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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May 12. 2024

날마다 요리책을 먹는 여자

단편소설

1.

  밤 9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채연이가 오면 이 정도는 계산을 할 것이다. 정말 오랜 친구를 만났는데 차 한 잔 살 여유가 없다. 갑자기 나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해진다. 그래도...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두부 한 모에 콩나물 한 봉지는 넉넉히 살 수 있는 돈인데. 나는 늘 이렇게 살아온 것 같다. 대학 시절, 친구들이 자주 가던 카페나 커피숖이나 술집들을 기웃거리기만 했지 막상 내 발로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가끔 과모임이나 친구들 틈에 어쩔 수 없이 한 두 번 가 보기는 했다. 그럴 때마다 지갑 속의 돈을 계산하며 쭈뼛거리고 앉아만 있었다. 그 시간에도 시장에서 배추 한 포기 더 팔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 더는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다. 돈에 쫓기기보다는 그와 관련된 또 다른 뭔가에... 채연이가 늦다. 조금만 빨리 와 줬으면. 온몸에 피곤과 한기가 밀려온다.


  습관적으로 카페를 두리번거려 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시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오래된 구형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린다. 문자 메시지인가 보다. 참 폰에 시계가 있었지. 문자는 채연이었다.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 내일 만나자고 정말 미안하다고... 허탈하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한껏 밀려온다. 오랜 친구를 만난다니 잔뜩 들뜨고 긴장했나 보다. 상대적으로 내 모습도 비쳐가며 혼자 기다리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다. 휴. 아무튼 이제 가서 쉴 수 있겠다. 


  그때, 카페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어두운 밤거리 속에 카페 안의 내 모습이 비친다. 다소 어색한 모습으로 주춤거리며 앉아 있는. 화사한 테이블 위의 구형 폴더 핸드폰처럼 나도 그렇게 카페 위에 앉아 있다. 내 주위로 연인들이, 멋진 남녀가, 독한 향수와 맵시를 풍기며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맑은 웃음소리를 가득 퍼뜨리기도 한다. 나는 잠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렇게 행복할까.      


  계산대 앞에서 잠시 주춤거렸다. 지갑에 돈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마치 나쁜 짓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채연의 지갑을 꺼냈다. 만원 한 장을 꺼내 커피 값을 계산했다.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흘금 쳐다본다. 거스름돈을 대충 받아 주머니에 꾸겨 넣고는 허둥거리며 가게에서 나온다. 카페 앞에서 겨우 긴 한숨을 내쉰다. 만 원은 내일 채워 넣으면 된다. 그래. 낡은 핸드폰에서 진동이 또 울린다. 나는 천천히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발을 옮기며 폰을 꺼낸다. 집주인이다. 태양이 엄마, 이번 달은 곤란해. 벌써 네 달이야. 이래 가지고 어디 세 놓겠어?  죄송해요. 꼭 해결하겠습니다.  빈 말이라도 믿어는 볼게. 밀린 거 다 못 주면 한 달 치라도 넣어야지. 이번에도 안 되면 집 빼야 돼. 알았지?  그런 일은 없어야죠. 네. 꼭 드릴게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이번 달은 우주 학원비도 맞춰야 하고 돈이 더 많이 드는데. 어디 가서 남의 돈이라도 훔치고 싶은 심정이다. 참 열심히 쉬지 않고 살고 있는데 왜 매일 돈 걱정을 하며 살까. 하루 벌이에 생존의 모든 것을 담보 잡은 채. 오래전 기억도 잘 안 나는 그 어떤 때는 주머니에 한 푼도 없어도 세상을 향해 그렇게 당당했고 멋졌고 강했는데. 지금은 내가 돈이라는 괴물의 노예가 돼 버린 것 같다.      


  버스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폰이 또 울린다. 남편이다. 폰 시계로 아홉 시다. 오늘 늦게라도 올라온다고 했는데.  우주엄마. 울산 공사가 아직 덜 끝나서 며칠 더 걸리겠어. 금요일쯤 올라갈게.  식사 거르지 말고 드세요.  애들은?  잘 지내요. 저기... 여보.  알고 있어. 이번에는 공사 좀 큰 거 했으니까 몫 돈 좀 가져갈 수 있을 거야. 걱정 마. 애들이나 잘 챙겨.  네.  밤하늘에 울리며 공허하게 뚝- 끊어진다. 나는 오래전 그를 기억한다. 총학생회장을 하던 시절도 숨어 다니던 시절도 법정에 섰을 때도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는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당당하고 거침없었고 눈에는 항상 옳은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보였다. 나에게도 한결같은 애정을 보였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다. 감옥에서 나와 빨간 줄이 그어진 명문대 중퇴생은 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한동안 세상에서 이탈된 채 살아갔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먼저 한 경제활동은 선배의 권유로 시작한 택시기사였다. 이미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는 다른 선배들의 일을 도우며 전기배선 공사를 하거나 막노동 시다를 하거나 야간 대리 운전을 하는 등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일 년간 내게 연락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청혼을 했다. 같이 살 작은 집을 한 칸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제 세상을 향해 시작하자고. 그 말에 몇 년간의 마음고생과 옥바라지와 모든 시름이 다 녹아버렸다. 나는 그즈음 다행히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작은 출판사에 취직해 있었다. 돈을 좀 모으면 내 힘으로 유학을 가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청혼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미 오랜 친구 오랜 동반자였기 때문에. 결혼 후 그는 어느 순간 오랜 전 내 기억에 살아 있던 그 눈빛이 이미 아니었다. 하루를 살아내는 그저 고달픈 한 도시 서민일 뿐. 그 하루가 그다지 눈부시지도 그다지 활기차지도 않은 그냥 의무처럼 짊어진,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산꼭대기까지 짊어지고 올라가는 바위덩이처럼. 결국 정상에 올라도 까마귀에게 간을 먹히는 그런 운명. 어쩌면 그에게 나와 아이들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커다란 바윗돌인 셈이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다들 지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오래된 습관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것.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아주 오랜 습관. 그 사이 문자가 또 몇 통 왔다. 캐피털 신용카드 등 연체를 알고 있음에도 굳이 이 밤에 다시 알려야겠는지 끊임없이 문자가 온다. 불이익을 당한다고. 불이익. 그 불이익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인데. 그들만 모를 뿐 나는 이미 알고 있었건만.      


  밤 열 시가 넘었는데 집은 아무도 없다. 캄캄하다. 우주는 조금 더 있어야 학교 야간자습이 끝나고 태양이는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교복을 허물 벗듯 펼쳐놓고 학원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나는 부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하고 앉아있었다.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내가 하루의 피로를 푸는 방식은 이렇다.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가만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풍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난해서 공부를 했고 없어서 시간을 아꼈고 다 함께 살아야 하니까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뭔가 채워지고 가득 차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비워지고 달아나고 멀어지는 이 느낌. 오늘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건만 오늘 하루도 줄지 않은 부채. 카드 전화 대출 이자 집세 아이들 학원비 생활비... 화장실 가는 시간마저 아끼며 일하는 데도 왜. 대학 시절 부르짖던 그 많은 사상과 이론들이 지금 현실로 작용하고 있고 빈부 차이는 극심해지는데 이제 더 이상 목숨 걸고 부르짖을 그들은 없다. 기껏 등록금 한두 푼에 삭발 단식투쟁이나 하고 취업 자리 얻으려 길거리로 나가고 내 집단 내 울타리 내 공동체만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온 힘을 쏟고. 정작 이 모든 사회 구조의 근본 문제 덩이는 다 외면한 채. 그것들을 부르짖던 오래전 그들은 다 마음이 변했거나 길거리 소시민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거나 내 남편처럼 빚에 몰려 지방을 전전하거나. 가슴이 답답하다. 나는 팔을 뻗어 책꽂이 가장 아래 칸 낡고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그 뒤편에 숨겨둔 담배 한 개비를 더듬으며 꺼낸다. 라이터도 함께. 불을 붙여 힘껏 빨아 당겼다. 다시 천천히 내뿜는다. 그래. 흔들리면 안 돼. 살아 내야 해. 이 거짓말 같은 거대한 구조 덩이 괴물에게 내 영혼이 잠식당해서는 안 돼.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아 있잖아. 지나가는 들꽃을 보고도 감동받을 수 있고 사춘기 우리 아이들이 잠깐씩 흘려주는 미소에도 가슴이 미어지게 감사할 수 있고 맑은 날 잘 마른빨래처럼 가끔 내게 오래전 잊었던 그 그윽한 남편의 눈길에 행복을 느끼지 않는가. 그래서 난 오늘 하루도 지지 않고 잘 살아낸 거야. 잘했어.     

  맞다. 태양이가 교복 셔츠 빨아야 한다고 했다. 그 아이는 성격이 칼칼해서 옷매무새에 신경을 많이 쓴다. 셔츠가 빳빳이 다려지지 않으면 불쾌해한다. 내친김에 남편 작업복도 다려 놓고 아이들 밑반찬도 해 둬야겠다. 갑자기 해야 할 일들이 머리를 휘감는다.  

  이제는 가계부를 정리해야 한다. 나는 연말에 은행에서 얻은 복주머니 그림이 그려진 가계부를 책꽂이에서 꺼낸다. 수북하게 쌓인 책들 사이에서 요사이 유일하게 보는 것은 이 가계부뿐이다. 핑계를 대자면 볼 시간이 없다. 카드 사용 내역들과 영수증들을 놓고 긴 한숨이 나온다. 이번 달 역시 당연히 적자다. 남편이 지방에서 목돈을 보내지 않는 한 해결 방법이 없다. 소소한 대출부터 남편의 부채까지 허리가 휘다 못해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 또 긴 한숨이 나온다. 내가 마트에서 캐셔로 일 할 것이 아니라 고액 과외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이 나이에 경력도 없는 아줌마를 학벌 하나만으로 과외시킬 부모는 없다. 그렇다고 월급도 박한 출판사 편집 보조나 교정 따위를 한다는 건 더 한심한 일이다. 누가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돈다발이라도 확 뿌려 줬으면 좋겠다.     


2.

  아침 일곱 시. 액정이 깨진 금 사이로 핸드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가계부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새벽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아이들은 어느새 들어와 둘 다 이층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책상 위에 엎어진 채 잠이 든 내게 아이 중 누군가 담요를 어깨에 덮어놓았었다. 잠이 깨서 담요를 확인하고는 당황해서 먼저 펼쳐진 가계부부터 얼른 봤다. 잘 접혀 원래대로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태양이 일까, 우주일까. 가계부가 온통 마이너스인데 아이들 중 누군가가 봤다면. 지금 사춘기라 가장 예민한 때이다. 남편이 몇 번 사업이 실패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이들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시시콜콜한 가계 부채까지 다 안다면 아이들이 무슨 희망으로 미래를 생각한단 말인가. 최소한 그건 물려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늘 아이들이 없을 때 가계부를 펼치곤 했는데.......           


  아이들을 깨웠다. 우주는 몇 번의 부름에 바로 눈을 떴다. 태양은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한다. 아침상을 차리는 동안 우주는 벌써 씻고 한 손에 단어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가방을 챙긴다. 태양은 아직도 샤워 중이다. 우주를 보고 있으면 오래전 대학시절 남편의 모습이 비친다. 늘 한쪽 손에 책을 들고 다니며 걸으면서 읽던 사람. 지금은 그 손에 공구함을 들고 다닌다. 엄마. 장조림 먹고 싶어요.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이며 태양이 한 소리 한다. 어, 미안. 저녁에 해 놓을게. 우주가 책을 보면서 한 손으로 반찬을 집어 올린다. 반찬 많은데 무슨. 아버지 올라오시면 그때 장조림해요. 형은. 자라는 청소년은 단백질 섭취를... 나도 모르는 사이, 태양이 말을 하다 멈춘다. 아마도 또 우주가 눈짓을 한 모양이다. 우주의 지나친 어른스러움이 가끔은 참 부담스럽다. 차라리 철부지 아이 같은 태양이가 더 인간적이다. 얘들아. 엄마가 미안해. 반찬 신경 쓸게.


  우주는 대문 옆에 놓인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태양은 죽어도 그런 낡은 자전거는 안 탄다며 걸어간다. 나는 아이들을 이층 계단에서 내려다봤다.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이들이 나간 자리마다 옷가지며 책들이 즐비하다. 설거지며 집안 청소를 할 시간이다. 그때 핸드폰 문자 알림 벨이 울렸다. 채연이다. -서영아. 어제 정말 미안하구나. 오전에 시간 되면 출근길에 우리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을까. 몸이 좀 아파서 나갈 수가 없구나.- 원래 채연이 좀 약했다. 새하얀 피부에 가느다란 몸매가 정말 불면 날아갈 듯한. 우리 같은 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그 무엇. 나는 서둘러 청소와 설거지를 했다. 들렀다 출근하기에는 좀 빠듯한 시간이다.      


  지하철 안에서 내내 요리 어플을 검색했다. 내 유일한 취미. 이 화려한 요리들의 식재료를 맘대로 사서 이렇게 만들어 보는 것. 아이들이 원했던 장조림조차 재료비를 이리저리 재어봐야 할 지경이다. 요리책에서 본 쇠고기 장조림도 해 주고 싶고 돼지고기 장조림은 누린 내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첨가물을 넣어 끓이는데 그것도 해 보고 싶고... 결국 우리 집 장조림은 달인 간장에만 빠진 돼지고기와 달걀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좋아하니 다행이다.     


  채연의 집은 예상대로 고급 아파트 단지였다. 현관에서부터 비밀키나 암호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세대 호출을 하니 중년의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은 자연스럽게 열렸다. 20층. 엘리베이터는 너무도 조용히 올라갔다. 2001호. 벨을 누르려는 순간, 안에서 문이 열렸다.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인. 나는 엉겁결에 인사를 꾸벅했다. 여인은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한다. 현관으로 들어가자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문이 또 하나 있었다. 들어서니 양 옆으로 복도가 펼쳐져 있고 앞은 유리문으로 된 주방과 거실이 보였다. 도대체 몇 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기가 죽을 만큼 멋지다. 


  안에서 창백한 얼굴의 채연이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 주춤거리고 서 있었다. 어서 와. 채연은 내 손을 잡으며 거실로 데리고 갔다. 미리 준비된 것처럼 넓은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그 여인이 커다란 쟁반 가득 뭔가를 내 왔다. 차와 갓 구운 쿠키. 마치 요리책 화보를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멋지게 사는구나. 이런 삶의 방식도 있구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했다.


  멋지다! 채연은 수줍은 표정이다.  어젯밤에 일이 좀 많았어. 미안해.  나는 쿠키 한 조각을 들어 올렸다.  이 쿠키, 직접 구운 거야?  아침에 아파서 굽지 못하고 어제 구워 둔 거야. 맛이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맛보다도 이런 쿠키를 직접 구울 수 있다는 것, 아니 구울 재료와 도구가 구비된 가정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정말 부러웠다. 아이들이 몇 살이니? 응, 중학생, 고등학생. 둘 다 사내아이야. 어머, 우리랑 비슷하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딸이야. 나는 그제야 거실과 부엌을 둘러보았다. 장식 유리 안 쪽 부엌에는 멋진 기구들이 윤을 내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 밖은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너처럼 집이 정말 예쁘다. 채연은 또 한 번 수줍어했다. 마트 출근시간에 쫓겨 나오면서 처음으로 채연이 부러웠다.         

      

3. 

  오후 세 시. 계산대 위를 움직이는 내 손과 팔이 늘어진 스프링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다. 가장 힘든 시간. 온몸에 피곤이 몰리고 점심으로 먹은 음식이 위에서 있는 데로 팽창해 온몸의 에너지와 활동을 위로 모두 다 가져가는 시간. 고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니 더 힘이 든다. 그때 정장 차림의 젊은 사내 하나가 계산대 앞으로 불쑥 들어선다.  장서영 씨.  단호하고 뭔가 섬뜩한. 오래전 듣던 사복형사의 그 목소리와 흡사한 톤과 높낮이.  OO캐피털입니다. 날짜가 많이 지났습니다.  주변의 캐셔들이 쳐다본다. 고객들도 쳐다본다. 나는 순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나는 죄인이 돼 버렸다.  죄송해요... 오늘 꼭... 어떻게든... 죄송해요...  그럼, 오늘 중 입금 약속하신 걸로 믿고 갑니다.  나도 모르게 그 사내 등 뒤에 몇 번 절을 한다. 권력에 대한 복종. 돈에 대한 복종. 인격과 도덕성 위에 군림하는 권력과 돈.  장서영. 신용민이 어디 있어?  몰라요!  가서 똑똑히 전해. 대한민국이 하도 좁아서 숨을 데 별로 없다고.  여긴 학굡니다. 사복형사가 학내 들어와 공무 집행해도 된다는 법적 근거 가지고 오세요!  역시 먹물 든 것들은 똑똑해. 알았어, 알았어. 빨리 자수 안 하면 너도 엮어 넣을 수 있어. 내가 조금 알아봤는데 노동자들 선동하는 문학 모임에 야학에 불법 유인물들 전부 네가 뒤에서 쓴 거 아냐?  증거 가져오세요, 증거!  두고 봐.  왼쪽 눈 옆에 깊은 칼자국에 나 있던 그 형사는 수시로 나를 겁주고 갔다. 남편이 수배 떨어지고 숨어 지내는 일 년 동안. 어떤 날은 두려움에 자취방을 갈 수 없어서 학보사나 강의실 구석에서 자는 일도 허다했다. 그때는 최소한 나를 지켜 줄 학교라는 울타리가 있었다. 지금은. 거대한 자본과 권력과 돈 앞에서 나를 지켜 줄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비굴해질 수밖에 없다. 돈을 빌려 갚지 않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죄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권력 앞에서 맞서 싸우던 학창 시절은 정당함과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돈 앞에서는 모든 것이 아주 명백해진다. 돈이 있으면 바르고 돈이 없으면 거짓인 것이다. 그 사람의 가치나 인격이나 생을 바라보는 관점들도 돈이 있으면 존중을 받고 더욱 빛이 나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한 순간에 그것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쩔 도리가 없다. 인생의 가치와 잣대를 아무리 돈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 살아보려 발버둥 쳐도 결국 자본의 틀 안에 이미 갇혀 버린 새 꼴임을 이제야 깨닫고 체념하고 살아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돈을 구하든지 아니면 둥지 속에 갇혀 날개를 하나하나 뽑힌 채 살아가든지. 선택은 항상 분명하다.     


  머리가 멍멍해서 잠깐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다. 핸드폰 문자는 그 사이 빚 독촉 문자만 수 십 통이 와 있다. 핸드폰 액정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무의미하게 밀어내는데, 뭔가 다른 문자가 하나 밀려들어왔다. 우주 담임선생님...  어머니, 시간 되실 때 연락 꼭 부탁드립니다.  두어 시간 지난 문자다. 나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당황해서 얼른 전화를 했다. 아이를 학교에 맞긴 대한민국 모든 엄마들은 담임선생님이 이유 없이 문자나 전화를 주면 제일 무서운 법이다.


  선생님. 한 번 찾아뵙지도 못하고....  아, 어머니. 다름 아니라 우주가 다음 학기에 출국 예정이라서요. 여권이나 기타 서류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네? 그게 무슨... 우주가 말씀 안 드렸나요? 교육부에서 우수학생 선발 독일과 3년간 교류하는 내용인데요, 우주가 한 달 전에 뽑혔어요. 교장 선생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전국 상위 1% 내에서도 10명만 선발하는 시험이었는데 정말 대견해요. 그런데 왜 우주가 말씀을 안 드렸는지...  선생님, 그럼 교환 학생 같은 건가요.  네. 지금 우주가 고1이니까 다음 학기에 독일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3년간 지원받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나라 대학에 입학하게 되겠지요. 모든 학비와 생활비는 교육부와 독일 유학생 장학금 등으로 충당이 된다고 해요. 그쪽에서 원하는 건 조금 일찍 들어와 한두 달 적응기간을 가지고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저희도 우주 덕분에 독일에서 올 학생을 맞이하느라 학교가 분주하네요. 그러면, 준비해야 할 서류 등을 문자로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머니. 우주에게도 말했는데 독일 입국 후 모든 비용은 부담하실 것이 없지만 출국 비행기표는 끊어 주셔야 합니다. 나중에 정산이 되는 부분이라고 하던데 지금 상황으로는 어려운가 봅니다.  이거였구나. 우주가 내게 말을 못 한 이유가.  네, 선생님. 우주 아빠랑 상의해서 최대한 빨리 서류나 기타 다른 것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어머니.     


  밤공기가 쌀쌀하다. 가로수마다 벚꽃이 만개해 있다. 지금은 벚꽃이나 감상할 때가 아니다. 그래도 가로등 사이로 만개한 벚꽃은 몽한적이다. 꿈만 같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네.  태양이가 경찰서에 왜?  거친 남편의 목소리. 마치 내가 뭔가 잘못한 것처럼. 내게 추궁하는 듯한 그런 말투.  지금 경찰서 가는 중이에요. 자세한 건....  도대체 애들 관리를...  남편은 순간 말을 멈춘다.  태양이가 해킹을 했대요. 경찰이 IP 추적했는데 태양이 다니는 PC방에서...  저녁마다 학원 간다고 안 했어?  알고 보니... 학원 빼먹고 좀 다닌 모양이에요.  전화기에서 긴 한숨 소리가 나온다.  우주 문제로도 상의할 게 좀 있는데...  우주는 또 왜?  남편은 얼마 전부터 내게 짜증과 신경질을 온통 내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 안은 소름이 끼칠 만큼 조용했다. 나처럼 불려 온 학부모들이 몇몇 보인다. 아이들이 의자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다. 교복 윗단추가 떨어져 나간 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태양이 보인다. 복장이 흐트러지는 꼴을 못 보는 아이가 왜 저 모양이 되어 있을까. 누가, 왜? 매서운 눈매를 가진 형사가 보호자 동의서를 내밀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신태양이 보호자세요?  느리면서 단호한 말투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집에서 단단히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태양이 저 녀석, 우리가 조금만 늦었으면 청와대 보호막까지 뚫을 뻔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멀리 앉아있던 한 보호자가 벌컥 화를 낸다.  아니, 지천에 깔린 게 PC방이고 폰에도 인터넷이 다 깔려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얘들을 지켜요? 일도 하지 말고 하루 종일 손 꽁꽁 묶어 데리고 다녀? 그리고 해킹은 아무나 하나? 머리가 좋으니까 해킹도 하고 그런 거지.  다들 수군거리며 갑자기 동요하기 시작한다.  조용히들 하세요. 조용히들!  형사는 낮은 톤으로 중후하게 위압적이다.  해킹은 범죄예요, 범죄!


  범죄. 엄마는 돈을 못 갚아 범죄이고 아들은 컴퓨터를 너무 잘해서 범죄. 태양이는 몇 발자국 떨어져 따라온다. 나는 지쳐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갑자기 온몸이 늘어진다. 귓가에 태양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아.


  엄마. 엄마. 엄마!

  태양의 비명소리에 우주의 낮은 목소리가 오버랩되어 귓가를 끊임없이 맴돈다. 아이들. 내 아이들. 


  익숙한 냄새, 일상적이면서 편안한 작은 소음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두 조 난 듯 심한 통증이 온다. 조금 열린 방 문 사이로 두 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신태양. 너 철 좀 들어. 어?  단호한 우주의 목소리.  칫, 그런 형은. 교환학생으로 가 버리면 그만이잖아!  야!  그깟 공부 형이나 실컷 해. 아빠 엄마 봐! 공부를 못해서 가난하냐? 난 공부 안 해. 돈  벌 거야!  이 짜식! 학벌이라도 있어야 비비고 나갈 거 아냐?  근데 왜 아빠나 엄마는 그 좋은 학벌로 못 비비고 나가냐?  순간, 짧은 파찰음이 울린다.  부모님 욕보이지 마라! 최소한 난 아빠 엄마 존경해!  낮고 차가운 우주의 목소리. 뒤이은 태양의 울먹이는 소리.  씨팔. 나도 존경한다고. 그래도 가난한 걸 어떻게. 내 친구 아빠는 하루 종일 골프나 치고 술 먹고 돈 펑펑 써도 주식에 건물 세에 돈이 남아돌더라. 우리 아빠는... 죽어라고 일만 해도 매일 돈이 없잖아. 좆같네, 진짜. 나도 다른 애들처럼 학원비 걱정 안 하고 다니고 메이커 옷도 사 입고 싶고 어학연수도 가고 싶고 스키장도 가고 싶고..... 으흐흐흑...  눈을 감았다. 내 두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타고 내린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눈물이 동공을 끌어안고 삼켜버려... 눈을 도무지 뜰 수가 없다.  형!  태양의 울부짖음이 더 커진다. 우주가 태양을 안고 다독이는지 등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주가 태양을 품에 안고.


4.

  하늘까지 닿을 듯 높은 유리 너머 하늘에 구름 몇 조각 걸려있다. 하늘이 너무 넓어 땅 아래 봄꽃이 화초처럼 펼쳐진다.  티켓팅을 마친 우주가 남편과 같이 멀리서 걸어온다. 날렵한 몸동작에 하체가 조금 더 긴 두 사람. 이제 우주가 더 크다. 태양은 반대편에서 뭔가를 잔뜩 사서 들고 온다. 아주 신이 난 표정이다. 우주는 남편이 며칠 전 사 준 고가의 브랜드 점퍼와 바지 등으로 갖춰 입었다. 맵시가 났다. 한 달 전, 남편은 지방의 모든 일자리를 다 그만두고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지인이 소개해 줬다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지인에게 빌린 돈으로 부채를 대략 갚아 나갔고 우주의 비행기표를 끊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브랜드 옷들을 사 주었다. 연봉이 꽤 많단다. 갑자기 달라진 이 상황에 가장 당황하는 사람은 나였다. 우주는 의아해하면서도 내심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자신이 외국에 가도 가족은 일단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해 보였다. 태양이는 남편이 올라온 이후 내내 흥분되고 들뜬상태이다. 기분 좋은 들뜸. 이번 한 달간. 남편은 새 직장에 적응하면서도 간간이 아이들을 불러내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주고 옷을 사 주고 신발을 사 주었다. 돈에 한풀이하는 사람처럼. 내게도 끊임없이.  뭐 필요해? 뭐 사주까?  그 말들에 아이들은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도 불안한 것일까. 왜 이렇게. 내가 괜찮다고 하면 남편은 돌연 화를 낸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돈 많이 벌고 비싼 거 사주면 좋아하는데. 당신은 왜 그래? 내가 돈 많이 버는 게 싫어?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남편이 한없이 측은해 보여서였다. 측은해서 그 돈을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내게 쐬기라도 박듯이 내 옷이며 패물을 사다 그냥 안겼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엄마.  태양의 맑은 목소리다. 아이는 커피와 음료 그리고 빵 몇 조각을 들고는 내게 커피를 건넨다. 우리가 서 있는 높고 큰 유리창으로 햇살이 은은하게 내리비친다. 긴 그림자 네 개가 뻗어있다. 우주와 태양이. 그리고 남편. 내 가족. 


  개찰구 앞에서 우주는 내게 포옹을 했다. 나는 애써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알지?  네. 태양이가 나 대신 엄마 지킬 거예요!  순간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온다. 통증에 가까운. 우주는 남편과 태양이를 번갈아 안고는 개찰구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한동안 멍하니 거기를 바라보았다. 내 동공은 눈물을 삼켰다. 동공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다. 우주가 탄 비행기가 활주로를 타고 하늘로 오를 때까지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늘이 더 넓은 유리창 앞에서. 남편은 회사에서 내주었다는 검은 세단을 타고 회사로 먼저 들어갔다. 미안해하는 미소를 내비치면서. 

  태양과 나는 공항버스를 탔다. 오늘은 월차를 낸 상태라 별로 바쁠 것도 없었다. 태양을 데리고 영화도 보고 점심도 사 먹고 서점도 갔다. 얼마만인가. 이런 여유가. 태양은 어쩐 일인지 오늘만은 내가 하자는 데로 순순히 따라 주었다. 마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5.

  이혼하자.  스테이크 한 조각에 사만 원이란다.  미안하다.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는 공짜다.  애들 교육비, 양육비는 매달 넉넉하게 보낼게.  음료도 공짜다.  위자료 조금 보낼 테니 더 깨끗한 아파트로 이사 가.  비싼 걸 먹으니 공짜가 많다.  태양이는... 엄마랑 있겠데.  넓은 홀에 매달린 샹그리에가 아름답다.  얼마나 됐어요?  대구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할 때 시찰 나온 본사 직원 중 한 명이었어.  그쪽 회사는 아니네요.  계열사야.  지금도 이뻐요?  남편은 말이 없다. 나도 내가 이렇게 유치한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그냥... 나도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다.  그래요. 모르는 남보다는 낫네요. 학교 때부터 세희가 당신 죽어라고 따라다녔죠. 결국 또... 내가 졌네요.  여보. 나 용서하지 마라.  흐흐, 용서는 무슨. 다행이에요. 덕분에 우주도 독일에서 공부할 밑천이 생겼고 태양이도 맘 잡은 거 같고. 나, 잘못 산 거 같아요. 돈이면 다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남편은 또 침묵이다.  이혼해요.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루 종일 구인 광고만 보고 다녔는데. 학벌을 속이고 직장을 구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대학을 나오긴 했는지 내가 과연 영문과 출신인지 조차 헛갈린다. 식당 홀 서빙이나 주방 보조도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이주여성들이 차지하고 자리가 쉽지 않다. 한국인인 나는 갈 자리가 없다. 고졸인 한국인 사십 대 여성, 나는. 지난주에 마트에서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계약직의 반 수 이상을 재계약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나도 포함되었다. 태양이가 아직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더 거리를 쏘다니다 들어간다. 아이들이 잘 간다는 PC방도 가서 앉아 있어 보고 고궁 안을 돌아보기도 하고. 불안과 초조를 안고. 오늘은 조금만 더 돌다가 들어가야겠다. 


  핸드폰이 진동을 울린다.  서영아! 마트 그만두었니?  채연이다.  그렇게 됐네.  차 한 잔 할까.  

  한 번 갔을 뿐인데 채연의 집은 찾기가 쉬웠다. 거실 베란다 정원에서 채연이 나를 맞았다. 지난번 그 여사님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햇살이 정원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사실, 부탁 좀 하려고...  그 사이 살이 더 빠지고 두 눈이 퀭해진 채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둘째 영어 과외 좀 부탁해도 될까.  나는 순간 당황했다. 내가 그동안 어찌 살아왔는지 채연이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나 자신이 갑자기 한없이 초라하고 무가치해 보였다.  아- 오해는 마. 아이들에게 이모 같기도 하고 멘토도 될 사람이... 너밖에 없다. 부탁해, 서영아.  공부 손 놓은 지가 얼마나...  도와줘, 제발!  채연은 한 마디만 더 하면 울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주변에 시선을 두었다.  일하시는 분, 장 보러 가셨니?  내 보냈어.  왜? 문제라도...  좀... 여러 가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부탁하나 하자. 나, 너희 집에서 일 좀 해도 될까?  채연은 놀라는 눈빛이었다.  애들 공부는 그냥 틈틈이 도와줄게.  난 좋지만...  나는 애써 씩씩한 목소리로 말한다.  야, 나 지금 실직자야. 다른 집에서라도 일해야 할 상황이야. 너네 집이니 더 좋지!  채연은 맑게 웃었다.  고맙다, 서영아!       

  차비를 아끼느라 걸었다. 보도블록에 온통 떨어진 버찌로 점점을 이루고 있었다. 벚꽃은 다 사라지고 나무마다 새파란 잎이 올라와 있다. 내일부터 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되겠다. 참 잘 되었다. 면으로 된 운동화가 점점 버찌 물이 피어오르고 있다. 오늘 저녁에는 모처럼 돼지고기를 사 가야겠다. 요리책에 없는 우리 집 냉장고 속 김치만으로 맛을 낸 김치찌개. 더 이상 요리책을 먹고살 수는 없다. 내 집 냉장고 속 요리를 애써 배워봐야겠다.


  버찌가 발바닥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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