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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May 12. 2024

제인에어를 꿈꾸며

단편소설

나는,

M을 사랑한다.

나를 끊임없이 사랑하는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를 끊임없이 사랑하는 나 또한 사랑한다.

그런 나 자신을 지옥 불에라도 처넣을 듯이 증오하다.     

그를 사랑하는 나를 죽도록 증오한다!          




   -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요!     


  눈처럼 하얀 목소리가 공허를 뒤흔든다. 공허 사이로 여인이 가늘고 하얀 팔을 들어, 계산대 위로 쭉 뻗는다. 신용카드 한 장. 

  유난히 새하얀 여자 팔이 공간을 싹둑 잘라버리는 듯하다. 나는 뒷덜미가 쭈뼛 섰다. 계산대 앞에 서서 주춤거렸다. 새하얀 팔뚝을 가진 여인 옆에 선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 저희 메뉴에는 없는 대요.     


  내 목소리가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 카페에 그런 것도 없나요?     


  여자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날카로움을 낮게 깔아 던진다.     


  -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뭐가 죄송한지 통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죄송하다. 많이 죄송하다. 여자는 메뉴를 아메리카노로 바꾸었다. 딸을 위해 딸기 주스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아침 출근길에 당골 과일가게에서 사다 놓은 딸기와 시럽을 넣고 얼음과 함께 블랜딩 했다. 기계소리가 무거운 침묵 속을 천천히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급하게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사모님! 오랜만이세요!     


  연구소 막내 시영이다. 미니스커트에 짧은 나시 티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큼함이다. 

  사모님? 어떤 사모님일까? 누구 사모님일까? 내게는 늘 가장 어색하고 멋쩍고 욕심마저 나는 단어이지 않는가! 

  사. 모. 님..... 귀에서 그들의 말소리를 끊지 않으면서 재빠르게 손놀림 했다.     


  - 메뉴 나왔습니다!     


  시영이 급하게 카운터 쪽으로 달려왔다.      


  - 소장님 사모님이세요!     


  누구의 사모님인지 시영은 정확하고 낮게 속삭여주었다. 카운터 앞에서 나는 가벼운 목례를 했다. 최대한 예의를 차린 목례. 그러나 벌써 피가 머리로 쏠리고 있었다.      


  - 여기 센터장님이세요!     


  이제는 시영이 여인을 보며 큰 소리로 나를 소개한다. 여자도 슬쩍 가벼운 목례를 보낸다. 아이가 나를 다시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래. 내가 진짜 죄송해야 하는 대상이 맞는구나. 정확한 어휘를 구사했구나. 역시... 주고받는 언어 역시 다 진정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였구나.      

  그때, 카운터에 놓아둔 폰으로 문자가 온다.     


  ‘친구. 스페인 날씨 눈에 담아 갈게.’     


  나는 얼른 문자를 품에 안 듯 폰을 안았다. 홀에서 노래하듯 높은 옥타브로 웃어대는 시영, 잔잔하게 품위를 유지하며 정말 사모님답게 낮게 웃는 여자, 그 옆에서 하얀 밀랍 인형처럼 앉아 딸기 주스를 마시고 있는 아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 여보세요? 아, 여보!     


  순간 나는 들고 있던 빈 유리잔을 놓칠 뻔했다.     


  - 유나 데리고 연구소 일층 카페에 있어요. 당신 얘기하신 자료들 가지러... 지금 아니면 시간이 안 돼서... 나도 오후에 무용실 다시 가야 해서....     


  문자를 지워버렸다. 피가 온통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두피에 뚫린 구멍이란 구멍으로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아... 머리에 열이 치솟았다. 조금 비틀거리다 보조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런 게 벌인가 보았다. 

  남의 것을 함부로 훔친 벌. 내가 먼저 탐을 내거나 훔쳐 오지는 않았다. 절대. 그런데 결국 벌은 모두 항상 내 차지다. 이렇게 벌벌 떨면서 주방에 초라하게 숨죽이고 있는 벌.


  다시 문자가 왔다.     


  ‘괜찮아?’     


  또 문자를 지웠다. 나는 이렇게 벌벌 떨고 앉았는데....

  그놈의 ‘친구’ 소리. 그 단어가 저와 나를 방패막이해 줄 시점은 이미 지났고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것도 다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애써 그 단어 하나를 구멍 숭숭 난 그물 덮어쓰듯 가리고 서 있는 꼴. 이 꼬락서니 하고는....      


  - 센터장님이라고요?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홀 전체를 뒤흔든다. 내 손은 벌써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심장이 파도를 치고 있다. 나는 카운터 옆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심각한 일을 하는 것 같은 자세만 취하고 있었다. 양손이 자판을 더듬듯 감싸고 있을 뿐이다. 머리가 이제는 새하얗게 바래고 있었다.      

  두 여자에게 동시에 보내온 문자와 전화. 한 공간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음 깊숙이 숨은 어둠과 부정과 광기가 슬그머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스물 거리기 시작했다. 그 지독히 끔찍한 광기가 천천히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을까? 두 사람에게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전화나 문자를 주고받는 그것.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알 수 없는 우월감? 

  나는 심한 수치심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치심은 타고 올라오는 광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때 주머니 속에 처박아둔 폰에서 다시 진동을 울렸다. 온몸이 진동으로 얕은 떨림을 느꼈다.     


  ‘흔들리지 마. 친구!’     


  폰을 던져 부숴버리고 싶다. 아니 저 팔뚝이 새하얀 여자에게 던져버리고 싶다. 나는 폰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래. 친구는 절대 흔들리면 안 되고 적어도 친구니까 아무것도 하면 안 되고 최대한 친구니까 멀리서 있어야 하지. 미쳐버리고 싶도록 가슴이 미어터져도 절대 내색하면 안 되고 친구로서 말갛게 흰 이 드러나도록 웃어주어야 하고 쿨 하게 어깨 툭- 치면서, 장난이었어, 정도로 감정 마무리해야 하지. 

  그랬다. 그와 나의 룰은. 그 룰을 뚫고 난데없이 뛰어든 것은 저 팔뚝 하얀 여인이다. 룰에 없던 복병이 나타나 질서가 깨지고 균열이 생길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것은 바로 나다.           


  나는 늘 외줄 타기를 한다.

  로체스터의 미친 부인이 될 것인가, 강인하고 지성미 넘치는 제인이 될 것인가.          

  오래전 남쪽 작은 항구 도시 벽화마을 언덕에서 여자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달고나 기계 조작법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달고나 기계 앞에 줄을 서면 작은 아이는 사용법을 기계 대신 읊조린다. 아이 아빠는 카페 안에서 가끔 아이를 부른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서로의 규칙이 있었다. 그 규칙을 지키며 언덕 위에서 하루를 살고 있었다. 규칙 속에 끼어든 건 관광객인 우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규칙을 깨기 싫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깨 주기 싫었다.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하니 달고나는 정확하게 빈틈 하나 없이 딱 떨어졌다.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하니.... 나는 그 순간 아이 일상과 규칙을 절대 깨트리기 싫었다. 누추한 곳이든 거대한 궁전이든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일정한 룰이 있다. 그 보이지 않은 룰을 깨트릴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사람들은 가끔 그것을 잊고 산다. 오만과 독선으로 다른 이의 룰을 거침없이 함부로 깨트려놓고도 도대체 왜 화를 내냐는 듯 한 표정. 그때 그 언덕에서도 그랬다.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제 멋대로 한 어른이 달고나 국자를 다 태워버렸다. 아주 시꺼멓게. 아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른은 괜히 더 화를 냈다. 아이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아이 아빠는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흘깃 보더니 다시 메뉴 내는 일에 집중했다. 아빠는 아이를 믿고 있었다. 오히려 달고나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아이가 공기를 가르며 맑은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공중에 분사했다.     


  - 아저씨는, 규칙을, 어겼어요!     


  그 한 마디에 둘러싼 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다. 국자를 시커멓게 태운 어른은 국자를 물에 던지고 돌아서 가 버렸다. 마치 자기가 아니라는 듯이. 아이가 허공에 대고 외치는 소리인 양....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몰려들었다. 어른들은 아이가 시키는 대로 줄을 서서 착한 어른 흉내를 내었다. 작은 규칙을 지키는 착한 어른들....          


  - 센터장님이 카페에서 왜......     


  시영이 카운터 앞에서 소곤거리듯 말했다. 

  나도 모른다. 하필이면 왜 이 시간에 여기 내려와 있었는지. 왜 매니저와 직원들을 몽땅 재료 사러 보냈는지. 왜 그들에게 브레이크 타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터장인 나에게는 브레이크 타임 따위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그런 쓸데없는 오지랖 덕분에 또 이렇게 난처한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버렸다. 아니 나 혼자 감내하면 되는 상황. 맞다. 

  시영이 바짝 더 다가왔다. 의자에서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손이 떨렸다, 아직도. 일상의 규칙을 깨부수기 위해 덤벼든 여자 앞에서 그저 작고 힘없는 가해자일 뿐이다.     


  - 브레이크 타임.....     

  - 역시 센터장님이셔!     


  시영은 부러운 표정이다. 카운터 앞에서 시영의 뒤로 여자와 아이가 보였다. 여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시선이 온몸에 느껴졌다.     


  센터장......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일까. 도대체 그가 없는 이 공간에 불쑥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친구로서 감정 조율하는 데 그와 나는 거의 일 년이 걸렸다. 무척 힘들었다. 그 일 년 동안 나는 사직서를 가방에 쑤셔 넣은 채 매일 출근했다. 역시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해 준다. 일 년 정도 지나면서 처음에 가졌던 이성적인 떨림이나 감정들이 차츰 우정과 연민으로 변해 갔다. 휴일을 제외하고 거의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눈인사를 할 수 있었던 ‘다행’이라는 단어가 점점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그 다행 덕분에 각자 위치에서 다시 위태롭지 않은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다행스럽게.     


  그런데 갑자기 일상에 금이 가는 소리가 이 오후에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지금 스페인 출장 중이다. 여자는 지금 내가 근무하는 여기 이 공간을 점령하러 온 것이다. 여자는 잠깐 일어나더니 카운터 쪽으로 걸어왔다. 무용수라 그런지 몸매가 탄력이 넘쳤다. 갑자기 내 온몸이 움츠러들면서 얼굴이 푸르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웠다. 많이. 다른 여자가 보아도 너무 멋진 몸매다. 상상 이상으로. 등이 심하게 가려웠다. 고개도 자꾸만 움츠러든다. 여자는 카운터에 놓인 내 명함을 한 장 꺼낸다.     


  - 지 민 영....      


  웅얼거리며 내 이름을 집어삼킨다. 화가 났다. 감히 저렇게 할 권리가 있을까. 나는 죽을힘을 다해 참아냈다.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화가 많이 난다.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이라도 터질 듯 신경이 온통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또 진동이 울렸다.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폰이 온몸을 울렸다. 여자가 등을 돌려 다시 걸어간다.      


  ‘화났니?’     


  정말 화가 났다. 많이 났다. 아니 아주 많이 났다. 소리를 질러대며 여자를 끌어내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안다. 내가 그 알량한 ‘친구’라는 단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휘청거리고 버텨왔는지를.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았다. 사람인지라. 그도 나도 시행착오를 수백 번은 거쳐야 했다. 그 긴 시간을 건너 이제 겨우 질서가 잡혀가는데...... 제발 좀 나가 달라고, 내 공간 안에서 사라지라고... 내지르고 싶었다.


  나는 폰을 카운터 옆으로 던져버렸다.          

  이층은 고요했다. 연구소 직원들이 절반 이상 출장으로 빠져나가고 나머지 사무실들도 내근자가 한 두 명이 고작이었다. 나는 블라인드를 돌려 그늘을 만들었다. 어두운 곳에 숨어있고 싶다. 혼자. 

  윤실장은 아까부터 컴퓨터 화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간사 은영은 서류철을 하느라 바쁘다. 나는 등받이 의자에 온몸을 기대고 회전의자를 창 쪽으로 돌렸다. 눈을 감았다. 여자의 가볍고 날렵한 몸놀림. 그 동작, 그 자태....     


  ‘가족 다음이지, 당연한 거 아냐?’     


  울음을 그칠 수 없었던 그 한 마디. 그렇게 감정 조절이 힘들어 끙끙 앓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나는 역시 ‘친구’가 맞았구나. 서로의 상황을 이겨내고 참고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여자를 아끼고 평생 동반자로 같이 함께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그 희한한 감정 속에 휘말려 바보 천치처럼 말려든 나만......      


  ‘진심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할 수 있을까. 감정이라는 그 엄청난 파도를 그렇게도 냉철한 칼날로 반듯하게 베어내 보여줄 수가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러면 내 선택은 없다. 미쳐 날뛰는 수밖에. 그러나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나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쳐 버릴 수는 절대 없다. 도대체 왜....... 전화와 문자를 동시에 두 사람에게 할 수가 있을까. 내 생각을 하면서 여자를 떠올린 것일까, 여자 생각을 하면서 나를 떠올린 것일까?          





  내게 M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나를 미친 부인으로 만드는 M과 나를 강인한 제인으로 만드는 M이 있다.          




  졸았다. 아니 무방비 상태로 나를 내던져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냥 의자 속에 몸을 던져 넣은 채 그렇게 구겨져 있었다. 닫힌 블라인드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벌써 잠은 깼고 의식은 선명해졌다. 그대로 눈을 감고 공간과 시간을 응시했다. 가만히. 윤실장   자판 두드리는 소리, 은영이 뭔가를 후루룩 마시는 소리,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화장실 문 여닫는 소리.......          


  아주 어릴 때 고모는 작은 읍내에서 가게를 했다. 나는 유독 고모를 따랐다. 고모는 그때 벌써 오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달걀형 얼굴에 백옥 같은 피부를 소유했다. 고모네 뜰에는 수 만 가지 꽃들이 피어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마당 한쪽에 수국이 수북하게 피어있었고 아무렇게나 난 듯 구불거리며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저 멀리까지 오만가지 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꽃이나 나무들 사이를 헤치고 조심스럽게 걸어가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미 꽃과 나무들은 거기가 자신들의 위대한 왕국이었다. 나는 그들의 왕국을 침범한 침입자일 뿐이었다. 아무 죄도 없다고 당당하게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이미 죄인이었다. 그들의 세상에 발을 딛었던 그 자체가 원죄였다. 세상에는 감히 침범하거나 소유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을 몰랐거나 알지만 너무 아름다워 객기를 용기로 착각하고 덤빈 자체가 오만이요 탐욕인 것이다. 


  어린 나는 정원 한가운데서 길을 잘 잃었다. 덤불 사이에서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내 머리 위로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개미나 곰벌레들이 발밑을 기어 다녔다. 산새가 날아와 나무 위에서 떠들어댄다. 적막했다. 그때 멀리서 자전거 벨 소리가 맑게 울렸다. 고모부다. 해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돌아온다. 고모부는 항상 나를 정원에서 꺼내 주었다.      


  - 이런. 또 길을 잃었구나!     


  작은 생명체인 나를 덥석 안아 목마를 태우고는 그 험난한 정원 속에서 빠져나갔다. 목마를 탄 내 옆으로 그보다 몇 배 높은 나무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모부는 우물가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우물 옆 화강암 돌 위에 어린 나를 앉히고는 얼굴과 손발을 씻겼다. 그즈음이면 가게와 부엌을 바쁘게 오가던 고모가 웃으며 달려왔다.     


  - 어디 갔나 했더니..... 올케 알면 기겁하겠어!      


  그랬다. 이미 손과 발이 흙투성이 었다. 아니 진흙이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 나는 정말 내가 아주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우물가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러면 고모는 정원 입구 쪽으로 달려가 산딸기를 한 움큼 따서는 울고 있는 내 입에 쏙 넣어주었다. 울먹이면서 우물우물거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씹었다. 그들은 정말 환하게 웃었다. 너무 행복한 부부였다.     


  그런 줄 알았다. 그들의 아름다운 정원처럼 그들도 그렇게 아름다운 부부인 줄... 

  고등학교 이학년 여름방학. 나는 오랜만에 고모네로 향했다. 며칠 묵어올 생각이었다. 한여름 저녁은 무더위가 살짝 내려앉아 산산했다. 가게 앞에 동네 개들이 몰려왔다. 고모네 꽃순이 암내가 온 동네에 진동을 했나 보았다. 고모는 꽃순이를 꼭 묶어두었다. 가게 옆 대문 앞에 온 동네 수컷들이 다 몰려왔다. 나는 무서워 작은 들창으로만 지켜보았다. 수컷들은 저희끼리 물어뜯고 싸웠다. 꽃순이는 묶인 채 발광을 했다. 둘러싼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대문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수컷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 부드러운 황금색 털을 가진 수컷 한 마리가 포효하듯 다른 수컷들을 짓누르고 아주 유연하게 작은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꽃순이는 울부짖었다. 황금색 털을 한 수컷과 꽃순이는 교미를 시작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들창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너무 놀랐다. 수컷이 꽃순이 등에 올라탔다. 꽃순이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나는 여고생이었다.       


  바로 그날이었다. 

  내 환상과 인생에 대한 쓸모없는 희망이 완전히 무너진 날이.


  갑자기 가게 유리문이 와장창 깨졌다. 그러더니 시골 아낙 한 사람이 빨래 방망이를 들고 가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부엌에 있던 고모는 놀라 달려 나갔다. 아낙은 고모를 보더니 사정없이 덤벼 방망이로 정신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고모가 이유 없이 그렇게 맞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모는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아낙은 고모의 구불구불한 긴 펌 머리를 잡초 뜯듯이 잡아 뜯었다. 바닥에 쓰러진 고모를 아낙은 벌레 보듯 지근지근 밟았다. 나는 손톱을 자근자근 물어뜯어 씹었다. 그때 멀리서 자전거 벨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길 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던 고모부는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고모부를 본 아낙은 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고모부는 아낙을 뒤에서 제압하고는 끌고 나갔다.     


  고모는 바닥에 엎어진 채 꼼짝을 못 했다. 나는 달려갔다. 그러나 만지기 싫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때 고모부가 다시 왔다. 고모를 부축하고 방에 눕혔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 길로 맨발로 다리를 건너 시골 시외버스 주차장까지 달려갔다. 집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사흘을 앓아누웠다.      

  - 애한테 못 볼 꼴이나 보이고..... 몹쓸 것들.....     


  아버지는 화를 참지 못하는지 담배만 피워댔다. 그 후 나는 두 번 다시 고모네 가지 않았다. 아름다운 정원도... 행복한 한 쌍의 그들도...... 다 거짓 투성이었다. 세상이 온통 거짓이고 가짜라는 걸 그때 나는 알아버렸다.           

  그 아름다운 정원에 두 번 다시 발을 내딛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미소를 흘리는 게 아니었던 것처럼. 그의 미소에 홀리는 게 아니었던 바로 그것처럼.




  한 명의 M은, 옆에서 아무리 외치고 소리 지르고 발광을 해도 사랑이라고는 부스러기조차 찾을 수 없어 밤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년이 되어 거리를 쏘다니게 만든다.     

  

  또 다른 M은, 눈빛과 몸짓과 언어로 내 모두를 사랑하고 내가 그의 아내 앞에서조차 제인처럼 당당할 수 있도록 돋보이게 만든다.          




  그가 스페인에서 돌아오기 하루 전날 나는 사표를 냈다. 도망을 친 것이다. 돌발적인 사표 제출로 인해 오는 모든 불이익을 감당할 만큼 나는 급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그의 아내를 본 이상 두 번 다시 그를 마주할 자신도 마주하기도 싫었다. 역시 내 인생은 늘 이런 식이다. 그래. 나를 좋아한다는 인간들이 정상일 리가 없지. 멀쩡한 인간이 미쳤다고 나 따위를 좋아하겠는가. 그런 멀쩡한 인간은 내가 눈에도 들어차지 않을 것이다. 그 감정놀음에 속아 넘어가고 만 것이다. 그는 결혼 십 년이 넘었고 권태기가 오니까 두리번거리다 내가 눈에 들어찬 것이겠지. 그 따위 얕은 인연으로 인생을 걸 미친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걸로 인생을 걸라고 하는 미친 여자도 없다. 다만 그 감정 장난에 놀아난 내가 한심하고 또 죽여 버리고 싶을 뿐이다. 그 또한 피해자다. 자기감정에 자기가 놀아났으니... 그러니 최대한 빨리 내가 수습을 해야 한다. 한동안은 힘이 들 것이다. 일단 경제적으로. 그러나 어쨌든 또 살게 되어있다. 살아갈 것이고.      


  대충 짐을 박스에 담고 책상 정리를 하고 화장실에 갔다. 거울을 봤다. 추악하고 더러운 불륜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예쁘지도 생기 있지도 않은, 푸석푸석 썩어 들어갈 것 같은 더럽고 추악한 계집이 하나 서 있다. 고모보다 더 더럽고 추잡하다. 더러운 불륜녀! 죽여 버릴 거다!! 


  탕!


  뻗은 오른손에서 피가 솟구친다. 거울이 박살 났다.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윤실장과 은영이 달려왔다. 허공에 매달린 듯 오른손가락 사이로 피가 뚝 뚝 떨어진다. 거울을 보고 있는 눈매가, 미쳐가는 여자 바로 그 꼴이다. 갑자기 현기증이 온몸을 감돈다. 어지럽다....          


  눈을 떠 보니 병실이었다. 형광등이 강렬하다. 육 인실인데 온통 빈 병실이다. 퀭하니 썰렁하다. 커튼 사이로 네온사인 불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어지럽다.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오른손이 둔했다. 쳐다보니 붕대가 온통 감겨있다. 결국 또 사고를 쳐 버렸다.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다. 나 자신을... 

  그리고 이 년 전 그 시간과 그 순간과 그때 그의 표정과 눈빛과 그 모든 순간을.... 고쳐 놓고 싶다. 다시 분노가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어지럽다...     


  - 어! 일어나셨어요?     


  그때 문을 벌컥 열고 은영이 달려온다. 뒤따라 윤실장이 걸어온다.      


  - 센터장님, 좀 괜찮으세요? 얼마나 놀랐던지...

  - 건물 식구들 전부 놀라서... 소장님도 서둘러 귀국하신다고... 아마 새벽에 도착하실 거예요!     

  이런. 도대체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잘못된 인연을 도대체...      

  - 이럴 때 혼자인 게 정말 젤 힘들어요! 그래서 오늘 밤은 은영 씨하고 제가 병실 지켜 드리려고요!     

  참 성가신 친절이다. 이제 상사도 아닌데 이 과잉친절은 도대체 뭔지...      

  - 그리고... 센터장님 사표, 협회장님이 수리 못하신다고... 그간 과로하신 거 같다고... 일주일간 몸조리하시고 출근하시라고...     


  빌어먹을. 언제는 못 잡아먹어서 난리 더니.      


  - 그리고 손은... 다행히 신경은 다친 데 없다고... 스무 바늘 꿰매고 깁스했어요. 한 달 정도 힘드시겠지만 치료만 잘 받으시면 일상생활에 지장 없으시다고...     


  그들은 내 만류도 무시한 채 끝까지 병실을 지키겠다고 한다. 겨우 저녁 먹고 오라며 내 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다. 머리가 다시 혼란스럽다.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또 운명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야 한다. 


  정말 싫다. 도망가고 싶다. 왼 손으로 폰 전원을 켰다. 수 십 통의 문자.... 친구라더니... 중요한 건 그가 지금 오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안전하지 못하다. 서로 책임도 지지 못할 운명 속으로 더 이상 들어가기 싫다. 결국 피투성이가 되는 건 나일 테니까. 그때는 이 정도 붕대로 어림도 없을 것이다. 도망쳐야 할 것 같다. 지금쯤 그는 야간비행기에 타 있을 것이다. 이런 때 도망을 쳐야 한다. 공항에 도착하면 또 통화가 될 것이다. 안 된다. 지금밖에... 그는 아마 이런 중에도 가방 가득 가족에게 줄 선물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분명하다. 


  오래전 본 그 모습... 명절 전 날, 늦은 연장근무를 하는데 양손 가득 선물꾸러미를 들고 복도난간에서 남몰래 입맞춤을 남긴 채 그 모든 선물을 다 들고 내려가던 뒷모습. 길가에서 기다리던 그 여자 차에 타던 그 모습. 그런 모습을 보고도 마음을 접지 못한 건 다 내 탓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모습은 영원할 것이다.           


  나는 그 밤에 병원을 탈출했다. 

  오피스텔에서 간단한 짐만 챙겨 인근 호텔로 향했다. 오피스텔을 세놓고 손에 상처가 아물자마자 바로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최소한의 돈만 가지고. 항상 꿈꿔왔던 삶을 그렇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볼리비아였다. 언젠가 카페 안에 모인 젊은 친구들이 왜 그렇게 볼리비아에 가고 싶은지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ㅂ’이 두 개라서,라고 했다. 순간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사실 나도 모른다.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그 볼리비아라는 단어의 시작점이 언제인지, 왜 그랬는지... 그냥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왔고 가장 다행인 것은 이 나라가 나를 원죄에서 구원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나라는 존재는 한국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오피스텔도 친척에게 싸게 팔아 버렸다. 그리고 운 좋게도 볼리비아에 정착한 지 삼 년 만에 라파스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할 수 있었다.


  가끔 한국인 여행객을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최대한 말을 아꼈다. 한국어를 쓰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일본이나 중국인 정도로... 내 인생의 불확실한 정체성만큼 한국인이라는 위치 또한 다른 나라에서는 아주 불확실한 정체성인가 보았다.          





  유감스럽게도 M의 아내는 미치지 않았다.

  차갑고 냉혹하다.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독하고 모질다.

  M을 바라보는 나 혼자 미친년도 되었다가 지적인 여인도 되었다가....

  깨춤을 춘다.          

  그런데.

  운명이 그리 쉽게 나를 놓아줄 리 없다는 걸 미처 몰랐다. 




  초가을 어느 날.

  그즈음, 나는 정말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아주 쾌적한 상태였다. 

  나는 상파울루에 있는 원두 시장을 둘러보러 갔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남아메리카에 온 이후 여행 겸 시간 날 때마다 하는 일이었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는 여행가 하지후와 점심 약속을 했다. 그는 유일한 한국인 친구였다.     

  상파울루 가을은 유난히 멋졌다.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소음 사이로 분절적인 단어들이 시공을 초월해 내 귀를 찢어버리듯 내리 꽂혔다.      


  - 아. 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였다.

  상파울루에 그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내가 떠났다고 그의 운명이 바뀌거나 그 집에 불행이 찾아오는 일은 절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잘못된 상상이나 복수가 만든 거짓 카타르시스일 뿐이다. 


  그는 완벽하게 행복해 보였다. 여자는 탄력이 넘치는 몸매로 그 옆에 밀착해 팔짱을 끼고  있었고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그는 한 팔로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은 조금 더 자란 아이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손톱을 물어뜯었다.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졌다. 여기는 상파울루인데...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을 왔는데... 결국 운명은 내 심장을 기어이 도려내 버리는구나.      


  갑자기 눈에 불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실핏줄이 터진 것 같았다. 

  아- 눈이.... 눈이......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쿵- 하고 뭔가에 부딪혔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아련... 하다. 


  몸 옆으로 시궁창 냄새가 역겹다. 걸음소리가 났다. 하얗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웅성거리는 소리, 사람들 발자국 소리, 코끝에 나는 시멘트 냄새, 구두약 냄새... 시궁창 냄새....  

  지나가는 구두들이 환영처럼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뒤죽박죽인 포르투갈 어가 난무하게 쏟아졌다. 짧은 비명소리도... 눈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제발... 제발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기를.... 제발..... 또 누군가 구급차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미쳤나.... 봐!     


  또록또록한 한국어 사 음절. 완벽하게 날씬해진 그 여자 목소리다. 아. 제발 그냥 가라. 나를 둘러싼 무수한 발들 사이로 뭔가 재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어른하게 보였다. 제발... 운명이여, 이제 그만 좀 지나가라. 제발.


  - 헉, 헉, 헉. 아.... 아......     


  그다. 심장이 요동치는 그 소리. 그의 짧은 오열과 비명소리.... 분명 그다. 빌어먹을. 여기서 모든 게 다 끝장이구나. 나는 양팔을 들어 허공을 허우적댔다. 제발 오지 마. 제발.... 제발....     


  - 요나! 요나!     


  그때였다. 또 다른 운명이 불쑥 나타난 것은.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다. 누굴까. 여기서 내 이름은 요나. 상파울루에 사는 상인일까. 아니면...... 그 순간 그의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 한 무리가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요나라고 외친 누군가에게서 짙은 랑방 향수 냄새가 풍겼다. 도대체 누구일까. 내 온몸이 들것에 실리는 것 같았다.     


  - 여보! 아는 사람이에요?     


  또렷한 여자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러 내 귀에 꽂혔다. 그는 말이 없었다. 들것이 구급차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 짙은 랑방 향수는 계속 내 곁을 맴돌았다. 문이 탁 하고 닫혔다. 도대체...... 더 이상 그의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허공 속에 양팔을 허우적댔다. 그 랑방 향수의 주인은 내 양손을 꼭 잡아 주었다. 손이 참 따뜻했다.          


  나는 두 달 동안 상파울루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 그 랑방 향수는 거의 매일 내 병실을 찾았다. 나는 한 달 만에 겨우 붕대를 풀 수 있었다. 다행히 실명은 아니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시신경 일부가 터지면서 실핏줄이 터졌다고 한다. 나는 가끔 내 주위를 맴도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복도를 더듬거리며 지나가면 그 심장 소리가 다가와 슬쩍 지팡이를 밀어주기도 했다. 나는 알고도 모른 척했다. 모르는 운명으로 살고 싶었다. 서로를 위해서. 그는 너무도 멋진 가정을 꾸리며 잘 살고 있지 않았는가. 복도를 서성이는 그의 심장 소리를 가로지르며 랑방 향이 내 인생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 요나!


  그럴 때면 그 심장은 더 요동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아주 작게 내게 되뇌었다.   

  

  - 민영아!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아니 안 들은 척했다.      

  그 랑방 향은 그날 점심 약속을 한 하지후였다. 사진작가이자 여행가인 그는 남미에만 십 년 넘게 살고 있었다. 가끔 볼리비아에 들를 때마다 카페를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에게 부탁했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와 이름을 잊고 싶다고. 그와 나는 절대 한국어로 대화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나를 요나라고 제일 처음 불러주었다. 나는 그를 멋진 친구로 언제나 대해주었다. 편안함을 주는 친구. 정말 친구다운 친구였다.      

  붕대를 푼 다음 날, 지후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요나... 음... 한국인 한 분이 찾아와서.... 내게 당신을 부탁하고 떠났소.      


  나는 이미 그를 보았다. 붕대를 풀고 처음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그날, 멀리 정원 한 모퉁이에 서 있던 그를 보았다. 가장 처음 본 사람. 운명인 줄 알았던 사람. 이제 영원히 가슴속에서 각인이 되어버린 그 사람.  

   

  - 그리고.... 이런 말을 했소. 다시는 찾지도 않고 옆에도 안 올 테니... 아프지 말라고....     


  가슴이, 가슴속에서 또 알 수 없는 슬픔과 울분이 치솟았다. 너무 힘들다. 너무...     

  나는 붕대를 푼 그날, 외출을 허가받고 지후와 인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지후는 내게 근사한 매너와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했다. 레스토랑에서는 부드러운 남미 풍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오랜만에 행복함을 느꼈다.   


  그리고 지후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요나, 사실은..... 내가 그분에게 요나가 있는 곳을 안내했소. 그는 몇 년간 당신을 수소문했다고 했소. 그날 점심 약속도, 그가 당신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약속이었소. 부득이 가족과 함께 올 수밖에 없었다면서 가족을 호텔로 보내고 약속 장소로 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런 일이.... 내가 당신에게 정말 큰 잘못을 한 것 같소!     


  나는 포크를 떨어뜨렸다. 

  이제 정말 운명이 사라져 가는 소리가 들렸다.      


  - 그를.... 지금도 사랑하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후는 나를 병실에 안내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퇴원할 때까지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라파즈에 있는 내 카페와 내 집으로 돌아갔다. 두 번 다시는 상파울루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씩 가슴속에 그리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후라는 사람...... 이 척박한 땅에서 유일한 친구였던.... 그리움이 몸서리치던 어느 날 해 질 녘이었다.


  카페에 저녁 등을 켜고 돌아설 그때였다.     

  남루한 여행객 차림의 지후가 카페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갑자기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고였다. 지후는 나를 향해 양팔을 한가득 벌리고 서 있었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등 뒤 석양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운명이란 언제나 여러 가지 옷차림을 하며 다가온다.

어떤 때는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워 착각을 주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지극히 평범하고 남루하여 미처 모르고 지나쳐 버릴 때도 있다.

그런데도 운명이란

지나친 그것이 멀리 돌아 다시 한번 스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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