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쿠우니무우: ‘고양이’를 부르는 마사에 만의 고유명사. 마사에의 아버지 소 타케유키의 시 가운데 하나로 <시덴. 제 34호(1984.7)수록>에 나타나 있다. 마사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딸이고 24세에 행방불명된다.
1. 프롤로그
가을인가 보았다. 녹슨 창가 작은 단풍이 하루가 다르게 물들고 있었다.
그다지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이 또 이어질 터널 속 같은 내일.
오래전부터 나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 지인들은 서른한 살이나 된 계집이 이런 곳에서 썩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가 정확하다. 스물아홉 살에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허름한 고서적 서점을 인수했다. 온통 퀴퀴한 냄새가 나는 책들뿐이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꽤 찾는다. 나름 디자이너적인 안목으로 바꿔 놨으니...
고서적 북 카페!
나는 그렇게 부르고 친구들은 그냥 7080 서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아무튼 답답한 조직 안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가는 청춘보다 훨씬 매력적인 삶이라고 자부했었다.
정말 특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저 그런 아침이었다. 다만 단풍에 물이 오르면서 가을을 알리는 그 정도 예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아침.
아침에 출근하면 언제나 하는 매일 똑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그런 일상의 아침이었다.
모든 창문을 활짝 열고 책장마다 올려놓은 화분들에 물을 주고, 가게 앞 작은 공원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커피 분쇄기에 신선한 원두를 부어 넣고 밤새 예열된 머신 위에 얼마 전 구입한 잔들을 예쁘게 올려놓고는 다시 포터 가득 원두를 분쇄해서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린다. 카운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컴퓨터를 켜고 메일 확인을 한다. 여전히 훈이는 소식이 없다는 것을 매일 아침 빈 우편함을 한참 들여다보고 두 눈으로 정확하게 확인하고는 우울한 표정을 애써 삼킨 채 새로 들어온 책들을 분류하면서 정리하기 시작한다. 재활용매장에서 어렵게 구한 오디오 턴테이블 위에 에띠뜨 삐아쁘 판을 올린다. 소독제를 마른걸레에 듬뿍 바르고는 서가를 다니며 천천히 걸레질을 한다. 이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삐아쁘의 소리가 한 데 어우러져 묘한 합창을 듣는 것 같다. 걸레질을 하면서 매일 아침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생각을 반복한다. 훈이가 버리고 떠났다는 그 감성을 잔뜩 안고는 우울을 즐기는 사람처럼...
언제나 그렇게...
그때였다. 기적이 내게 고개를 내민 순간이!
책들 사이에 일기장처럼 생긴 것이 눈에 띄었다. 빛이 바래 누랬다. 살짝 책장을 넘겨보았다. 온통 일본어다. 갑자기 구미가 확 당겼다. 누렇게 얼룩진 종이 위에 푸른 잉크로 또박또박 눌러쓴 그것은 온통 히라가나로 가득했다.
1945년. 어른 필체는 아니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히라가나 정도는 보고 적당히 읽을 수는 있었다. 번역이야 어차피 구글 번역기로 대충 돌리면 적당한 의미는 파악이 될 것이었다.
마치 갑자기 삶에 목표가 생긴 사람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 옆으로 한두 권 일기장이 더 눈에 띄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섞여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일기장은 1985년이었다. 그 또한 어른 필체가 아니었다.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가슴이 벅찼다. 듣기만 해도 아득한 연도에서 보내온 러브레터를 받은 느낌.
1945년... 1985년... 그때를 살았던 소녀들이 적은 일기장.
2016년 서른 하나인 내가 감히 읽어내는 비밀 일기.
그날 이후, 일본어 번역을 해 가면서 일기장 두 권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특별하지 않은 날, 내 인생은 정말 기적처럼 변했다.
2.
1985년 10월 18일 오후 4시 10분.
온몸에 힘이 없다. 집에 먹을 거라고는 딱딱한 누룽지 한 덩이가 전부다. 안방에서는 아버지 마른기침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린다.
열다섯 살 가을.
책상에 두 다리를 걸치고 마이 마이와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느린 발라드 가사가 음울하게 달팽이관을 타고 흘러든다. 느린 오후를 더 느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애절한 발라드풍. 삐걱거리는 책상 앞 창 문틀에 먼지가 뽀얗다. 창살은 오랜 시간과 공간의 결합을 고스란히 담고 앉아 있었다. 먼지 층이 두텁게 자리를 잡아 정착되어 있었다.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없다. 그래서 내가 올려다보는 창밖은 언제나 격자무늬 창살들의 이끼 같은 먼지 틈 사이로 뿌연 세상이 보이는지도 모른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공기 파장에 운율을 넣듯이. 녹슨 의자 옆에는 아주 오래된 전축이 놓여있다. 태어나 한 번도 켜 본 적이 없는 고장 난 전축. 크기가 피아노만 하다. 가끔 심심할 때 뚜껑을 들어 올려보면 알 수 없는 동그란 나사들만 몇 개 있다. 그 옆에는 영어로 뭔가 적혀있긴 하지만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나사를 마구 돌렸다 해 봐도 아무 반응이 없다. 뒤에 전기 스위치가 있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그 플러그를 찾아내지도 꽂지도 안았다. 레코드판을 올리는 턴테이블조차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아래쪽 문을 열면 오래된 레코드판만 수 십장 들어있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낡은 전축.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길게 뻗어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집어 올렸다. 가방에서 시집 한 권을 꺼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오늘 국어시간이었다. 중년의 나이에 안경 쓴 키 큰 국어 선생님. 구릿빛 얼굴에 항상 진지한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한 편의 시를 읽어준다. 우렁차게 큰 목소리를 가진 그가, 시를 낭송할 때는 완전히 다른 음색을 낸다. 시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고 여리게도 부드럽게도 힘차게도 한다. 아이들은 가끔 그 목소리가 낮 간지러워 키득거리며 웃기도 한다. 나는 그가 낭송할 때면 눈을 지그시 감는다. 차라리 그게 낫다. 의자에 앉아 있는 우리 같은 처지에서 볼 때면 교실 한가운데 기다란 자작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자작나무가 아무리 감정을 조절해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읽어 내리더라도 시각적인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눈을 감았다. 그러면 귀에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 가냘픈 음색, 잦은 숨소리까지 다 느껴진다. 시를 쓴 사람의 감정을 조금은 느낄 수 있어지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시가 적힌 흰 종이를 보면서 감정을 최대한 살려 읽어 내려갔다.
진실로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등 전체가 마비된 것 같이 아팠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나는 더 이상 참아낼 수가 없었다. 이제는 등짝 그 부위에서 온몸으로 통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아렸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온몸을 파고드는 느낌. 그 통증.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아니 참지 않겠다.
나는 순간 몸을 홱 돌렸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새우 눈을 한 민주가 안경너머로 순간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영점 오 밀리미터 볼펜을 든 민주 팔이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사정없이 민주 얼굴에 침을 뱉어 버렸다.
그는 낭송하던 시어 끝자락을 일순간 멈췄다. 교실이 정적 속으로 빠졌다. 민주 안경 위로 내 침이 흘러내렸다. 내 실내복 등은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 있었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었다. 민주 아버지는 무역회사 사장이었다. 그 아이는 돌아가면서 반 아이들을 하나씩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차례차례 복종시켰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자리가 바뀌면서 그 아이가 내 뒤에 앉게 되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등 뒤의 흔적은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고통이었다.
민주는 입술을 깨물더니 바로 내 머리채를 양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아이들의 비명소리.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떨어져 내렸다. 나는 흔들리는 대로 가만 놔두었다. 그대로. 그가 달려왔다. 그와 아이들 몇이 민주를 말리면서 겨우 내게서 떼어 냈다. 교실바닥에 머리카락이 눈처럼 떨어졌다. 민주는 바닥에 주저앉더니 엉엉 울면서 소리를 질러댄다. 흥분한 아이 얼굴은 온통 얼크러진 체 같았다. 뭔가를 걸러낼 때 씨줄 날줄 사이로 통과시키는 체. 도대체 세상의 무엇을 통과시키려고 앉아서 얼굴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 피부 알레르기가 있는 민주는 작은 긁힘에도 그 부위만 발갛게 부어오른다. 아마도 수업 시간 내내 일부러 제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고 있었을 것이다. 시를 얼굴로 걸러낼 모양으로. 핏빛으로 드러난 하얀 팔도 온통 자해를 한 흔적마다 벌겋게 줄이 올라와 있다. 마치 괴물로봇 같았다. 목에 핏대를 올려 울어대니까 더 벌겋다. 아이들은 겁이 나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는데 그가 아이를 시켜 문예실로 나를 불렀다. 그곳은 마치 아버지 방 같았다. 담배연기, 커피냄새, 책 냄새, 활자 냄새...
“아버님 존함이..... 이 시우 선생님 맞으시지?”
“........ 네.........”
나는 순간 심장이 출렁했다. 어릴 적부터 누군가 이렇게 물을 때가 가장 무서웠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내게 누군가 이렇게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리고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면 또 산송장처럼 몇 달을 앓아누웠다.
“다음에 또 누군가 괴롭히면, 침을 뱉지 말고 한 대 쳐라!”
“아버지가...... 사람 때리면 똑같은 사람 된다고........”
그는 입 꼬리만 문 채 허탈하게 웃었다. 아주 허탈하게. 그리고 내게 시집 한 권을 주었다. 시집에는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시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집에 안 팔린 시집이 방구석과 다락에 그득했다. 그래도 이것은 처음 보았다.
“네가 간직하거라! 아버지 보여드리지 말고.”
“..........”
“아버님이 스물두 살에 낸 첫 시집이다. 출판 금지당하면서 아버지가 남은 것까지 다 불살라버렸지. 아마 마지막 남은 시집일 거다. 네가 주인이다! 언젠가는 유품이 되겠구나. 꼭 간직하렴.”
“.........”
“꼭 숨겨라. 세상이 지금보다 더 좋아지면 그때 내거라.”
나는 전축 밑을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전축 뚜껑을 열고 안을 보았다. 몸체 안 오른쪽 구석에 쥐가 파먹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종이봉투에 시집을 넣고 똘똘 말아 그 속에 넣었다. 어머니가 발견하지 못할 곳은 집에서 여기밖에 없다. 어머니가 알면 아버지보다 더 먼저 불 싸질러 버릴 것이다. 국밥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쓰레기라며. 사람 폐인 만드는 요물이라며.
1946년 11월 15일 오후 4시 10분.
비가 왔다. 아버지가 우산을 들고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아버지는 대학에 강의가 없다고 했다. 하필이면. 내 무릎 정강이뼈에 손수건이 감겨 있었다. 그 사이로 피가 비쳤다. 아버지는 잠시 놀란 얼굴이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업었다. 나는 집까지 아버지 등에 업힌 채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는 거실로 쓰는 작은 다다미방에 불을 지폈다. 할멈이 아버지에게 불 지피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시다 할머니는 이제 일주일에 두 번 와서 집안일을 하고 간다. 나머지는 아버지와 내가 할 몫이다.
내 열다섯의 가을 오후이다. 비가 간간이 내린다. 다다미방이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무릎의 상처를 보더니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리고 종이들이 널브러진 책상으로 가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 오전 내내 아버지는 원고를 쓴 것 같았다. 잉크 냄새가 온 방에 가득했다. 차가운 방 안에서 정신없이 글을 썼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병원에 들어간 다음부터 글을 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나는 따뜻해지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담하고 작은 집 시타메구로에서의 첫 생활. 아버지와 단 둘이 고요한 생활을 시작한 이 집. 정신병원에 들어간 어머니의 긴 그림자를 안고 수많은 하인들과 내가 태어나 자란 저택도 다 사라진 채 마치 유배당한 사람처럼 아버지는 매일 책상에만 앉아있다. 심심하고 재미가 없다.
갑자기 늦은 권태와 함께 졸음이 몰려온다. 내 얼굴 옆에 와 엎드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쿠우니무우. 어머니는 ‘고양이’라 불렀고 아버지는 ‘캣츠’라고 일러주었지만 나는 ‘쿠우니무우’가 좋다. 코언저리와 배가 하얗다. 이마와 등은 온통 부드러운 잿빛에 검은 줄이 멋지게 나 있다. 우아한 빛깔과 자태가 볼수록 멋지다. 어머니와 내가 사랑한 쿠우니무우. 다 사라지고 남은 건 아버지와 쿠우니무우뿐이다. 오늘따라 나를 더욱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내 마음을 알고 위로라도 하듯이. 등이 따뜻하다. 눈이 감긴다. 아. 잠이 온다.
3.
85년 가을 4시 30분.
아버지의 마른기침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또다시 적막이 흐른다. 창틈으로 선선한 바람이 스친다. 어머니는 지금쯤 시장바닥 구석에서 함지박 하나 놓고 과일을 팔고 있을 것이다.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면서. 먼지가 토착된 창살 너머로 어머니가 공들이며 키운 국화 화분들이 보인다. 밥상보다 더 정성을 기울이는 화분들. 그래서 저 녀석들은 튀밥 모양인가 보다. 하얀 튀밥. 결국은 내 주먹보다 더 굵은 송이. 나는 웬만하면 그 근처는 지나기도 싫어한다. 깨알 같은 벌레들이 가득 살고 있다. 어머니는 그것을 ‘비리’라고 했다. 어디서 온 말인지 무슨 어원인지 알 길은 없다.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온갖 언어들은 국적불명 출처불명일 때가 많다. 그래서 절대 학교나 친구들 앞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애지중지 키우는 국화 화분, 아니 비리. 결국 비리를 키우는 것이 아닐까? 약을 뿌려도 돌아서면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피부가 아주 민감했다. 특이한 풀이나 향에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고 심할 때는 구토도 했다. 그래서일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나 세균들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차라리 큰 벌레가 더 낫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들은 어떤 현상을 일으킬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창밖으로 국화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그 근처는 한 발자국도 가지 않는다. 어머니가 키우는 비리는 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복이라는 것을 입어보지 못했다. 어른들이 ‘교복자율화 세대’라고 했다. 나는 가끔 친척들 집에 가면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다. 언니들의 교복을 꺼내 입어보는 것이었다. 옷장에 걸린 그 하얀 칼라의 세일러 교복이 정말 입고 싶었다. 시장에 파는 싸구려 옷보다 몇 배나 마음에 들었다. 민주는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아주 비싸다고 했다. 자세히 보면 티셔츠도 아디다스였다. 가방과 도시락 주머니는 프로스펙스. 차라리 그런 걸 입어보지 못할 바에야 교복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모두 똑같아 보이니까. 메이커 딱지로 교문 들어설 때부터 차별받는 건 정말 싫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메이커를 사서 입고 들고 다닌다. 우리 반에서 나만 없다. 운동화도 어머니가 시장에서 천 원에 사 온 새하얀 운동화다. 전교생 가운데 그런 운동화를 신고 등교하는 학생은 통틀어 나 밖에 없다.
46년 11월 4시 50분.
잠깐 잠이 들었다.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내 옆에서 그대로 웅크리고 잠이 든 쿠우니무우를 바라본다. 마치 보드라운 털 뭉치 같다. 아버지는 여전히 바쁘게 뭔가를 책상에서 쓰고 있다. 나는 그냥 자는 척했다. 나른한 오후가 이제 저물고 있다. 고양이 한 마리와 열다섯 살 마사에가 아버지 서재 바닥에 누워 뒹굴고 있는 이 시간. 시간이 그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
내 나이 열다섯.
이 집에서는 조용히 발소리 죽이며 걸어 다니는 하인들도 없다. 하루종일 나만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유모도 없다. 긴 복도나 이층이나 넓은 정원이나 꼭대기 다락방이나 헛간이나 높은 아치형 거실 따위는 아예 없다. 그냥 다다미방 세 칸. 부엌 하나. 작은 마당 하나. 덩그런 집 한 채. 마당 위의 작은 하늘 한 조각. 엄마도 사라졌고 내가 좋아하는 정원도 사라졌고 뒤뜰 커다란 나무 밑에 만들어 둔 내 아지트도 사라졌다. 모두 사라졌다.
남은 건 마사에와 아버지와 고양이. 쿠우니무우. 나의 사랑스러운 쿠우니무우. 나는 이 녀석을 평생 ‘쿠우니무우’라 명칭 할 것이다. 쿠-우-니--무-우!
이 작은 고양이가 꼬리를 쭉 뻗어 하품할 때면 정말 ‘쿠-우-니-무--우!’ 크렁 거리며 말한다. 나는 그런 것을 종종 들었다.
쿠우-니--무!
갑자기 무릎 정강이뼈의 상처에 통증이 왔다. 아버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요사이 종종 있는 일이니까. 미츠코는 매일 나를 괴롭힌다. 작년 피난학교 시절에도 내내 나에게 창피를 주고 괴롭혔다. 선생님들이 매 시간 지켜봐야 할 지경이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치마를 뒤에서 잡아 늘어뜨렸다. 그리고 청소 시간에는 복도를 지나가다 또 놀려댔다.
“조센징- 공주마마!”
나는 들고 있던 대걸레로 달려들었다. 미친 듯이. 참을 수가 없었다. 주변의 아이들이 나를 붙잡고 말렸다. 서로 엉켜 붙어 싸우는 바람에 같이 넘어져 버렸다. 나는 복도에 그대로 나자빠졌다.
미츠코는 그런데도 벌떡 일어나 달아나면서 혀를 쏙 내밀고 또 놀려댔다. 나는 다시 달려갔다. 그리고는 미츠코 머리채를 잡아 뜯었다. 절대 놓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달려와 말렸다. 그러다 내가 다시 복도로 넘어져 버렸다. 무릎이 그대로 깨졌다. 정강이뼈가 부서진 것처럼 아팠다. 일어나 보니 바닥에 피가 묻어있었다. 미츠코는 특유의 애교 섞인 울음을 울어댔다. 많이 쓰라렸다.
예전에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는 아이들의 놀림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화를 내면 되었으니까. 정말 어머니가 싫다고, 조선이 정말 싫다고. 그렇게 소리 지를 대상이 내 집에 있었으니까. 내가 막 화를 내고 소리 지르면 어머니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화가 나 파르르 떨리는 내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면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원에 들어가고부터 누군가 그런 말을 하기만 하면 막 화가 났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아이에게 바로 죽을 듯이 덤빈다. 집에는 더 이상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 화를 감당해 줄 사람이 우리 집에는 이제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어머니 흉을 보거나 모욕을 주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청소를 마치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또 미츠코가 멀리서 혀를 쏙 내밀며 놀리고 지나갔다. 나는 매서운 눈초리로 미츠코를 노려보면서 서 있었다. 그리고는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복도 끝에서 다나까 선생님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백작가문 체통을 지켜야지!”
나는 그런 다나까 선생님 태도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심통 난 목소리로 쏘았다.
“신헌법은 백작 따위 인정 안 해요, 선생님!”
“마사에!”
“저는 조센징도 쪽발이도 아니에요, 선생님!”
“말조심해야지!”
“조센징 황녀도, 일본인 백작도 없어요. 이제!”
“마-사-에.........”
“남은 건....... 가난한 집과 병든 어머니...... 불쌍한 아버지... 뿐이에요!”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 다나까 선생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내 무릎의 피를 닦더니 상처를 동여매 주었다.
4.
85년 10월 오후 5시 10분.
아버지는 방 안에만 있었다. 하루 종일. 실어증 환자처럼. 그리고 어두운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보았다. 안방 한쪽 벽면에 천장까지 들어찬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읽었다. 한국문학... 흑인문학전집... 세계 문학... 교양인 강좌.... 철이 들면서부터 신물 나도록 표지만 마르고 닳도록 읽어 내린 그 책들. 온통 한자투성이라 아예 읽기를 포기해 버린. 아버지가 유일하게 말문을 여는 때는 딱 그때뿐이었다. 내가 아버지 옆에서 그 책들 중 하나를 꺼내 들고 한자를 물어볼 때. 아주 짧고 간단히 말하고는 다시 책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하루 종일 설거지통에 손을 담근 채 중얼거리면서 욕을 해댔다. 모든 대상에 대한. 아버지와 가족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참 모질고 독한 저주. 바로 그것. 세상에 대한, 남편에 대한, 모든 살아있는 대상에 대한 분노와 저주. 아버지는 그 치열한 저주 한복판에 앉아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었다. ‘나는 바보로소이다.’를 인정하면서 내내 침묵했다. 어머니의 저주가 멈추지 않을수록 아버지의 무기력도 멈추지 못했다. 아니 아예 추락해 버렸다. 아버지는 밤마다 약으로 하루를 버텼다. 진통제, 수면제, 심장 안정제, 근육 이완제........ 내가 어릴 적 아버지가 가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끌려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때,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온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불 꺼진 마루에 앉아 어린 나는 울고 있었고, 치맛자락이 찢어진 채 신발 밑창이 너덜대면서 어머니는 얼굴이 마치 귀신처럼 되어서 쓰러질 듯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며칠을 수소문하면서 헤매다 지칠 때 즈음이면, 늦은 밤이나 새벽녘에 아버지는 돌아와 있었다.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아버지가 글을 쓰지 않으면서 그런 일은 사라졌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집을 전부 꽁꽁 묶어 다락방에 넣고는 자물쇠로 잠가 버렸다. 그래도 불을 지르지는 않았다.
아침 등교 때마다 아버지가 깨어있는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아파서 반 의식불명 상태이거나. 나는 이미 아버지의 자는 모습에서 죽음을 보아 버렸다. 영혼이 빠져나간 바로 껍데기 그 자체였다. 그럴 때마다 덜컥 겁이 나서 얼른 방문을 닫고 나와 버리거나 아니면 일부러 자는 아버지 발을 살짝 건드리기도 했다. 그래도 꼼짝을 하지 않으면 그때는 와락 눈물이 쏟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심하게 발을 흔들어댄다. 내 눈물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옷걸이 쪽으로 살그머니 걸어간다. 나는 아버지 코르덴 재킷 그 특유한 냄새를 사랑했다. 한참 코를 들이박고 들여 마셔대고는 재킷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간다. ‘버스비 가져가요.’ 머리맡에 이렇게 간단히 몇 자 적고.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침묵 속에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면서 하루 종일 집에 없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가 다시 글을 쓴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면 아마 다락방의 책들도 전부 불 싸질러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와 나만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가끔 아버지 재킷 주머니에서 용돈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은 아버지가 잡혀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다 쓴 원고는 내가 운반했다. 늦은 밤 어머니가 돌아올 때쯤 이면 아버지는 그날 쓴 원고를 내 방에 숨겼다. 그리고 자정 무렵. 내가 깊은 잠이 들었을 즈음, 다시 내 방 문이 열리고 아버지는 전축 밑에 숨긴 원고를 꺼내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밤에 어머니는 피곤에 지쳐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고를 보내야 하는 날이면 아침에 책상 위의 내 가방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무거웠다. 그런 날은 언제나 교문 앞에 출판사 직원이 서 있었다. 며칠 지나 아버지 주머니를 만지면 지폐가 두둑하게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전축 밑 작은 상자 안에 그 지폐들을 모았다. 아버지는 재킷 주머니 속에 항상 몇 천 원을 넣어두었다. 나를 위해. 어린 딸을 위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치. 내가 용돈이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거기에는 몇 천 원이 들어 있었다. 딱 그만큼의 돈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끌려갔다 온 그날.
한 달을 시름시름 앓다가 겨우 살아난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는 또 욕을 퍼부었다. 그다음 날. 어머니는 커다란 함지박 하나를 들고 시장에 나갔다. 청과물 조합에 가서 과일을 한 바구니 받아서 이고는 집 근처 시장에 나가 길거리에 앉아서 팔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사라졌다. 더 이상 경제를 책임질 수 없는 무기력한 부양가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제 집 안에서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있던 경제적인 주도권마저 다 잃어버린 샘이다. 어머니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욕을 하게 되고 점점 더 거칠어져 갔다.
장사를 처음 시작하고 몇 달간 어머니는 밤마다 부뚜막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그 소리는 온 집안 벽으로 스미듯 새어나갔다. 스산한 여자의 울음소리. 아버지는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떤 날은 도로단속 나온 깡패들에게 맞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시장 안 장사꾼들에게 쫓겨나 과일이 전부 장바닥에 짓밟히기도 하고. 서러움과 울부짖음을 밤마다 부뚜막에서 토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숨도 쉬지 않았다.
어린 나는 어떤 날은 어머니가 불쌍해 울고 또 어떤 날은 아버지가 불쌍해 울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자체가 서럽고 불쌍했다. 그런 몇 달이 지나더니 어머니는 점점 강해졌다. 이제는 부뚜막에서 우는 횟수보다 침을 발라가며 돈을 세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점점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쓰는 원고지의 글들은, 그저 글 나부랭이일 뿐이고 돈으로 죽어도 못 바꿔먹는 쓰레기였다. 당장 한 끼 끼니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은 모두 쓰레기였다. 그리고 심지어 사람 목숨까지 끊을 수 있는 요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46년 가을 저녁 5시 50분.
아버지는 이제 다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이제 두 번 다시 백작은 될 수 없다. 어머니도 그랬으면 좋겠다. 일본이 패망하고 신헌법에서 황족과 화족들의 작위를 없앤 것처럼. 나의 어머니도 그랬으면 좋겠다. 조선도 새로운 나라를 준비 중이라고 학교에서 들었다. 그 새로운 나라에서 어머니의 작위도 없앴으면 좋겠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나는 그것이 너무 싫다. 아버지는 대마도 성주 소 백작이 아니다, 이제. 그냥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그러나 아버지 말이 어머니는 영원히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불행한 공주. 그 불행은 바로 우리 가정을 말하는 것이다. 내 아버지, 그리고 딸인 나 소 마사에. 우리가 어머니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로 기억되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다.
우울한 생각은 화로에 불이 오를 때까지 만이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가끔 우울하게 앉아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화로에 은행을 굽기 시작한다. 잘 구워진 말랑한 은행 한 알을 입에 물고 있노라면 거기까지가 우울의 시간이 되어버리곤 했다.
내일은 또 어려운 작문 시간이 있다. 지금 나는 나만의 쿠우니무우와 뒹굴며 아버지의 구멍 난 양말을 들여다보고 있다. 발가락이 세 개 튀어나왔다. 내일은 이시다 할머니가 오는 날이다. 내일은 꼭 아버지 양말을 기워 달라고 해야겠다.
나는 바느질을 하지 못한다.
어릴 적, 이시다 할머니의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서 따라 하다가 손끝에 피가 난 적이 있었다. 내 옆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내 손끝의 피를 보더니 갑자기 거품을 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어린 나는 너무 놀라 바느질거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바늘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이시다 할머니가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버지는 화가 난 얼굴로 처음으로 무섭게 말했다.
“집 안의 모든 바늘은 다 치워!”
그날 이후, 이시다 할머니는 집안의 모든 손바느질을 꼭대기 방에서 문을 잠근 체했다. 나는 절대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시타메구로에 이사를 오고부터 나는 집안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사를 하고 짐들을 모두 정리해 준 이시다 할머니는 어느 날, 나를 불렀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에서 일을 해 온 하인이었다. 할머니는 이제 시타메구로에서 가까운 먼 친척 집에 살게 되었다. 평생을 소 가문에서 일을 해 온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내 눈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마사에. 어머니를 잃지 말아!”
사람들이 어머니를 말할 때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어머니의 고통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 고통스러운데 어머니는 얼마나 더 고통스러울까. 아버지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너무 많은 죽음을 봐 버렸다고.
조선의 무수한 죽음들과 전쟁을 반석 삼아 그 위에 우리 가정이 세워진 것이 맞는가 보았다. 정략과 전쟁과 정책과 죽음과 고통과 비명 위에. 예전에 어머니 방 상자 속에서 결혼사진을 본 적이 있다. 조선의 신문에 실렸던 어머니의 결혼사진. 거기에 아버지의 얼굴은 삭제되고 없었다. 어머니의 나라 조선은 아버지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어머니는 팔려온 신부 그 이상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나는 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애틋한가를.
어릴 적, 자다가 잠을 깬 적이 있었다. 유모가 옆에 없었다. 달밤이었다. 유모를 부르며 어린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가는데 아버지가 거실에서 어머니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높은 아치형 창으로 달이 환하게 비쳐 들어와 거실 가득 달빛이었다.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내 아내!”
그래서 나는 조선을 더 싫어했다. 아버지와 나를 미워하는 조선을. 어머니가 없는 지금. 나는 어머니가 너무 그립다. 그리고 어머니의 나라 조선이 그립다. 어머니와 손잡고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 내 어머니 나라 조선.
5.
85년 저녁 6시 10분.
나는 지금 곰팡내 나는 방 안에서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무섭고 두렵다. 가난이나 초라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운명에 대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형성된 그 알 수 없는 운명의 두려움.
아버지는 한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장가를 갔다. 시골 작은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 아내는 외딴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아버지는 매일 가르치는 아이들과 들판을 뛰어다녔고 밤마다 굶주린 아이들에게 저녁을 해 주곤 했다. 할머니는 쌀을 대기가 바빴다. 할머니 말로는 ‘쥐꼬리 만한 월급’에 나가는 것이 더 많은 꼴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어린 아내는 아버지의 친구와 정분이 나서 도망을 갔다. 아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골을 전전하며 교사생활을 했다. 할머니는 쌀 대기가 너무 바빴다. 아버지의 자취방에는 온통 책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열여덟에 시집을 갔다. 육 형제의 막내였다. 할머니가 어머니 일곱 살 때 병으로 죽었다. 그때 이미 할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살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계모 밑에서 몇 년을 살았다. 할아버지는 그 후 어머니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죽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친척이나 형제들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말 그대로 천덕꾸러기 막내였다. 농사철에는 친척집 안채 위 칸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그 집 아이들을 봐주었고 겨울에는 시집간 언니들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래서 형제들은 어머니가 철이 들자마자 얼른 시집을 보냈다. 시골에서는 꽤나 논마지기가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갔다. 사내는 술에 난봉꾼에 노름까지 했다. 어머니는 사흘에 한 번씩 얻어맞고 살았다. 그리고 사내아이를 하나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에 고기를 잡으러 간다며 나간 사내는 죽어서 돌아왔다. 전쟁 끝에 남았던 지뢰가 터져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 후 한 달이 채 안 되어 돌이 갓 지난 사내아이도 죽는다. 어느 날 늦은 밤, 경기를 심하게 하더니 그 밤을 못 넘기고 죽고 만다.
그때 어머니 나이 스물.
아버지는 그 후로도 계속 시골학교만 다니면서 교사생활을 했다. 할머니 말대로 도저히 그 꼬락서니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반 강제로 도시에 나와 세무서에 취직을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소개로 어머니와 선을 보게 된다. 어머니는 다시 결혼을 한다.
1946년 저녁 6시 40분.
시타메구로의 뜰은 아주 작고 소박하다. 아버지는 지금 마당 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내가 피난학교 시절 만들어 준 담뱃잎을 아직 간직하며 조금씩 피우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다보니 비가 그쳤다. 아버지의 어깨가 더 가늘어 보인다.
피난학교에 갔던 그 일 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우리 집 우리 가족이 보고 싶어 혼이 났었다. 그래서 매일 친구들과 담배 잎을 따서 말렸다. 다시 집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드릴 잎을 말리면서 그것을 유일한 위안으로 버텼던 것이다. 전쟁은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 머리 위로 터지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저택 정원의 꽃들을 다 베어냈다. 오래된 나무들만 남겨둔 채. 그리고 거기에 고구마와 옥수수를 심었다.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모든 물자는 전부 전쟁터로 향하고 있었다. 남은 일반인들이 먹을 식량은 없었다. 하인들과 나는 아버지를 도와 곡식을 심었다. 정원에는 꽃들만큼이나 많은 옥수수가 주렁주렁 열렸다. 땅을 파면 고구마가 그득했다. 우리 집 정원이 마치 보물 상자 같았다. 수확을 할 때면 나는 바구니 가득 욕심껏 고구마를 담아 질질 끌었다. 하인들은 그런 어린 나를 보면서 웃었다. 마치 하인들처럼 검게 그을리고 야위어진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게 말했다.
“이제 우리 마사에. 이거 먹고 포동포동 살쪄야지!”
어머니가 보고 싶다. 아버지는 조금 더 나아지면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머리를 빗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병원에서는 누가 빗어줄까? 어머니는 아버지가 끓여주는 콩 수프도 좋아한다. 병원에도 그런 것이 나올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내가 보호해야 하는데.
저택에서 이사하던 날 밤. 아버지는 오래된 향나무 아래 구석에서 혼자 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해서 처음 저택에 오던 날 찍었던 사진 속의 그 나무. 그날 어머니를 병원에 보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정신병원 구급차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날 밤. 그 큰 저택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저택을 팔지 않으면 세금을 못 낸다고 아버지가 그랬다. 이제 아버지는 화족(일종의 귀족)이 더 이상 아니었다. 헌법이 공포되면서 황족과 화족은 전부 많은 재산세를 내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돈이 없었다. 아버지는 책과 그림과 시와 학생들만 좋아한다.
밤마다 창 밖에서 서성이던 어머니 그림자가 이제는 없다. 저택에 살 때는 밤마다 어머니가 가끔 창밖을 서성이곤 했다. 하인들과 아버지의 목소리, 등불, 어머니의 신음소리, 비명소리.
작년 7월에도 역시 그랬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군인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하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택에 어머니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길은 없었다. 밤마다 울면서 어머니가 안전하기를 빌었다. 전쟁에 나간 아버지보다 아무도 보살펴주지 못하는 어머니가 더 걱정되었다.
여기 이사 오고부터는 잠이 잘 드는 편이다. 쿠우니무우와 나는 가끔 아버지 서재에서 잠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아버지가 펜으로 종이에 쓰는 그 사각거림이 좋다. 가만히 들어보면 일정한 리듬이 느껴진다. 사각사각 사가각 사각사각 스스스 스슥. 소리와 함께 늦은 밤 작은 서재에 가득한 커피 향과 태우다 만 시거 냄새, 잉크 냄새. 나는 아버지를 닮아 커피를 사랑한다. 아버지는 미국에 유학 간 친구가 가끔 보내주는 커피 가루를 조금씩 아껴서 마신다. 나는 그 향을 사랑한다.
6.
1985년 10월 18일 저녁 7시.
내 우울의 시작은 바로 이 지점이다. 남편과 자식이 죽은 자리, 그 자궁 위로 태어난 질긴 생명체. 태어날 때부터 탯줄을 온몸에 칭칭 감고 태어난 아이. 내 존재의 실체. 어머니의 자궁 속 그 깊은 곳에서 벌써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안으로 자살을 시도한 나. 그래서 나갈 세상이 무섭고 겁이 나고 자궁 속의 내 존재 자체가 점점 불안하고 두려워 하루 종일 허우적대며 탯줄을 칭칭 동여맸을 것이다. 세상 밖이 두렵고 무서워. 죽은 자들 무덤 위에 박차고 태어나는 내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와 혐오와 구역질 때문에.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 때문에 열다섯의 나는 서서히 미치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주검의 자리에 피는 꽃은 절대 시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두 주검을 딛고 태어난 나는 애초부터 살 의지나 목적 따위가 없었는지 모른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그리고 점점 어머니가 혐오스럽다. 아귀처럼 살아내는 그 모습이. 아버지는 점점 야위어 가고 있었다. 하루하루 생활의 피를 빨아 먹히는 것 같은. 어머니는 점점 퉁퉁해져 간다. 하루하루 생활의 피를 한 모금씩 빨아먹는 것 같다.
이대로 이 낡은 집에서 이 늙은 자궁 속 같은 집에 그대로 묻혀버리고 싶다. 아버지의 책 더미와 담배 재속에서 잠들고 싶다.
쾅-쾅-쾅!
갑자기 대문을 누군가 요란하게 차는 소리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안방으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이불을 돌돌 만 채 앉아 있었다.
“이- 시- 우! 문 열어!”
아버지는 갑자기 내 손을 움켜쥐었다.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딸!”
1946년 11월 15일 저녁 7시.
아버지는 내가 조금 더 어릴 때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한동안 집에만 있었다. 어머니의 병 때문이긴 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 우리는 가끔 산에 올라갔다. 철들면서부터 아버지와 유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등산이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안개가 피어나는 협곡 속을 조금씩 걸어가면 아버지는 내 뒤를 따라왔다. 그저 맑게 웃으면서.
내가 다리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고 울 때면 아버지는 나를 업어주었다. 아버지의 야윈 등은 그래도 따뜻했다. 그래도 칭얼대면 나를 바위틈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리고 살짝 모퉁이로 돌아가 산딸기를 손바닥에 한가득 움켜쥐고 왔다. 아버지의 손은 온통 산딸기 물로 벌겋게 변해 있었다. 나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아버지 입에 하나 내 입에 하나 넣었다. 그 맛이란 온 산을 통째 입 안에 넣은 맛이었다.
가끔 한밤중에 머리가 깨질 듯 아플 때가 지금도 가끔 있다. 그럴 때면 발치에서 자는 쿠루니무우를 안고 다시 잠이 들곤 한다. 산에 가고 싶다. 아버지와 갔던 그 협곡과 산등성이에 올라 맑은 샘물을 마시면 머리가 말끔하게 나을 것만 같다. 나는 어머니의 우울도 아버지의 우수도 닮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 오로지 온전한 내 인생을.
나는 아버지 몰래 살짝 마당으로 나왔다. 구석에 놓인 등산화를 꺼냈다.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입으로 후후- 불면서 털어냈다. 새벽에 일어나 산에 가야겠다. 멀리 어두워지는 산이 아련하게 보였다. 산에 올라가면 머리가 시원해질 것이다.
7. 에필로그
오늘 오후는 가게 문을 일찍 닫을 것이다. 수요 집회에 가야 한다. 이번 주 토요일은 몇몇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작은 모임도 계획되어 있다. 다음 달은 고서적카페에서 고서적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일기장에 집중해 있는 몇 달 동안, 많은 것을 다시 보게 되었고 다시 깨닫게 되었다. 내 삶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어린 소녀들이 갈망했던... 우울 속에서 간절하게 원했던... 그날을 내가 쓰레기 던지듯 하루하루 버리면서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훈이가 돌아올 것이다. 허세와 가식 다 버리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이제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다. 두 번 다시는 훈이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페루로 혼자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는.
소중한 사람들, 소중한 시간들... 소중한 하루...
그 모든 것을 이제 다시는 대충 내던지며 살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
가게 문을 닫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한 통 왔다.
훈이다!
“여보세요! 어? 서울행?..... 공항 배웅 갈게. 서울은 오늘 많이 추워! 너한테 맞는 걸로.... 몇 벌 사놓았는데... 음.... 그때 그 주점?... 아직 있을까.... 같이 찾아보자...... 그래, 크리스마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