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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May 12. 2024

버려진 요리 만찬

단편소설

  채연의 집은 지나치게 깨끗하다. 내가 애써 치워야 할 것이 있다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물건들을 잘 간수하고 먼지를 제거해 주는 일 정도이다. 있는 그대로 잘 유지해 주는 일. 집안은 두루 그다지 고가의 물건을 별반 없다. 채연네 재력에 비하면 무척 알뜰하다는 의미다. 채연은 학교 때도 그랬다. 늘 검소하고 단정했고 그 흔한 메이커 가방 하나 없었다. 어느 폭우가 쏟아지는 날, 선배들이 모이라는 막걸리 집으로 급하게 뛰어가던 중이었다. 문과대 입구에 검은 세단이 한 대 서 있었고 채연이 그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처음에는 너무 긴장해서 채연에게 삐삐를 해댔다. 결국 그 차가 채연네 집안 승용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내게 새삼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 내숭이야, 내숭. 부자가 아닌 척, 겸손한 척. 역겹다, 야!


  그 역겨운 채연의 집에 결국 나이 마흔 넘어 가사 도우미로 취직을 하게 된 내 처지. 그런데 왜 싫지가 않을까. 채연의 인격을 믿어서일까, 아니면 막연한 동경일까.


  처음 며칠은 일을 익히느라 정신없이 지나쳤다. 그런데 점점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채연이 그토록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말한 이유가 무얼까를 계속 생각했다. 채연의 남편은 집에 들어온 흔적이 없다. 아니, 들어오지 않았다. 물건은 전부 있는데 주기적으로 옷들이 바뀌어 들어오고 아침에 안방 화장실을 청소해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다만, 속옷과 윗옷 몇 벌, 와이셔츠 몇 장이 번갈아 바뀔 뿐. 처음에는 수술이 많다고 들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채연의 불안과 초조에서 그것이 아님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내가 겪었던 그것처럼. 남편이 세희와 시간을 보내고 나를 배신하던 그 시간 동안 느꼈던 그 이상한 느낌. 분명 남편의 옷가지이고 남편의 물건들인데 뭔가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물건의 영혼이 딴 데 가 버린 허망함.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을 채연의 안방에만 들어서면 느꼈다. 그 이상한 허망함.


  그리고 다혜는 휴학을 한 채 집안 자기 방에만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었다. 가끔 화장실에서 심하게 구토를 하고 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럴 때마다 채연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다혜가 아파서 휴학을 했다고 한다. 너무 창백해서 가는 실핏줄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다영은 언제나 바이올린을 들고 늦은 밤 힘없이 들어왔다. 내가 뭔가 말을 붙이려 하면 신경질이 선 눈빛으로 쏘아보곤 했다. 그리고 화장실을 일 분 간격으로 들락거렸다. 손을 씻기 위해.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런 아이들의 모든 행동들을 채연이 통제하거나 야단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래 유순한 성격의 채연이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늦은 밤, 집에 오면 예전처럼 깜깜했다. 남편과 함께 살 때나 이혼한 지금이나 변한 건 별로 없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도 집안은 언제나 어두웠다. 다만 변한 것은 조금 더 깨끗하고 조금 더 평수가 넓은 작은 방이 세 개 닥지닥지 붙은 아파트로 이사 왔다는 것, 우주가 없다는 것. 적어도 캐피털이니 은행 대출이니 신용카드니 하면서 매 순간 쫓기는 생활은 안 해도 된다는 것. 이혼한 후, 날짜 하나 틀리지 않고 들어오는 생활비. 우주와 태양의 통장으로 들어오는 교육비.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면. 최소한 지금까지의 의리는 지키고자 애쓰고 있으니 됐다. 안방 한가운데 앉아 가방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혼자 있는 방이니 애써 안방처럼 꾸미지는 않았다. 남편의 책을 정리하고 남은 내 책들을 모두 안방에 넣었다. 이제 담배도 안방에서 피운다. 한 모금 빨아 당기고는 천천히 숨을 내 쉬며 뿜어낸다. 다영의 방 책상 서랍 뒤편에 찌그러진 채 깔려있던 담뱃갑에 남아있던 한 개비. 열다섯. 그 나이에 담배 연기로 인생을 달래야 할 만큼 팍팍한 사연이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 태양이에 비하면 언제나 좋은 집에 맛난 음식에 어릴 적부터 소질 개발해서 비싼 바이올린 연주자. 채연이가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운 둘째 딸. 그런데 왜 그렇게 신경질적이고 불안해하고 늘 초조해하는 것일까. 중2. 심각한 사춘기라 그런가. 그에 비하면 태양이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과 내 이혼으로 인해 해소 아닌 해소가 된 것일까. 태양이가 정말 원한 것은 가난보다는 친구들 부럽지 않은 용돈에 메이커 옷에 학원비 걱정 안 하고 다니는 것, 원하는 사양대로 컴퓨터 수시로 교환하는 그 정도. 우리 태양이가 열 다섯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남편이 어느 순간 다 충족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면 다영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채연이 말로는 다섯 살부터 바이올린을 장난감 삼아 놀았다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내 생각이 맞았다. 서영이 집안 살림을 맡아하면서부터 안정감이 보인다. 다영이 아무리 짜증을 내도 서영은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는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다행히 다혜의 임신을 서영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오늘은 아이들이 힘을 내도록 한정식으로 상차림을 할 것이다. 갈비찜, 구절판, 신선로, 약밥... 어릴 적부터 다혜는 내가 해 주는 약밥을 제일 좋아했다. 입덧이 심하니 이것은 조금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영이 좋아하는 식혜도 조금 해야겠다. 남편은 갈비찜을 정말 좋아하는데...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 가슴 한복판이 숨을 못 쉴 정도로 아파온다. 나는 벽 쪽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다른 손으로 가슴을 두드려 댔다. 숨이 막힌다. 아니 숨이 아프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그날 밤. 나는 링거를 꽂은 채 영양실조에 걸려 누운 다영을 보며 밤새 울었다. 새벽에 남편은 어김없이 초췌한 표정으로 소독약 냄새를 풍기면서 들어왔다. 포르말린 냄새가 방안 가득 풍기자 나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모든 장면이 희미한 마취제 속에서 아련하게 사라지려 했다. 천천히. 내가 뭔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몰라. 오해인지도. 남편은 항상 하던 패턴대로 온도를 맞춰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서 몸을 풀고 새하얀 욕실 가운을 입은 채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가벼운 키스를 하고는 사각거리는 이불속에 파묻혀 잤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날 아침, 나는 여느 때처럼 침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다른 날과 다른 아침이었고 다혜와 다영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 기고했다. 그래서 포르말린 냄새를 없애려고 열러 둔 창문 너머 회색 건물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남편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문자였다. 방 안의 남은 포르말린 냄새가 내 주변을 돌며 바람을 타고 나가고 있었다. 마취가 깨는 느낌이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화장대 위 남편의 핸드폰을 들었다. 한줄기 바람이 방 안을 휘감아 돌았다. 온몸이 소스라치게 한기가 들었다. 천천히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자기 차 안에 귀걸이 한쪽 떨어진 거 같아! 얼른 와. 사랑해.  나는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깨 버릴 것만 같았다. 저렇게 평온하게 자는 남편이 제발 깨어나지 않았으면. 그냥 이대로 독한 포르말린에 취해 마취가 풀리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으면. 내 가정이 이대로 영원히 유지되기를. 가슴에서 독한 쇠 소리가 들린다. 저대로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그러면 영원히 이 모든 것이 묻어지겠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살기를 느꼈다. 내 온몸을 타고 도는 그 잔인하리만큼 뜨거운 무엇. 머리로 뜨거운 피가 몰리고 발바닥 끝세포까지 싸늘해지는 그 느낌. 나는 어느새 옆에 놓인 베개를 집어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천천히 고여 들었다. 분노와 배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계속 떨리는 양손으로 베개를 잡고 바들바들 떨면서 남편 얼굴 쪽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남편은 입가에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자고 있었다. 내 입술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베개가 천천히 남편의 얼굴을 덮는 순간.  음.  남편의 두 팔이 베개와 나를 동시에 안고 옆으로 넘어진다.  남편은 나와 베개를 안은 채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진아... 진아....  내 두 눈에 온몸의 피가 몰리는 것 같다. 동공이 터질 것 같이 아린다. 남편이 웅얼거리며 한 손으로 내 가슴을 만져댄다. 순간, 남편의 손이 바로 멈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뜬다. 베개너머 내게 뻗은 남편의 손이 천천히 내려간다.  여... 보.  눈알이 빠져 버릴 것 같다. 두 눈이 화끈거리고 통증이 점점 강해진다.  터질 것 같다. 남편은 시뻘겋게 충혈된 채 눈물이 그렁거리는 내 두 눈을 베개 너머로 천천히 응시했다. 서서히 남편의 얼굴은 하얗게 질러갔다. 내 몸에서 팔을 걷어 가려는 순간, 나는 악착같이 남편의 팔을 움켜잡았다.  가만히 눈 감아요. 자요.  여보.  쉿, 조용히. 꿈이길 바라요. 꿈꾸고 일어나 그래도 현실이거든... 솔직하게 말해줘요.  나는 방을 나왔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양손으로 눈을 움켜쥐었다. 통증이 너무 심하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물체가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시력이 아주 좋은데, 왜 이럴까. 눈이, 눈이. 현관을 걸어 나오는데 하얀빛이 수 천 개 아른거린다. 저 멀리 하얀 무언가가 다가온다. 무언가.  끼-익.  힘이 없다.  


  그날 이후, 나는 일주일 동안 남편의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시력 저하. 무조건 안정을 취하지 않으면 실명 위기까지 간다고 의사가 겁을 잔뜩 주었다. 철환은 초췌한 표정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병실을 찾아왔다. 내가 병실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여느 때와 달리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다영은 내 옆에서 잤다. 다혜도 야간자율학습을 빼고 바로 병원으로 왔다. 어느 늦은 저녁, 감기 기운에 약을 먹고 잠이 든 다영 옆에서 다혜가 울면서 임신 사실을 말했다. 나는 그저 다혜 얼굴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때, 남편이 놀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나는 다혜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남편은 얼굴에 분노와 당황을 감추지 않았다.     

  아마 기억하기에 그날 밤이 남편 얼굴을 본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병실에서 잠든 사이, 남편과 나는 로비에 앉아 있었다. 남편은 아직도 분노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당신이 만든 가정이 이거야?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는 영양실조에 바이올린만 보면 구역질을 하고, 하나는 미혼모가 되어 있고. 흐흐. 결국 이런 거였어.  나는 낮고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 몰래 몇 년간 바람을 피웠고. 그것도 모르는 천치바보 아내는 밤낮 요리를 해서 식탁만 차려댔고.  난 지금 아이들 얘기하는 거야!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게 화가 나요? 흐흐. 진아한테 가서 달래 달라고 해요. 괜히 나한테 화내지 말고. 우린. 앞으로 우리끼리 잘 지낼 테니까. 옷가지는 퀵으로 보내죠. 세탁물도 퀵으로 보내줘요. 당신이 깬 가정, 난 지킬 거니까.  다혜는? 어쩔 거야?  내 목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당신, 자격 없어. 내가 알아서 해!  그날 밤이 남편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 후, 퀵서비스만 오갈 뿐 서로 문자나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퇴원 후, 가사도우미를 내보냈다. 이 집 저 집 다니는 사람들이라 쓸데없는 소문 나가는 것 자체가 싫었다. 당분간 내가 집안일을 할 생각이었다. 입도 무겁고 신뢰가 가는 누군가를 들이기 전까지. 잠을 뒤척이다 문득 서영이 생각이 났다. 의지할 친구가 절실한 탓이었다. 다혜 공부를 봐줄 사람도 필요했다. 그리고 다영이를 잡아줄 사람도. 엄마가 아닌 그 누군가가. 다행히 서영의 승낙을 쉽게 얻었고 집안일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친 이모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며 이모,라고 부르게 했다. 아이들은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엄마, 아빤 병원에만 있어요?  어느 날, 문득 다영이 물었다. 다혜는 내 눈치를 보았다.  응, 당분간 수술이 밀려 못 오시나 봐. 옷가지만 보내고.  내 콩쿠르에는 오시겠죠?  오랜만에 듣는 다영의 맑은 목소리다.  다영은 얼마 전부터 내년 콩쿠르 준비 때문에 다시 늦은 밤까지 맹연습 중이다. 지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또 쓰러지지나 않을까, 또 몰래 담배를 피우지나 않을까. 그래도 서영이 집을 지켜 주어서인지 마음이 든든했다. 서영은 가끔 주말이면 둘째 아들 태양을 집에 데려왔다. 태양이와 토요일마다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을 했다고 한다. 첫째 아들 우주가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고부터 태양과 그런 시간을 일부러 가진다고 한다. 참 부러웠다. 서영은 학교 때나 지금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흔들림 없이 정말 지혜롭게 사는 것 같다. 태양이 가끔 오면 다영은 은근히 좋은 눈치다. 같은 나이기도 하고 친구가 생겨 좋기도 한 모양이다. 태양은 다영의 바이올린 연주를 정말 신기한 듯 쳐다봤다. 마치 마술사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처음 남편이 집을 나간 후, 근 한 달을 저녁마다 만찬요리를 준비했다. 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거나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요리라도 쉬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이들도 거의 건성으로 먹고 말았다. 매번 버려졌다. 서영은 아무 말 없이 요리들을 비닐 랩에 쌌다.  가는 길에 버릴게.  서영은 그 요리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갔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서영도 모르는 척했다. 내가 음식들을 버리고 다음 날 또 진수성찬을 차리고 또 버리기를 반복한다는 것을 서영은 알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랩에 싸서 나갔다. 


  한 달 즈음 지난 어느 날, 해물 요리를 차려 한 상 가득 채워 두었다. 다혜는 심한 입덧으로 누워 있었고 다영은 연습으로 늦었다. 서영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술, 한잔 할까?  술?  내 인생에서 참으로 낯설고 어설픈 단어였다. 술. 학교 때는 억지로 술을 권하는 선배들이 싫어서 피했고 결혼 후에는 더욱더 마실 일이 없었다. 술. 서영은 술을 참 맛나게 먹었었지.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학교 앞 막걸리 집 한 귀퉁이에 풍경의 일부가 되어 앉아있었다. 혼자인 날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항상 같이 있었다. 그래서 애써 아는 척을 한 적은 없었다. 서영은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은 없었다. 사람과 함께 마셨고 사람과 같이 취했다. 그런 서영의 모습이 늘 부러웠다. 


  늦은 저녁, 오래전에 사다 놓은 와인을 꺼냈다. 식탁이 그럴 싸했다. 나는 장식용 촛대에 불을 붙였다.  와. 살다 보니 이런 호사스러운 술도 먹는구나.  서영은 감탄했다. 프랑스산 레드 와인. 잔을 마주하고 한 모금 입에 댔다. 쌉싸름했다. 그들 표현으로 시큼 털털이 이런 것일까. 그래. 정말로 시큼털털했다. 서영은 나쁘지 않다는 듯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요리를 맛보았다. 둘이서 차린 식탁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용민 선배는. 잘 지내시지.  서영은 말없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이거, 정말 맛있다!  또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학교 때, 민 세희라고 기억나니?  민-세-희?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불문과. 전용 기사가 벤츠로 등하교시켜주던.  아! 세희.  기억의 그늘을 뚫고 백열등 전구 켜지듯 깜빡깜빡하더니 활짝 떠올랐다. 거침없고 도도하고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인 양 굴던 그 세희. 어머니가 항상 친하게 지내라고 하시던. 그런데도 어쩐지 가까이하기 싫었던 그 아이. 서영은 또 천천히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눈가에 그늘이 스친다. 세희. 점점 기억이 선명하게 한 토막 한 토막 떠오른다. 장안에 세희네와 사돈을 맺으려고 중매가 줄을 선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언제나 세희가 거절했다. 내 기억으로 용민 선배를 따라다녔던 것 같다. 맞다. 막걸릿집 주변을 어울리지 않게 서성이던 모습, 법대 건물 근처에서 배회하던 모습, 삼 학년 즈음부터 버스를 타고 다니던 그녀. 용민 선배가 법정에서 재판받을 때, 구치소에 있을 때 서영이만큼 자주 보였던 그녀. 왜 그걸 이제야 기억해 낼까.  응. 세희가... 왜?  세희가, 우주아빠, 선배... 좋아한 거 알지?  으-음.  우리, 이혼했다!  서영의 입가 한쪽이 슬쩍 올라간다. 애써 웃는다. 이혼? 이혼...  결혼해 영국 살다 이혼하고 들어왔대. 우주아빠가 지방에서 힘들어하는 동안, 만났나 보더라. 덕분에 막일 말고 반듯한 직장도 구하고. 빚도 다 갚고. 흐흐. 이혼하면서 위자료 명목으로 작은 아파트도 하나 생겼지. 이제 이사 안 가도 되고. 애들 교육비도 매달 통장에 딱딱 꽂히고.  다시 와인을 들이켠다.  채연아. 나 요새 살만하다. 돈 걱정 빚 걱정 덜고 이렇게 살게 될 줄은...  말문이 막혔다.  얼마나 됐니?  몇 달 됐지. 우주 미국 가고 바로 정리했으니까.  괜찮니?  첨엔 배신감에 미치겠더라.  배신감. 그 분노. 더러운 그 느낌. 내 성을 무너뜨린 상대에 대한 분노.  그 사람... 평생 이렇게 살 자신 없다더라. 그 말에 내가 졌어.  선배는 절대 변할 사람 아닌 줄 알았는데.  흐흐, 채연아. 돈과 생활이 사람을 변하게도 해. 덕분에 나도 조금 나아졌잖아.  갑자기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당황했다. 그 당황을 감추려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점점이 아려온다. 아리다. 쓰리다. 서서히 가슴이 뻐근해진다.  나도 하나 물어도 돼?  서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희, 별거 중이니?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서영아, 난 이렇게 살면 잘 사는 줄 알았어.  나는 거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매일 멋진 요리를 정성껏 하고 아이들 하나하나 신경 써 주고 남편 뒷바라지 하고. 이렇게 예쁘게. 잘 빚은 도자기처럼 살면 정말 멋진 인생이 될 줄 알았어.  서영은 내게서 시선을 멈췄다. 눈빛이 깊었다.  어느 날, 돌아보니 남편은 젊은 간호사와 바람이 나 있고 공부밖에 모른다고 생각한 다혜는 임신을 해 있고 바이올린만 끌어안고 살던 다영이는 스트레스로 쓰러지고 담배도 피우고... 사실 모두 엉망이었어.  서영은 침묵했다.  내가 밤낮 차려대던 식탁, 다 허영이었지. 포장, 위안, 우리 집만 안전할 거라는 위선.  서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난 돈 때문에 남편을 뺏겼고 너는 그 돈 덕분에 남편을 잃었구나. 흐흐. 처음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나도 웃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집안 구석구석 남편 물건 보면 소름이 돋아. 불끈불끈 화가 치밀고. 돌아올 거야. 바람이잖아.  나는 갑자기 발끈했다.  깨진 그릇이야.  서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영 아빤 시간 지나면 후회할 거야.  내가 안 되겠어.  난 찾고 싶어도 찾을 수조차 없다!  서영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찾고 싶어도 찾을 수도 없는 사람. 용서를 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도 절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 가슴이 미어진다. 이런 것이 미어지는 것이구나. 마른땅 갈라지듯이, 가슴 구석구석 미어진다. 서영과 나는, 밤이 깊도록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콜택시를 불러 서영을 태워 보내고 태양이에게 연락을 했다. 태양은 의젓했다. 애써 더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듯.     


  와인이 과했던지 몸이 무거웠던 다음 날 아침, 다영을 등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한 달 만이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한다. 나는 서영에게 다혜를 부탁했다. 옷장에서 가장 원색적이고 짧은 원피스를 꺼냈다. 그리고 헤어 숍을 향했다. 드라이를 하고 손톱도 다듬었다. 메이크업도 했다. 센스 있는 원장은 내 의상을 보고는 조금은 은은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메이크업을 해 준다. 만족이다. 이 정도면 절대 기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떨고 있었다. 예쁘게 보이고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를 쓰고 필사적으로 한 화장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모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눈빛이 물에 젖어 있다. 촉촉하게. 


  남편은 한 달 사이, 수염도 덥수룩하고 첫 단추가 풀어져 있었다. 통쾌했다. 아마 남편이 집에서보다 더 깔끔하게 나타났더라면 또 분노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단정한 내 모습에 남편은 순간 움찔했다. 그런데 또 다른 감정이 치솟았다. 화가 났다. 도대체 진아는 무얼 하길래 내 남편을 저렇게 방치해 두나. 남의 것을 훔쳤으면 반듯하게 해야지. 도대체... 이중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다혜는... 어쩔 셈이야?  그것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거예요?.... 그래, 그럼. 우리 얘기부터 하지. 당신, 죽었다 깨도 나 용서 못할 사람이니까. 이혼하지.  남편은 물컵을 덥석 잡았다.  용서는 절대 못해요. 이혼도 못해요.  남편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다혜, 아이 지울 수 없어요. 낳고 당신과 내 아이로, 우리 늦둥이로 올릴 거예요.  남편은 당황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 낳고 나면 다혜, 미국 오빠네로 보낼 거예요. 다혜도 그렇게 한다고 했고. 거기서 다시 공부 시작할 거예요. 그래서 당신과 나, 이혼은 아기 낳은 후에 해요. 그때까지 기다려줘요.  남편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그 아이를... 당신과 내 자식으로 올린다고?  그 나이에, 할아버지보다는 아빠가 더 낫지 않나요?  당신... 정말 냉철하군.  그렇게 돼 버렸어요.  남편은 더욱 얼굴이 창백해졌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 손이 점점 떨려왔다.  혹시... 진아... 임신했어요?  남편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양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두 손을 애써 맞잡으려고 테이블보를 잡으며 애써 보았다. 잡은 테이블보만 진동을 했다. 온몸이 떨렸다. 하루 이틀에 만난 사이들이 아닌데,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분노에 몸이 떨린다.  당신 아이, 지켜요. 난 우리 다혜 아이 끝까지 지킬 테니까.  테이블에서 간신히 일어났다. 온몸에 힘을 준 채 천천히 홀을 빠져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용서를 하고 싶어도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서영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서영의 집 베란다 정원은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다. 여느 부잣집 장식용 화단이 아니라 마치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 같다. 이 집에 드나든 지 계절 세 번을 지났는데 철마다 다른 느낌으로 정원이 이루어졌다. 늦은 겨울에 지쳐가는 요즈음, 햇빛 좋은 자리의 난이 봉오리를 맺고 있다. 채연이 아끼는 대 여섯 개의 난 화분. 그것들이 꽃을 피우려나보다. 난 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내가 하도 신기해하니 채연은 화분 하나를 선물로 준다. 나는 거절했다.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보는 것이지 훔치거나 가진다고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벌써 알아버린 탓이다.      


  그는 가끔 아이들과 연락을 하고 지낸다. 태양이와는 한 달에 한 번 정해둔 날짜에 만난다. 우주는 통화를 하거나 메일로 주고받고 한다. 그것은 나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나는 일 년 가까이 우주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는 벌써 두 번이나 봤다. 미국 출장이 있으면 어김없이 우주를 보고 온다. 가끔 태양의 손에 쇼핑백을 들려 보내곤 한다. 먹을거리다. 나는 절대 그를 보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으로는 최선의 예의인 것 같았다. 태양이는 성적이 많이 올랐다. 원하는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고 졸업 후 형이 있는 미국에 갈 계획이었다. 아이들과 그는 잘 되었다. 참. 태양이까지 몇 년 후 떠나고 나면 그땐 정말 더 외로울 것 같다. 그래 봤자 사십 대 중 후반. 이 어정쩡한 나이에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내야 하는 걸까. 나머지 삼사 십 년을 혼자 무얼 하며 어찌 지내야 하는 것인가.     


  채연네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다영의 콩쿠르 대회가 있는 날이다. 이 대회에서 입선 여부에 따라 고등학교 진학도 좌우된다고 했다. 다영이 늘 무대에서 실력 발휘를 다 못해서 채연이 걱정을 해 왔다. 다영은 연주복 하나하나 점검했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나는 채연이 끓인 따뜻한 시금치수프를 들고 다영의 방에 들어갔다. 다영은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고 있었다.  이모. 나, 또 실수하면 어쩌죠?  나는 수프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실수를 안 하면 인간미가 없어서 보기 싫어.  다영은 피식 웃었다.  태양이 오빠, 와요?  일박 이일로 어디 좀 갔어.  실망하는 눈치다. 지금쯤 태양이는 그와 겨울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전에도 가끔 했듯이.  대신 이모가 응원 열심히 할게.  다영은 미소를 짓는다. 며칠 사이 연습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다영이 아빠의 외도를 알게 된 날, 내게 안겨 오래 울었다. 그리고는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아빠가 후회할 멋진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라고. 아빠가 엄마와 딸들을 버린 후회를 하게 만들 거라고. 작은 아이가, 그 작은 가슴에, 얼마나 섬뜩하던지. 아마 다영이 방에서 담배 냄새가 사라진 것이 그즈음일 것이다. 밤마다 채연이 챙겨주는 비타민과 영양제도 꼭꼭 챙겨 먹었다. 다영은 책상 앞에 앉아 수프를 후루룩 마셨다. 옆선이 참 고운 아이다. 오래전 채연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서양 인형 같은 후배, 하던 그 채연의 모습.      


  오전, 채연은 리허설 준비로 다영과 레슨 선생님을 대회장에 데려다주러 나갔다. 다혜는 음악을 틀어놓고 자기 방에 있었다. 나는 집안 정리를 하고 정원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그때, 다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물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호스에서 나오는 쏴- 하는 소리를 음악처럼 듣고 이리저리 골고루 물을 뿌리고 있는데 자꾸 불협화음이 귓가를 스쳤다. 순간, 이상해서 돌아보니 다혜가 벽을 짚고 복도를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호스를 떨어뜨린 채 달려갔다. 그때, 채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혜는 진통을 호소했다. 벌써 배가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다혜는 거실에서 한 발짝도 더 움직이지 못했다. 진통이 왔다. 아주 빠르게. 채연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일단 119를 불렀다. 산모가 진통이 심하게 와서 당장이라도 낳을 것 같다고. 채연은 안방으로 달려가 깨끗한 이불들을 가지고 나왔다. 잠깐 진통이 멈출 때 다혜를 그 위에 눕혔다. 그리고 집에 있는 알코올과 솜, 소독 가위 등을 가지고 나왔다.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최대한 깨끗한 커다란 냄비에 정수기 물을 가득 붙고 끓였다. 다른 냄비에 정수기 물을 부어 가라앉혔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서로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다혜가 점점 배가 불러와 출산이 임박해지면서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도 모른다. 채연은 다혜와 사귀어 임신하게 만든 반 남자아이나 부모에게 절대 알리지 않았다. 진료도 비싼 왕진료를 지불하면서 집으로 오게 했다. 남자아이는 다혜가 휴학을 하면서 아이를 지운 줄로만 알고 있다. 그리고 양쪽 부모들이 아이들의 소통을 차단했다. 특히 그쪽 부모가. 다혜는 열일곱에 너무 많은 일을 겪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 열일곱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봄이 되면 열여덟. 이 늦은 겨울만 지나면. 다혜의 진통은 더 심해져 갔다.  숨 쉬어. 천천히. 소리 지르면 태아가 산소 부족이 돼. 천천히.  채연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혜의 손을 잡고 같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했다. 다혜는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119에서 온 여자 간호사가  달려 들어왔다. 유니폼으로 가린 몸은 왜소하고 다부졌다. 그녀는 재빨리 다혜의 치마를 걷고 아래를 내진했다.  90% 이상 진행했어요. 이대로 병원 못 가요.  그때 다른 남자 대원들이 들어서려고 했다. 나는 앞에서 그들의 시선을 가리고 있었다.  들어오지 마요!  그녀는 냉혹하리만치 날카롭게 외쳤다.  이 환자, 지금 우송 못해요. 곧 낳겠어요. 김샘 좀 올려 보내주고, 다른 대원들은 대기해 주세요. 낳고 나면 바로 병원 이송입니다.  대원들은 그녀가 마치 대장이라도 되는 듯이 바로 뒤돌아 내려갔다. 문도 닫아주었다. 곧 김샘이라는 여자 대원이 올라왔다. 그녀들은 익숙한 솜씨로 커다란 소독가제를 다혜 가슴 위에 올렸다. 그리고 처음 들어왔던 그녀가 다혜 다리 아래에서 밑을 보고 있었다.  곧 나오겠는데.  김샘과 채연이 다혜의 양쪽에서 손을 꼭 잡아주고 있다. 나는 그녀 뒤에 마치 조수처럼 서 있었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실제로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본 적은 처음이다. 순간, 아래의 여린 살가죽이 극도로 쫘악 벌려지면서 커다랗고 검은 뭔가가 쑤욱 보였다. 김샘은 양손으로 살짝 받치면서 능숙하게 잡아 부드럽게 돌리고 동시에 맑은 물이 쏟아지면서 함께 불쑥 생명체가 다혜 몸을 빠져나왔다. 내 두 눈에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너무 경이로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경스러움에 그만 맑은 눈물만 나왔다. 그녀는 재빠르게 다혜 가슴 위로 아기를 올리고는 커다랗고 굵은 탯줄을 소독용 가위로 처리했다. 김샘은 다혜의 맥박과 상태를 체크했다. 기진맥진한 다혜는 지쳐 보였다. 의식은 몽롱한 상태였다. 채연은 양손을 움켜 얼굴을 감싸며 울기 시작했다.  고마워. 고맙다. 다혜, 고마워.  다혜는 억지로 눈을 뜨면서 가슴 위의 아기를 올려다보았다. 다혜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튼튼한 아들이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탯줄 소독과 정리를 한 다음, 소독한 대야에 아기를 씻기고는 미리 준비한 간단한 베내 옷을 입혀 포대기에 쌌다.  대원들 들 것 가지고 들어오라 하지.  김샘은 재빠르게 뛰어나갔다. 그녀는 다혜의 아래를 옆에 있는 이불로 단단히 감싸주었다.  보호자가 어느 분이세요?  그녀는 채연과 나를 번갈아 본다. 채연이 나선다.  같이 가셔야 하니 지갑, 신분증만 빨리 챙기세요.  채연은 얼굴을 닦으며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대원들이 들어와 다혜를 들 것에 조심스럽게 실었다. 다혜가 떨고 있었다.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진 모양이다. 채연이 뛰어나오자 그녀는 아기를 채연에게 건넨다. 채연은 아기를 보면서 울먹인다.  산모가 자꾸 체온이 떨어집니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그녀는 단호했다. 다들 신속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낮이라 엘리베이터에 아무도 없었다. 경비실에도 ‘순찰 중’이라는 팻말만 서 있고 아무도 없다. 일반 서민 아파트면 이 정도 소란에 온 주민들이 다 나오고 난리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구급차가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혜와 아기가 남긴 잔여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선 붉은 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 채연의 막내아들, 셋째가 될 것이다. 어차피 삶과 진실은 한데 엉켜 붙어 가는 것이다. 때로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또 어떤 것이 생활인지조차 구분 못할 만큼. 애써 상채기내며 분리시켜 본들 피만 철철 흘릴 뿐이다. 이대로 엉켜 살아내는 것이지. 


  채연의 목소리는 몇 음절 올라가 있었다. 기분 좋은 흥분이라고 할까. 다혜는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와 영양제 맞고 자고 있다고 했다. 아기는 너무도 건강한 삼 점 오 킬로그램. 예정일보다 일주일 빨리 태어났지만 건강하다고 한다. 채연은 다영의 콩쿠르를 내게 부탁했다. 다혜가 언제 깰지 몰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고. 나는 채연이 일러 준 장소로 향했다.      


  아트홀 대극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대기실로 향했다. 다영은 천사 날개 같은 무대복을 입고 바이올린을 꼭 껴안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다영은 나를 보고는 두리번거렸다.  엄마랑 언니는요?  나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다영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다영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마치 봄꽃 같은 아이. 가느다란 흰 손가락이 바이올린 활을 움켜쥔 채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가녀리고 작은 새 한 마리를 혼자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 같은 심정. 나도 따라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참가자 몇 명이 연주를 마치고 무대 뒤로 들어갔다. 이번에 다영이 차례다. 심장이 떨렸다. 다영이 천천히 무대 한가운데로 나타났다.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온몸이 얼어붙어 보였다. 무대 앞에 일렬로 늘어앉은 심사 위원들은 다영이 얼굴만 일제히 주시했다. 드레스가 파르르 떨렸다. 채연의 말대로 무대 공포를 떨쳐내야 하는데. 한 팔을 들어 멋지게 활을 뽑았다. 천사의 군대처럼. 음악을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다영의 곡은 다소 난도가 높았다. 처음부터 아주 빠르게 시작되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뒤에서 본 심사 위원들은 모두 고개를 든 채 다영의 손과 팔에만 집중했다. 작고 가녀린 다영의 온몸이 바이올린 활시위에 따라 물결치며 울렁이기 시작했다. 아이보리색 벨벳 드레스가 우아하게 출렁거렸다. 가녀린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가 음악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멈춘 듯했다. 이 터질 듯 한 고요. 숨 막히는 집중. 바이올린 선율은 쉴 새 없이 홀 안의 모든 공간을 재빠르게 훑어지나 갔다. 이제 조금 느린 템포. 다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말 아름다운 자태이다. 아기 때부터 작은 바이올린을 안고 잠이 들었다는 아이. 걸음마보다 바이올린 활을 먼저 켰다는 아이. 글자보다 악보를 먼저 읽었다는 그 아이. 다시 빠른 템포. 처음보다 더 격렬하게 더 열정적으로 활을 켜는 다영.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이 황홀한 감정. 절정을 향하는 터질 듯한 희열. 점점 빨라지는 템포.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투투-툭- 텡.  바이올린 줄이 톽-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다영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심사위원 몇몇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무대 뒤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다영은 무대에 쓰러졌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몇몇은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영이 무대 뒤로 들어갔다. 나는 대기실로 달려갔다. 다영은 머리를 감싸 쥐고 울고 있었다. 가느다란 흰 팔목에 선혈 안 줄기 그어져 있다. 나는 달려가 구급약 상자를 받아왔다. 그리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 다영은 온통 마스카라가 번진 채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나는 가만히 다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거칠고 딱딱한 손끝마디. 굳은살이 박일 데로 박혀 더 이상 감각이 없다는 왼 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렇게 열심히 모든 것을 바쳐 살아내는데도 가고자 하는 길에는 언제나 넘을 것들이 많은 것인가. 평생을 이렇게 넘어가고 쓰러지고 다쳐가며 살아내야 하는가. 나는 다영의 굳은 손마디를 매만지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계속 흘렸다. 다영은 울먹이며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채연의 아파트 베란다 정원에 봄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 사이 난 꽃이 고개를 들어 향이 온 집안을 감싸고돈다. 햇살이 따뜻하게 부서져 들어온다. 거실 한복판에 커다란 목욕통이 있고 그 옆 깨끗한 면포 위에서 아기가 방긋 웃으며 있다. 서영은 미소를 지으며 아기에게 말을 걸면서 여기저기 살살 닦아주고 있다. 아기의 피부가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난다. 복도 끝으로 바이올린 소리, 다영과 태양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다혜가 신이 난 듯 우유병을 흔들며 부엌에서 걸어 나온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문 열리는 소리.  막둥아!  채연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맑은 웃음소리. 아기의 까르르 웃는 소리. 그들의 높은 후음. 사이사이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선율.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삶의 한 폭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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