 다영이가 햄버거를 만든 날은 꼭 집에 와서 야참 맛있었다는 한마디를 하곤 한다. 


  학교 교문 앞을 지날 때는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운동장 가를 돌아 강당 앞 주차장으로 차를 천천히 몰았다. 주차장은 만차였다. 건물 뒤 편 쪽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겨우 한 두 자리 남아있었다. 바구니와 상자를 들고 건물을 돌아 나오려는데, 저쪽 수돗가 앞에 학생들의 기척이 들렸다. 벌써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우우-욱. 욱.

  괜-찮-아?

  윀--우우-욱.

  실루엣으로 봐서 여학생이었다. 무척 괴로워하는 듯했다. 그 옆은 기가 훤칠한 남학생으로 보였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보다. 보건실에 가지 않고 왜. 어두운 수돗가에서. 

  어떻게 - 하지?

  병원에선?

  두 달 됐대!


  남학생은 그런 여학생이 예쁘다는 듯 한쪽 팔로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는 여학생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준다. 그때, 여학생이 다시 고개를 처박고 토하자 남학생이 등을 톡 톡 두드린다. 나는 건물 뒤편에서 조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건, 구역질이다. 헛구역질.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가느다란 실루엣에 오뚝한 콧날, 긴 머리. 가로등을 등지고 서 있는 여학생의 실루엣이 또렷이 보였다. 다영이, 다영이다! 그 옆의 훤칠한 키의 남학생은 같은 반 만기다.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건물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양손의 물건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경비실에 야참 바구니들을 맡기고 1학년 00반 야참이라며 전해달라고 하고는 정신없이 차를 몰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학교 앞 사거리로 급하게 나오다 하마터면 앞의 차를 박을 뻔했다. 급브레이크로 끼익- 소리가 울렸다. 횡단보도에 빨간색 점멸등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삐삐삐비----- 초록색 불이 켜지자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바쁘게 지나갔다. 나는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럼, 아닐 거야. 너무 어두웠어. 다영이와 비슷한 체형이긴 하지만. 전교생이 천명도 넘는데. 그래, 민기 다른 여자 친구겠지. 민기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참, 민기 엄마에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안도의 긴 한숨이 나왔다. 


  그때, 핸드폰이 맑은 피아노소리를 내며 울렸다. 전화를 켜자 다혜의 바이올린 레슨 선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다혜가 연습하다 갑자기... 쓰러져서...  네에?  지금 앰뷸런스로 병원 가는 중입니다!  나는 갑자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뒷덜미가 뻣뻣해지면서 머리가 온통 뒤로 뒤로 젖혀졌다. 숨이... 숨이...  순간, 점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나는 머리를 젖힌 채 감각으로 기어를 바꾸어 천천히 악세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비상깜빡이를 넣었다. 한 손으로 뒷머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다혜, 다혜가.  로터리를 지나 좌회전 신호를 급하게 받으며 남편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레슨 선생이 다행히 남편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 남편이 너무 보고 싶다. 호흡 조절을 하면서 차를 몰았다. 괜찮을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래, 그래. 서서히 목이 풀리기 시작했다. 깜박깜박. 비상등을 계속 켜고 남편 병원으로 내달렸다. 악세레이터를 밟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옆에 놓인 휴대폰으로 단축키를 눌렀다.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을 연이어한다. 수술 중일 것이다. 나는 순간 쓴 미소를 지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자꾸만 재다이얼을 누르는 나 자신이 우스울 뿐이다. 


  병원 응급실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남편의 병원에 수도 없이 들락거렸지만 응급실에 온 건 처음이다. 나는 차를 단번에 주차하고는 응급실로 달려갔다.  다혜, 다혜!  응급실 한쪽 간이침대 위에 백지장 같은 얼굴로 다혜가 누워 있었다. 레슨 선생은 안절부절못하고 서성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다. 그때, 담당 레지던트가 걸어왔다.  심한 빈혈에 영양실조입니다!  네에? 영양실조요?  나는 망연자실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영양제를 넣었으니 며칠 쉬게 하시고 영양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게 해 주세요!   세상에. 이럴 수가. 그때 응급실 안내 데스크 쪽에서 낯익은 간호사들과 레지던트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왔다. 남편 얼굴에 떡칠을 하게 생겼다. 당황하고 급한 나머지 깊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남편에게 미안한 일이 생겨 버렸다. 자꾸 가슴이 두근거린다. 서서히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 댄다. 나는 다혜가 링거를 맞고 자는 동안 음료수 한 상자를 사 들고 남편의 진료실로 올라가 보았다. 일단 상황을 이야기해 두는 것이 덜 당황스러울 것이다. 수술 중이라면 메모라도 남겨야 할 것이다. 핸드폰은 별 소용이 없으니. 신경외과 병동은 모처럼 한산했다. 병동 안내 데스크에 앳된 얼굴의 김 간호사가 보였다. 내심 반가웠다.  어머, 사모님! 어쩐 일이세요?  아이가 아파서...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그래서 과장님이 일찍 퇴근하셨나 봐요!  김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수 상자를 받아 들었다.  오늘 수술도 천 과장님께 돌리시더니... 아이가 많이 아픈가 봐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 간호사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그녀는 거의 매일 야간 근무를 하지 않는가.  이 간호사는 안 보이네!  김 간호사는 갑자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사모님, 글쎄 시골서 친구가 올라왔다고 하도 바꿔 달라고 해서... 아무리 선임이라도 좀 너무한 거 같아요!  투덜거린다. 심장이 갑자기 아주 빠르게 고동을 친다.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 같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서 천천히 복도를 걸어 나왔다.     


  이를 악다물었다. 다혜를 어떻게든 집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 정신없이 운전을 해서 다혜를 침대에 눕히고 옆에 우두커니 앉아있으려니 도우미 아주머니가 물을 들고 들어섰다.  아이고, 많이 놀라셨지요?  아주머니가 나가고 갑자기 선뜻 생각이 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혜의 책상 서랍을 차례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맨 아래 서랍장 깊숙이 담배와 라이터가 발견되었다. 그 옆에 놓인 양철 캔디 통을 여니 꽁초가 수북했다. 얼마 전 다혜와 같이 백화점 쇼핑 갔다가 연습실에서 먹게 사 달라고 해서 사준 그 캔디 통이다. 그 앞에 놓인 커다란 쿠키 통을 열었다. 지폐가 수북했다. 레슨 때 배고프지 말라고 챙겨 준 간식비였다. 나는 아주머니가 볼까 얼른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사탕 통을 움켜쥐고 나왔다. 나는 다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 얼굴은 이미 흙빛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다영의 방 서랍장과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불장 깊숙이 뭔가 손끝에 닿는 것이 있었다. 가슴이 고동을 친다. 천천히 끄집어 내 보니 하얀 과고에 든 먹다 남은 피임약이 나왔다. 그러면 지난번 바깥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피임약 껍질들이 해고당한 도우미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작년에 심심하면 발견되었던 수면제 봉지도. 다 모두 다 다영이가 먹은 것이란 말인가. 나는 방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작년에 다영이가 신경이 극도로 예민했고 좀 체 잠을 못 잔 것은 알고 있었다. 한동안 그러더니 또 한 번 자면 일어나질 못 하길래 긴장한 탓인가 보다, 중3이라 그런가 보다, 했던 것이다. 외국어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지금까지 학교와 독서실과 집 밖에 모르는 아이인데. 도대체 언제 무슨 시간이 있단 말인가. 지금도 학교에 있지 않은가.  그럼, 수돗가의 그 아이가 정말...  나는 애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엄마, 오늘 독서실에서 밤샘하고 내일 아침에 바로 걸어서 등교할게요. 야식, 애들이 맛나데요!  나는 독서실로 바로 전화를 했다. 다영이가 오늘 밤샘 자리를 끊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다영이는 학교가 마치는 데로 사거리 횡단보도를 지나 친구들과 천천히 걸어 상가 독서실에서 이 밤이 새도록 열심히 공부를 할 것이다. 지금도 학교에서 야간 자습을 하고 있지 않는가. 아주 열심히. 내 인생은 그래도 행복하다. 그래도!          


5.

  아이들 서랍장에서 꺼낸 물건들을 움켜쥐고는 도우미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안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내 아이들이 그럴 리 없다. 분명 내가 오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성급하게 결론 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 다혜는 푹 재우고 내일 하루 쉬게 한 다음 차근차근 물어보면 될 것이고, 다영이는 아침에 독서실로 가서 속옷 몇 가지 챙겨주고 상황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문자가 들어왔다. 


  - 지금 마쳤어. 백화점 옆 호텔 오거리 커피점에서 봐!


  서영이었다. 내 친구 서영이.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일상을 깨는 오늘 하루의 엄청난 균열들을, 그것들을 감당할 누군가가 갑자기 그리워지고 아니 감당은 아니어도 최소한 수다라도 떨 대상이 필요한 탓이다. 정신없이 아무 이야기나 마구 지껄여대도 상관없는 누군가. 나는 도우미에게 추가 수당을 지급하고 집을 지키게 했다.      


9시.

백화점 근처 오거리는 그 시간까지 차량이 밀려 있었다. 다영이는 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어야 학교에서 나올 것이다. 그 시간쯤 전화를 한 통 해야겠다. 그럼, 내 가족이 나를 배신할 일은 없다. 당연하다. 갑자기 조금 초조해졌다. 차가 막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서영이는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그런 이유만이 아니라도 오늘같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서 오랜 친구와 한참을 떠들어 대고 싶다. 나는 핸들을 틀어 차선을 변경하고 호텔 쪽 길로 들어섰다. 거기서 돌아 나가 좌회전을 받으면 쉽게 맞은편으로 갈 수 있다.  호텔 길 안으로 들어서자 건물 전체가 불빛으로 번쩍거린다. 호화롭다. 그리고 아름답다. 나는 오랜만에 누려보는 호사인 듯 아주 천천히 호텔 로비 주변을 뱅 돌았다. 로비로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오고 가고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로비로 걸어오는 행복한 한 쌍의 남녀가 얼핏 보였다. 남편, 윤 철환이다. 그 옆에 애교 넘치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꼭 붙어있는 이 간호사, 이 진아. 남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서로 속삭이면서 까르르 뒤로 넘어가는 시늉을 한다. 그들은 로비 안으로 들어간다. 숨이, 숨이, 가슴이 답답하다. 목을 움켜쥔 채 고개를 돌리니 그들이 호텔 카운터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건 배신이야. 완벽한 배신이야!  갑자기 끼익- 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로비 옆 구석으로 밀려갔다. 인도 턱에 바퀴가 탁 걸려 멈춘다. 숨을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으로 목을 움켜잡으며 다른 손으로 급하게 가방을 마구 뒤졌다. 타이레놀, 아스피린... 아니면... 아니면.... 손에 닿는 것이 있다. 숨을 헐떡이며 곁눈질로 보니 담배였다. 다혜의 담배. 나는 정신없이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물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를 켰다. 나는 급하게 한 모금 쭈욱 빨아 당겼다. 울컥- 기침이 마구 쏟아진다. 다시 한번 천천히 빨아 당겼다. 후우우 욱- 조금씩 호흡이 가라앉았다. 길게, 다시 길게 당기고 내뱉었다. 차 안이 담배 연기로 자욱하다. 천천히, 천천히.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움켜쥐었던 모든 것이. 담배를 잡은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내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쉴 새 없이. 쉴 새 없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눈이라도 멀다면. 이렇게. 아. 숨을 쉴 수가 없다. 흐린 시야로 호텔 가로등 불빛 사이 아른 아른 내린다. 나는 천천히 눈물을 닦았다. 담장 너머 즐비한 벚나무에서 벚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꽃비를,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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