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오전 - 프라다를 입다
덥다. 늦여름 더위가 고막을 째듯 온 신경을 아프게 뒤흔드는 매미소리를 타고 반 지하 마흔 평 남짓한 사무실 안으로 후- 후- 입김을 불어 재끼며 성큼성큼 뛰어들었다. 무진장 덥다. 안쪽 가장 깊은 곳, 다섯 평 남짓의 방에 틀어박혀 더운 열기가 연신 풀풀 품어 나는 컴퓨터를 앞에 두고 나는 오전 내내 시름을 하고 있었다. 털털거리는 선풍기에서는 낡다 못해 늙어버린 바람 빠진 바람이 방 안의 조금이나마 찬 공기마저 다 빨아들여 더운 바람으로 돌려 품는 듯했다. 머릿속 신경 세포가 하나하나 곧추서는 듯 말려들었다. 그즈음, 나는 완전히 더위에 비몽사몽 헤매며 얼른 일과를 끝내고 작고 평화로운 내 안식처로 들어갈 것만을 간절히 빌고 있었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비싸지 않은 적당한 가격의 프랑스 와인 한 병을 사고 수제 치즈 한 덩이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골라서 그가 좋아하는 비프스테이크 만들 재료들을 손수 하나하나 고르면서 고기는 두툼하게 썰어달라고 나지막하게 말하고 양상추와 파슬리는 싱싱한 유기농으로 사서 이층 매장을 돌아 향이 좋고 색이 예쁜 새 양초 몇 자루를 골라 담고는 계산대에 천천히 그것들을 올려놓는 거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층을 돌아 꽃가게에서 장미 두어 송이를 사면되는 거지. 그 모든 재료들을 내 집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어 클래식을 들으며 작은 욕조에 따뜻한 목욕물을 틀어서 장미향 오일을 뿌리고 장미 꽃잎 몇 장을 흩뿌리고는 멋지게 요리를 시작하는 거야. 그 순간부터 내 두뇌는 편안함과 안식을 찾으며 그 모든 상황을 음미하는 거지. 그리고 모든 요리가 끝나고 식탁이 차려져 양초에 불이 켜질 즈음, 어김없이 그는 퇴근길에 초인종을 급하게 누르겠지. 음-
순간, 갑자기 요란스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뭔가 모를 불길함에 나도 모르게 한참 전화기를 째려보다시피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
“00 장애인복지협회 사무국장 하 유 미입니다.”
도청 사회복지과 담당 박 과장이다. 니코틴이 쩍쩍 들러붙는 듯한 컬컬함이 온 수화기로 터져 나왔다.
“하 국장, 지난번 그... 그... 장애인 부모들 대상 교양 강좐가... 뭔가... 올린 거 있었지요?”
“아, 네.”
“사업계획서 추경에 예산 잡혔소! 바로 집행할 수 있으니 내일 오전 중으로 지난번 자료... 올려 주시죠!”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중복되는 사업이 많아서 안 되겠다던 프로그램이, 갑자기 웬 추경으로까지 잡아주며 이렇게 야단이란 말인가. 박 과장의 느물거리는 눈웃음과 넓적하고 두툼한 입술이 갑자기 떠올랐다. 미간이 찡그려진다.
“아.... 네!”
“강사들 올린 자료 그대로 하면 되죠?”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뇨, 아뇨. 일단 과장님. 강사님들께 연락을 취해보고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혹시라도 강사가 바뀌면, 오후 중으로 바뀐 강사 올려주시고 계약서 다 쓰셔야 하는 거 알죠?”
아득히 먼 곳으로 밀어버리는 느낌이다.
박 과장의 비위 따위 신경 쓸 경황도 없이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뛰어나가 임 팀장을 찾았다. 직원이라고는 사무국장인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인데, 그 나머지 셋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없다. 텅 비어 있다. 갑자기 신경이 극도로 팽팽해지면서 뒷덜미가 빳빳해왔다. 근무 시간에 도대체 어딜 다 갔단 말인가. 임 팀장 책상 위 서류들을 뒤지다가 강사명단을 찾아서 다시 허둥지둥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임 팀장이 호탕하게 웃어대면서 문을 열고 들어서고, 그 뒤로 나머지 직원들도 웃음을 온 입가에 흘리며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가다 흘깃 그들을 쳐다봤다. 순간, 다들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임 팀장, 잠깐 봐요!”
뒤에서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로 돌아와 긴 한숨을 내쉬고 명단을 펼쳤다. 임 팀장이 허둥지둥 들어왔다.
“도에서 담당 과장 전화가 왔는데, 지난번 사업계획서 올렸다가 반려된 거... 장애 부모 대상 교양 강좌 건......”
심각하게 듣고 있다.
“추경에 예산 잡혔다고 내일까지 강사 계약서 올리랍니다!”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임 팀장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일부러, 강사 명단 서류를 임 팀장 코앞에 들이댔다.
“지금 바로, 여기 적힌 강사들 다 전화하고 하반기 수업 일정 체크해요! 오늘 안으로 무조건 계약서 도장 다 찍어야 해, 서둘러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듯 서류를 급하게 받더니 반사적으로 목례를 하고 뛰어나간다. 못해도 강사 절반은 펑크가 날 것이 뻔했다. 지금까지 두 손 놓고 다른 스케줄 잡지 않을 인사들은 그 명단에 아무도 없었다. 더운 바람이 푹- 푹- 터져 나온다. 그때, 책상 모서리 끝에 올려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을 울렸다. 문자 수신이다.
‘자금 결재가 갑자기 펑크 나서... 내일 정오까지 오백 정도 구할 수 없을까.”
그의 문자다. 또 자금 조달이 막혔나 보다. 돌려 막기를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근무시간에 문자로 보낸 거 보니 긴급 상황이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얼마인가. 허둥대며 뛰어 들어오는 임 팀장의 발소리에 언뜻 정신이 들었다. 컴퓨터 모니터 모서리의 디지털시계는 불과 일 이분 지났다. 그런데 어딘가 아득하게 머나먼 곳으로 갔다가 이제 막 도착한 사람 같은 고단함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전문 강사님들 네 분은.... 전부... 다른... 스케줄이..... 안 된다고... 합니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저-기, 국장님! 사업비는 당초대로 천만 원 정도인가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주저하는 듯한 어눌한 목소리와 어조로 임 팀장이 물었다. 발끈 화가 치밀며, 당연한 걸 왜 묻냐고, 모든 신경선을 팽팽하게 꽉 쪼여 날카롭게 비수를 한 방 날리고 통쾌하게 풀어 트리 고자 매섭게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아- 그거였다. 내일 중으로 천만 원이 들어오면 일단 그에게 오백 정도 쏘아주고 프로그램 진행하는 동안 맞춰 나가면 얼마든지 융통 가능하지 않은가. 미쳐 그 생각을 못했다. 임 팀장을 매섭게 쏘아보다가 그 시선 그대로 깊은 생각에 잠겨 버렸다. 임 팀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엉거주춤 서 있다.
그 찰나, 갑자기 뭔가 타 탁- 하더니 불처럼 뜨거운 것이 얼굴을 향해 확- 끼어들었다. 순간, 나는 왁- 하고 의자를 그대로 뒤로 밀어젖혔다. 선풍기 날개가 홱- 돌면서 공중으로 날아올라 책꽂이를 향해 곤두박질해서 산산조각이 났다. 임 팀장은 놀라 고함을 지른다. 벌린 양다리 사이로 고철 부품들이 툭- 떨어져 부서진다. 선풍기를 둘러싼 쇠 커버였다. 그런데, 볼을 타고 뭔가 뜨거운 것이 끈적거리며 흘러내리는 듯했다. 임 팀장은 또 한 번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밖의 직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휴지, 휴지!”
임 팀장은 급하게 뛰어나갔다. 더운 공기가 온 방 안을 뒤덮고 열탕 안에 김이 모락거리듯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몽롱함이 온몸을 덮쳐왔다. 두 눈이 가물거린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액체가 손 등에 똑- 떨어졌다.
피다.
오후 - 꿈꾸는 만찬
차에서 내리자, 아스팔트 위로 열기가 달아오른다. 구두 바닥이 지면에 닿는 순간 찜질방 안을 걷는 기분이다. 이마 위 반창고를 한 손으로 감싸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돈다. 피가 그렇게 많이 쏟아질 줄 미처 몰랐다. 겨우 다섯 바늘 기웠는데... 그 사이로 비 오듯 쏟아질 거라고는... 임 팀장이 차 시동을 끄고 얼른 뛰어와 사무실 출입문을 열어준다. 놀란 표정이 역력하다.
“제가 강사 섭외할 테니 들어가 좀 쉬세요!”
순간 화가 치민다. 순진함을 가장해서 상대를 위로하는 것 같은 말투, 그렇게 립 서비스를 후하게 해 놓고 뒤에 가서 강 회장에게 국장님은 이런 점이 좋은데 이런 점이 참 어렵다는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하는 대한민국 삼십 대 초반 청년이지 않는가. 그래도 아직까지 긴장한 표정이 가시지 않은 걸로 봐서 어지간히 놀라고 그나마 최근에 한 말 중에는 가장 진정성이 담긴 말이기는 하다. 둘둘만 화장지 가득 시뻘건 피가 묻어나고 내 이마를 누른 임 팀장 손에 피가 물들었으니.
“어지럽군. 일단 강사 명단 줄 테니 전화 걸어보세요.”
임 팀장은 최대한 애처롭고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부축하며 의자에 앉히고는 명단 서류철을 들고 자리로 갔다. 의자 깊숙이 온몸을 묻고 두 눈을 감았다. 눈 주위로 전기가 돈다. 어지럽다. 빙글거리는 느낌.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달팽이 모양 안경을 쓴 것 같은 어지러움에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손 끝 하나 꼼짝 못 하고 앉아 있다. 멀리서 임 팀장의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너머 다른 직원들의 컴퓨터 좌판 두드리는 소리, 사무실 선풍기 돌아가는 기계음, 선반에서 뭔가를 딸그락 거리는 소리... 아, 네, 원장님 일정을 좀... 부탁드립니다... 워낙 급해서..... 네- 그럼 하는 수 없죠................ 잘 지내시죠? 우리 회장님 항상 바쁘시죠... 일간 회장님 모시고 뵙지요............ 하하...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사무실로... 예! 작가님............. 국장님이 지금 좀 바쁘셔서.... 예, 예, 감사합니다... 나중에....................... 일간.......... 감사...... 정말..... 하하하하하................... 아이코.... 예...............
“국장님! 섭외 다 했습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스스로 만족해서 희열까지 가득 찬 표정으로 임 팀장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단 서류철을 내 코앞에 들이대며 섭외한 강사 이름에 분홍색 형광펜으로 뚜렷하게 색칠한 것을 보였다. 의기양양이다.
“제가 전화하니까 강사 분들이 죄다.... 제 얼굴을 기억하시고는.... 한 번에 오케이... 하시는 게...”
“임 팀장, 일 이렇게 잘하는지 미처 몰랐네. 앞으로는 임 팀장에게 일 다 맡기고 회장님 공식적 자리 가실 때 내가 동석해도 되겠어.”
순간, 임 팀장의 표정이 굳어진다. 짜릿한 쾌감이 내 뇌리를 휘감는다. 역시 나는 악마적인 기질이 더 강한가 보다. 나는 서류철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시 후, 고개를 쳐드니 임 팀장이 멍한 표정으로 아직 서 있다.
“일 봐요!”
마지못해 임 팀장이 굳은 표정으로 돌아선다. 이 자리가 탐이 나나 본데, 이런 법인 단체의 사무국장 자리에 올라 지금의 호봉까지 되는 데 걸린 시간과 노력과 인내를 어디 거저 가지겠단 말인가. 선배들이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밟아야 정상이지. 단체장에게 아부나 하고 잘 보인다고 호봉이 무빙워커를 타고 올라가 주지는 않는다, 절대. 제 두 발로 걸어서 한 계단 한 계단 밟아가야 정석이지. 후배들 기는 가끔은 한껏 올려주고 또 가끔은 사정없이 밟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선배 무서운 줄도 알고 세상 무서운 줄도 아는 법이다.
삐리리 삐리리리-
“00 장애인복지협회 사무국장 하 유 미입니다.”
“국장님, 잘 지내셨어요?”
부드러운 감칠맛이 나는 이원장 목소리다. 여자인 내가 들어도 귀에 착착 감기는데 남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이런 솔- 음의 목소리를 배워야 하는데...
“네, 원장님 덕분에...”
“아까 팀장님에게 전화받았어요. 좀 갑작스럽기도 하고... 국장님께 다시 정확하게 들어보려고요.”
“그렇게 좀 됐습니다. 갑자기 강좌가 다시 개설되는 바람에... 다섯 시경에 사무실로 오시죠. 겸사겸사 오랜만에 얼굴도 뵙고... 더 이뻐지셨으면... 질투가 나서.. 이거..”
전화기 속에서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높은 도- 까지 올라간다. 웃음소리를 섞어가며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나니 귀가 먹먹하다.
뒤로, 몇 차례의 확인 전화가 왔고 다들 흔쾌히 오늘의 약속을 승낙했다. 잘 됐다. 몇 시간 후 강사 계약서 체결하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도청에 달려가 제출하면 점심때쯤에는 사업비가 나올 것이다. 그러면 오백 정도는 무리 없이 그에게 쏘아줄 수 있다. 잘 됐다. 정말.
얼마가 흘렀을까. 깊은 바닷속에 침잠한 작은 물고기가 된 느낌이다. 눈을 뜨는 순간, 울렁 허공에 물보라가 이는 것 같은 울렁증이 난다. 사무실 쪽에서 누군가의 말소리들이 들린다. 벽시계를 봤다. 다섯 시 정각.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 걸 보니 성 소장이다. 칼같이 정확한 사람이니까. 때마침 임 팀장이 고개만 쑥 내민다.
“성 소장님 오셨습니다!”
일어나려는데 성 소장이 안으로 들어선다. 카키색 정장 차림이다.
“아니, 이마를 다섯 바늘이나 꿰매었다면서요. 세상에!”
거북한 친절이다. 순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한국장 같은 커리어우먼이... 혼자 몸이 아닌 거 알죠? 할 일이 많은 사람이...”
그때, 멀리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온 사무실을 울려 퍼진다.
“다른 강사 분들도 다 오셨습니다.”
메마른 목소리로 임 팀장이 다시 확인을 시킨다. 성 소장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중함을 표하며 사무실 쪽으로 안내했다. 작은 키에 카키색 정장이 뒤에서 보니 마치 여군 같다. 역시나 훤칠한 키에 화사한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아슬아슬하게 입은 이원장이 바캉스 걸처럼 나타났고, 박 작가는 긴 생머리가 유난히 더워 보였다.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했는지 김 선생은 입술 색과 얼굴빛이 니코틴에 절어 있다. 다들 내 이마의 상처를 보고 립 서비스를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한다. 그러면 이 여새를 몰아 더 애처롭게 보이면서 강사 계약서를 받아내면 오히려 더 일이 쉬워질 터이다.
선풍기 두 대로 서른 대 여섯 평의 무더위를 다 감당하려니 아까보다 더 위협적인 기계음이 연신 들린다. 임 팀장과 직원들은 일찍 퇴근을 시키고 네 명의 강사와 나만 남았다. 퇴근 전 타 놓고 간 냉커피가 탁자 위에 동그란 성에를 만들고 있었고 강사 계약서들이 한 부씩 자리마다 올려져 있었다. 다들 계약서를 읽는데 열중해 있다. 어차피 계약서만 쓰고 나면 나도 곧 퇴근할 터이니 이 무더위에 오래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비비고 있을 이유는 딱히 없다. 이 강사들은 내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첫 부임지부터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니 마다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빨리 이 성가신 절차들을 끝내고 내 집으로 향하고 싶다, 장미향 가득한 목욕물, 그윽한 와인 향, 내 침대.......
“금요일은 어려워요!”
다소 높은 톤으로 읊조리는 이원장의 목소리가 사무실 천장을 한 번 치고 다시 내 심장에 와 박힌다.
“난 목요일이 딱인데. 지금까지 웬만하면 하 국장님과 목요일로 거의 잡았었는데...”
“네- 이번은 급하게 조율을 하다 보니..”
“가을부터 여성학 강의가 있어서 나도 화요일은 안 됩니다. 목요일만 비네요!”
다소 날카로우면서도 단호한 성소장의 어투다. 도대체 무슨 말들인가. 임 팀장 말로는 전화 통화로 다 요일이 정해졌다고 했는데...
“오후에 임 팀장과 대략 요일을 조율하신 걸로 압니다만.”
“임 팀장님이 요일은 와서 조율하자고 하신 걸로 기억해요!”
조심스러운 낮은 목소리로 박 작가가 말을 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놈... 김 선생도 담배를 입에 물고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한 마디 내던진다.
“나도 좀 부담스러운 요일이네요. 월요일이라...”
“제가 목요일에 정해졌지만... 저는 변경이 어려워요. 남편이 주말마다 가족과 지내기를 바라서... 금요일은 주말 준비에 늘 바쁘답니다!”
은근한 자랑이 깔린 나지막한 목소리다. 그 말을 하는 내내 박 작가의 눈가에 한 가닥 어둠이 내려앉았다. 스치듯 지나가는 그런... 그때, 발끈한 목소리로 이원장이 참견을 한다.
“다들 바쁘시겠지만 저는 우리 치료실 애들이랑 센터 애들 일정에 매인 몸이라... 하국장님이 그간은 이해를 해 주셔서 내내 목요일 프로그램 하고 지내왔는데... 안 된다면 저는 이번 강좌에서는 빠질 수밖에 없네요!”
얼굴이 갑자기 화끈해진다. 표정 관리가 벌써 몇 분 전부터 엉망이 되면서 심리적인 리듬과 신체적 리듬이 다 부서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성 소장이 흘깃 이 원장을 쏘아본다.
“그건 개인이 운영하는 거고, 나는 대학 강단에 서는 일이에요. 강의 변경이 더 어렵죠!”
순간 이 원장의 라면 모양 쇠 머리띠가 파르르 떨린다.
“강의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장애 아이들 아닌가요? 우리 센터나 치료실 아이들은 일반 대학생들보다 중요함이 덜할 이유나 명분은 절대 없다고 보는데요. 그 아이들은 더 분명한 나름의 질서가 있고 정해진 틀이 있어요. 그걸 내가 뭐라고 함부로 깹니까?”
분명 내게 아주 불리한 발언들인데 서로를 공격하는 말들에서 오는 이 통쾌함은 이 상쾌함은 과연 무엇일까. 호쾌하다.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
“정 어렵다면 제가 포기하는 수밖에요!”
비수를 꽂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성 소장이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아찔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심한 현기증과 구토가 갑자기 온몸을 헤집고 밀려든다.
“하이 참- 왜들 이러세요?”
애써 넉살 좋은 척을 하며 벽시계를 보니 거진 여섯 시가 다 되어간다. 오전에 피를 흘려서 그런지 아까부터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위산이 분비되는지 위벽이 쓰려오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다들 저 얼굴도 볼 겸 오셨는데... 일단 저녁이나 드시면서 나머지 이야기 하시지요.”
“시원한 냉면 먹고 싶다!”
갑자기 소녀 같은 표정으로 김 선생이 읊조린다. 다들 애써 싫지 않은 눈치였다. 나는 이때다 싶었다.
“근처 냉면 잘하는 중국집이 있는데, 가시죠!”
“중국집 냉면? 쪼금 그렇다!”
“혹시 냉면 면발이 자장 면발로 나오는 건 아니겠죠?”
박 작가의 이 엉뚱한 말 한마디에 다들 피식피식 웃는다. 세상에 이런 어이없는 농담에 웃다니. 나도 분위기 전환의 기회다 싶어 당나귀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저녁 - 찢어진 드레스에 감기다
에어컨이 홀 전체를 냉각시키고 있다. 시원하다. 이마의 상처가 에어컨 바람에 서늘해진다. 통증이 아까보다 훨씬 덜하다. 김 선생과 이 원장은 냉면을 맛난 표정으로 후루룩 거리며 먹어대고, 성 소장과 박 작가는 볶음밥을 그다지 맛나지 않는 표정으로 먹고 있다. 나는 그다지 입맛이 없어서 박 작가가 덜어주는 볶음밥 한 덩이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밥알들이 서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계약서 쓰고 내 집 욕실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고 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그들이 과연 맞는 것일까. 언제든 내가 강좌 요청하면 고마워하며 서슴없이 와 주던 그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그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는 사무국장이 되고 그들은 원장에 교수에 소장에 작가에 화가에... 다들 명함 하나씩을 더 파고 살아가지만 그들이 이제 막 자리를 틀고 시작할 때 서로 돕고 양보하지 않았던가. 다른 강의와 겹쳐도 내가 부탁하면 다른 강의를 빼서라도 와 주던 그들이 아니던가. 개별로 만나 부탁할 일이었다. 시간이 다급해 같이 만나게 한 내 불찰이다.
“오늘 우리 연구소에 칠십 노인이 찾아왔는데... 한평생 남편한테 맞고만 살았다 이거지. 그래, 그 남편이 며칠 전 죽고 장례 치르기 무섭게 달려온 거라. 남편 살아생전에는 무서워 고발을 못하고 이제 죽었으니 화병이라도 고치게 죽은 남편을 상대로 고소라도 하고 싶다고... 자식들은 아무도 모른다고...”
“세상에... 그건 부부가 아니라 지옥을 산거네.”
“난 생각이 조금 달라요. 여성의 최대 장점은 여성적 매력과 여성성이야. 보나 마나 그 노파 몰골은 꾀죄죄할 거고 얼굴에는 화장 한 번 안 한 거친 피부일걸.”
“이 원장 말대로 겉모습은 그랬지. 그렇다고 남자가 함부로 해도 된다는 법은 세상에 없어요.”
“그게 무식하고 아둔한 여자들 변명인 거죠. 이쁜 여자 마다하고 나긋나긋한 여자 때리는 남자 봤으면 나오라고 해요. 그 멋진 무기를 무슨 죄악처럼 생각하고 다들 아닌 척들을 하는지.”
성 소장은 얼굴이 욹그락 붉그락 변해 있다. 갈수록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이 원장의 아래위를 훑어댄다.
“그렇다고 여성임을 지나치게 드러내서 약한 척 무능한 척하는 것 자체가 모든 여성들에게 죄악임을 왜 모르는지..”
성 소장과 이 원장이 짧은 순간 서로를 쏘아본다.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입 안에 모래 한 줌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때 성 소장이 홀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사장님! 소주 한 병하고 짬뽕 국물 줘요!”
이 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때 애써 분위기를 바꿔 볼 양인지 박 작가가 말을 꺼낸다.
“이 원장님은 장애 아이들 교육도 하시고 시설도 운영하신다면서 어쩌면 다른 이미지세요? 보통 장애 시설 운영자들하고는 너무 다르세요. 음악을 해서 그런지...”
갑자기 함박 웃으며 좋아한다.
“내가 이쁘게 해 다니고 화사해야 우리 아이들이 더 밝지요. 그리고, 또 하나. 미인계라도 써야 관에서든 다른 단체장들이든 관심도 써 주고 보조금 신경도 더 써 주는 법이에요. 솔직히 보기 좋은 음식에 손이 가는 건 인지상정 아닌가.”
그 소리에 성 소장은 더 화가 나는지 소주를 혼자 따라 그대로 몇 잔을 연거푸 마셔 버린다. 김 선생이 보다 못해 옆에서 따라 준다.
“초면에 미안은 하지만... 정말 내가 혐오하는 말들만 하는군요. 여자들이 그런 근성을 버리지 않는 한, 남자의 역사는 절대 바뀔 수가 없지.”
짬뽕 국물만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다.
“난 생각이 좀 달라요. 인간 역사에서 남자니 여자니, 뭐 그런 생물학적 구분이 뭐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대학 때 밤낮으로 누드모델들 세워 놓고 그것만 신물 나게 그린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내 몸에 다 있는 건데도 신기하고 이상야릇한 흥분도 되고 뭐 그렇더라고요. 누드 그리면서 자위하는 애들도 가끔 나오고 그래요. 그런데도 교수님은 죽어라고 시켰죠.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모델의 신체적 모습에 대한 감각을 잃어갔어요. 단순히 인간이야말로 정말 잘 반죽된 신의 조각상이라는 정도를 알아냈죠. 그때부터 다른 일들이 일어났어요. 한 장 한 장 지나면서 모델의 아련한 눈빛을 읽어내기 시작했고 살짝 흉이 진 오른쪽 허벅지 상처를 찾아냈고 한쪽이 조금 짧은 팔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 생물학적 차이를 벗어나 그 속에 깃든 영혼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그림이라는 것을 그리기 시작하는 거라고 우리 교수님이 그러더군요. 조각 안에 깃든 영혼과 인간성을 발견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게 아닐까요?”
말을 하는 내내 김 선생의 두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났고 니코틴에 찌든 피부색이 황금빛 담뱃가루처럼 은은해 보였다. 박 작가는 김 선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성 소장과 이 원장도 조금 수그러지는 느낌이다.
“성 소장은, 남자 꼬신 적 있어요?”
이 원장이 그래도 승복을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야비한 웃음을 흘린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성 소장을 바라본다.
“꼬시긴 뭘 꼬셔. 내가 좋으면 그냥 데리고 사는 거지.”
“와! 멋져-요!”
그 새 몇 잔 한 소주에 은근히 혀 꼬부라진 소리를 질러대는 박 작가다.
“헤이! 그윽한 미소 한 방에 남자를 꼬실 줄 알아야 역사를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죠. 왜 그걸 몰라. 역사는 남자가 쓰는지 몰라도 그 남자를 움직이는 건 여자라는 걸. 참. 그 나이가 먹도록 뭐 했나 몰라.”
“듣자- 하니, 뭐?”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성 소장이 벌떡 일어난다. 분위기가 점점 꼬여만 간다.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데. 정말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아까부터 그에게서 문자가 열 개나 왔다.
그때, 이 원장이 자신만만하게 일어난다.
“오늘 밤, 내가 진정한 여성의 힘이 뭔지를 보여주죠. 다들 좀 배워야지, 나 원 참.”
거만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간다.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이러든 저러든 계약서만 빨리 마무리되면 된다. 여성이고 남성이고 우월이고 퇴폐고 나는 관심 없다. 오로지 내 관심은 평생 마지막인 내 사랑이 온전히 지켜지는 것이고 그것이 완전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가 근심이 없고 행복해야 내 마음도 행복한 것이 아닌가. 그에게 아내가 있고 자식이 몇 명이 있더라도 내 사랑만 지켜진다면 그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도 허물지 못하고 부술 수 없다. 이미 그와 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지금도 자금 때문에 아마 쉬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갑자기 조갑증이 밀려든다.
“뭐해요?”
다들 나가고 없다.
밤 - 황금마차에 올라
입구부터가 이집트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기 전에나 있을 것 같은 오묘한 신기함이 감돌았다. 동양과 서양 문화가 만나는 지점 어디쯤에나 있을 법한 시대의 한 조각을 떼어내어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분위기다. 남미의 잉카 문명 폐허 조각에서 찾은 듯한 태양신 문양이 바닥 여기저기 그려져 있고 이집트 파라오상이 입구에 턱 버리고 그 옆으로 스핑크스가 노려보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불빛에 잔잔한 재즈 풍 음악이 한껏 분위기를 고조하고 벽마다 진열장 가득 유럽의 고대 조각상들과 알 수도 없는 문양들이 새겨진 주석 술잔과 술병들... 러시아 인형들, 에쿠아도르 산 오카리나, 네덜란드 인형... 온 세계가 들어앉아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홀 한가운데 당구대가 놓여 있고 시거를 문 이탈리아계 청년 몇몇이 포켓볼을 하고 있다. 저편 구석에는 인도산 물 담배를 피우며 물끄러미 홀 안을 쳐다보는 눈이 파란 여자 한 명과 눈 빼고는 전부 시커먼 남자 한 명이 보였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반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외국인들만 드나드는 카페죠!”
“우린 한국인인데...”
“장사가 잘 안 되는지 사장이 얼마 전부터 회원제로 내국인도 일부 받기 시작했어요.”
“뭘 보여 준다는 건데?”
성 소장은 벌써 눈이 풀려 대 놓고 반말이다.
“양주나 마셔!”
이 원장은 코웃음을 치며 당구대 한편에 있는 작은 무대 위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두 손을 피아노 위에 가지런히 놓더니 현란한 속도로 알 수도 없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텐더가 센스 있게 재즈 음악 소리를 살짝 죽여준다. 이 원장의 짧은 치맛자락이 아슬아슬하게 나풀거리며 온몸을 흔들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댈 때마다 원피스 앞자락이 들썩거린다. 가슴 쇄골이 피아노 선율과 조명을 따라 춤을 추듯 움직여 댄다. 살짝 벌어진 앞 트임 사이로 하얀 속살이 도드라진다. 어느 순간, 홀에 있는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 원장에게 집중하기 시작한다. 성 소장도 순간 넋을 잃고 바라본다. 물 담배를 피우던 검은 피부 사내가 천천히 무대 쪽으로 다가간다. 정신없이 쳐 대던 피아노 선율이 한 고개를 넘어 아다지오 템포로 향하고 있다. 천천히... 천천히.... 느리게... 느리게..... 아주 부드럽게..... 멈추기.
홀 여기저기서 박수가 쏟아진다. 브라보, 브라보. 이 원장은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슬쩍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마치 여왕이 마차에서 내리듯 검은 피부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온다. 사내들이 이 원장을 흘깃거리며 보기 시작한다. 자리로 오자, 청년 두어 명이 이 원장을 따라 우리 자리로 와서 동석을 제안한다. 이 원장은 우리를 보며 그 보란 듯한 표정을 짓는다. 다들 한 풀 꺾인다. 성 소장은 양주를 한 잔 마시더니 청년들이 떠들어대는 영어에 대꾸를 하며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한다. 박 작가는 노트를 꺼내 뭔가를 연신 적어댄다. 김 선생은 물 담배 빈자리에 가서 담배를 주문해서 피우면서 오가는 청년들과 홀의 모습을 드로잉 북에 그린다. 이 원장은 검은 피부 사내의 요청을 따라 다시 피아노 앞에 가 앉는다. 사내는 한쪽에 세워진 색소폰을 꺼내 부드럽게 같이 연주한다. 잘 어우러지는 작은 무대 풍경이다. 나는 갈증이 나서 바텐더에게 소다수를 한 잔 청했다. 바텐더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연말에 단체 행사에 이런 쇼를 한 번쯤 보여준다면 정말 인기가 있을 것이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바텐더가 셰이커 하는 묘기를 보인다면 그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이 뭐 있겠는가. 멋지기도 하고.
“경력이 얼마나 돼요?”
훤칠한 키의 바텐더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다.
“십 년쯤..”
“외부 행사는 안 나가나요?”
“글쎄요. 바에 매인 몸이라...”
그때, 한껏 고조되던 색소폰 소리가 끝나는가 싶더니 연이어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긴다. 성 소장이다. 술잔을 든 채 내 손을 잡아당긴다. 평소와는 달리 많이 흐트러진 모습이다. 다들 자리에 앉아 있다. 술이 흥건하게 취해서 건배를 외친다. 이 때다 싶어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 일 이야기도 좀 마무리를 짓고 편하게 한 잔들 하시죠. 요일이...”
“아, 괜찮아. 아무 요일이나 좋아... 내가 강의 시간 변경 요청 하죠, 뭐. 까짓 거. 솔직히 나 아니면 누가 여성학 강의를 수 십 명씩 수강생 모아?”
“그래, 그래. 이참에 우리 애들 패턴 좀 바꾸지 뭐. 내가 금요일 할게요! 뭐 어려워?”
“하국장이 정해 주는 대로 군 말없이 다 따르기다. 알-았-지?”
박 작가가 대 놓고 반말을 해 댄다. 눈이 풀렸다.
“그깟 요일 가지고들 그만하자.”
머릿속이 환해지고 가슴이 확 트인다.
“요일은 제가 정해서 그럼 계약서에 다 명시하겠습니다. 일단 서명부터...”
가방을 뒤적이며 서류철을 찾았다. 이 틈을 놓칠 수가 없다. 그때 갑자기 성 소장이 소리를 내며 울어대기 시작한다. 다들 놀란 표정이다.
“나도 이 원장처럼 섹시하고 싶고... 남자들이 나만 좀 따라와 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제대로 연애편지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고...”
그토록 당당하던 사람이.
“난 성 소장의 그 당당함이 부러워. 글 속에서나 당당하지 실상 난 겁쟁이야. 초등학교 삼 학년까지 오줌을 못 가려 아버지께 죽도록 맞았다니까.”
“사실 포장만 화려할 뿐이야. 나 사실, 자궁 들어낸 지 좀 됐어. 그래도 여자이고 싶어.”
“이혼하면서 애들 다 버리고 맨 몸으로 나왔지. 끝까지 내 손에 쥐어진 게 뭔 줄 알아? 이 드로잉 북 이더라고.”
“목숨 걸고 사랑해 본 적들 있어요? 난 인생에서 그런 사람 만난 게 정말 행운이라 생각해. 그건 돈 주고도 못 사는 보물이니까.”
“흐흐, 유부남인가 보지.”
“남자는 믿으면 안 돼, 한국장. 하국장은 너무 순진해.”
“사랑... 그거 얼마나 헛된 건지. 이혼한 남편이 대학 사 년 동안 작업실 앞에서 하루도 안 거르고 나를 지켜줬지. 밤샘 작업할 때도. 그러더니 결혼 십 년 만에 결국 다른 여자 밤을 지키더군. 그게 사랑이야. 인간적으로 난 그 사람 이해해. 그럴 수 있어. 그래서 다시 난 자유를 찾았고 그림을 되찾았고. 나쁘지 않잖아?”
“부러워. 나도 남편이라는 쇠사슬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어. 자유롭게 여행하고 글 쓰고 미친 듯이 책에 파묻혀 살고 싶어. 제발 바람이라도 좀 피워 줬으면...”
다들 또 그 허랑한 농에 경계를 무너뜨리는 웃음을 웃어댄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계약서를 꺼냈다. 탁자 위가 지저분하다. 펜을 꺼내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 원장이 술잔을 들고 일어서다 종이 위로 술이 쏟아진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오- 쏘리, 쏘리!”
“이런, 종이가 엉망이야. 내일 팩스로 보내.”
“아침 일찍 직접 다 내방하지 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하는 수 없다. 이 만취한 자들에게 더 이상 원한들 뭣하겠는가. 아침 일찍 성 소장 연구소부터 시작해서 한 바퀴 도는 수밖에. 주머니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린다. 나는 폰을 꺼내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걱정 말고 편히 자라고. 연이어 한 사람씩 핸드폰 수신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열한 시 사십 분. 마무리할 시간이다. 다시 문자가 수신됐다. 사-랑-해. 짧지만 참 간편한 언어다. 사랑해. 그래 사랑하지. 사랑해서 죽을 만큼 사랑을 하기는 하지.
늦은 밤거리는 어수선했다. 택시를 잡는 취객들, 여자를 안다시피 비틀거리며 머무를 안식처를 찾는 데이트족들. 벌써 저만치 앞서 걸어가던 이 원장은 연신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더니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에 좀 바쁘겠어. 데이트가 더블로 잡히네. 한국장, 내일 나 출근 늦으면 집으로 와. 먼저 가요!”
성 소장은 부러운 눈빛으로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한다. 은근히 긴장된 표정이다. 폰을 든 채 손을 들어 보인다.
“내일 일정이 빠듯해 먼저 가요!”
돌아서 가는 성 소장의 어깨가 잔뜩 긴장되어 있다. 그래, 알았어요. 삼십 분. 최대한 시간 끌어요. 사장님 알면 나 맞아 죽는 거 이비서 알잖아. 그래요. 최대한 갈게. 차 소리와 성 소장의 돌아서서 하는 통화 소리들이 뒤섞여 들려온다. 저 편에 서서 차도 반 정도를 침범해서는 정신없이 택시를 잡기 시작한다. 팔을 허공에 둘러댄다.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마치 전자상가 앞 고무풍선 같다. 허공을 향해 하염없이 허우적대는.
새벽 - 잃어버린 구두 한 켤레
얼룩진 유리 진열장 안에서 빛바랜 개불들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낙지는 축 처져 맥이 없고 벌건 닭발들은 살아서 걸어 나갈 듯이 펄펄 하늘로 뻗쳤다. 한 그릇 댕그렁하게 놓인 어묵탕에서 김이 간간히 오른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아까 카페에서 나온 후로 줄곧 이마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손을 대면 붕대 위로 열이 달아오른다. 아프다.
“요새는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색을 내지. 그 느낌이란. 정말 짜릿해. 마치 내가 자유인이 된 느낌이야.”
“멋지다. 언제 한 번 보여 줘. 글은 그런 시원스러운 맛이 없어. 치밀하게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칠 수가 없으니. 정말 내 삶만큼이나 갑갑해.”
“그래도 샘들은 다 재능이 한 가지씩 있잖아. 난 재주라고는 서류 정리하는 거 말고는...”
“학구장, 엄살은. 당신이야 말로 행동하는 지성인 아냐?”
“무슨..”
“머릿속 생각들을 세상에 하나하나 펼치고 있잖아. 복지가 뭐야? 인간이 인간이길 원하는 간절함 아닌가. 인간의 자유, 사랑, 영혼... 그 모든 것을 바람직하게 지켜내겠다는 거잖아. 얼마나 멋진 일이야!”
“오, 멋져. 차라리 글을 써.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해. 그림 그리는 사람 맞나. 정말 멋진 말이야.”
몇 차례 또 술잔이 오가고 소주병이 탁자 위를 구르고 있다. 그 오가는 동안, 김 선생과 박 작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언니 동생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 사이에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매가 가장 존경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졸지에.
그때, 탁자 위 저 편에 내팽개쳐진 박 작가의 핸드폰이 진동소리를 울려대기 시작한다. 김 선생은 담배를 꺼낸다. 다시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 뭐?”
폰으로 남자의 괴성이 들려오고 고함 소리가 거침없이 쏟아진다.
“그래, 이혼하자. 안 들어갈 테니 맘대로 해!”
연이어 담배를 피워대던 김 선생은 슬그머니 일어난다. 박 작가는 화를 못 삭이고 술을 연거푸 마셔댄다. 안주는 어묵탕이다. 포장마차 늙은 주모는 우리를 노려보다 지쳤는지 얼마 전부터 저쪽 구석에서 온몸을 비벼대며 졸고 있다.
눈이 감긴다. 김 선생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박 작가는 남편 욕을 혀가 꼬부라진 채 늘어진 테이프처럼 반복적으로 읊어대고 있다. 그때, 박 작가의 핸드폰이 다시 요란한 진동 소리를 내고 그 바람에 주모가 벌떡 잠에서 깼다. 나는 박 작가를 부축하며 지갑에서 돈을 껴내 탁자 위에 놓고는 비틀거리면서 거리로 나섰다.
거리 저 편에 새벽안개에 묻혀 검은 세단이 한 대 서 있다. 박 작가를 부축하며 걸어가는데 세단 문이 열리더니 험상궂게 생긴 사내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나는 움찔 놀랐다. 박 작가를 보더니 한 번에 어깨로 떠 받쳐 가뿐히 메고 돌아선다. 순식간이다. 그리고는 차 뒷좌석에 짐짝 놓듯이 벌렁 내던지고는 앞으로 가서 운전석에 털썩 앉아 휑하니 가 버린다. 마치 바람이 지나간 듯이.
아직 어둑한 새벽, 바람이 한 줄기 분다. 시원하다. 이마는 슬쩍 아린다. 거리는 아무도 없다. 멀리 포장마차도 불을 끄고 빛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달은 벌써 어둠을 몰고 사라지면서 가물거리고. 빛을 잃은 재색만 온통 풀어져있다. 얼른 가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 아침에 할 일이 많다. 네 장의 계약서와 사업계획서. 정오의 오백. 이 길로 십 여 분만 걸어가면 버스 첫 차를 탈 수 있다. 이 시간에 택시는 위험하다. 얼른 가야 한다. 얼른.
바지 주머니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 시간에 문자가 오다니.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혹 아내가 눈치를 챘을까. 아이가 아픈 걸까.
‘국장님,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번 강의는 인연이 안 맞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뵙지요!’
연이어 문자가 들어온다.
‘즐거웠습니다. 강의 조절이 어렵겠네요. 다음 기회에...’
계속 들어오는 같은 문자들. 도대체, 도대체 왜...... 왜.
온몸에 힘이 풀린다. 이마가 뜨거워지고 다리가 풀린다. 어지럽다. 온통 엉망이다. 현기증이... 바닥이 울렁거린다. 머리가... 머리가.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