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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Dec 07. 2023

교사, 세상에 유일무이한 교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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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는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주로 판서와 질의·응답과 강의를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단원 내용의 특성이나 성취 기준에 따라 학생들이 모둠을 구성해 토의나 토론을 하고 발표하거나, 개별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점이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을 때는 판서와 강의를 중심에 두는 이른바 전통적인 수업 방식을 따른다.


판서법이나 강의법이 원래부터 ‘전통적인 수업 방식’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육이 주로 구술로 이루어지던 어떤 사회에 어느 날 비교적 손쉽게 쓰고 지울 수 있는 판(板)이 출현한다. 직접 경험(활동이나 실습)을 통한 교육이 일반적인 현장에 교육자의 설명과 논증이 아니고서는 모든 학생을 가르치기 힘든 강의 교육이 나타난다. 이렇게 판서와 강의는 교육 기술이나 공학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 중의 하나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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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이엔가 판서와 강의는 현대적인 교실에서 특별한 의미도 실효성도 없는 교수법처럼 받아들여졌다. 각종 컴퓨터 장비들과 첨단 기능을 장착한 전자 칠판 등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교사가 칠판에 무엇인가를 적고 이야기하는 방식의 수업은 철 지난 구닥다리 교수법이나 된 것마냥 찬밥 취급을 받게 되었다. 시대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무모하거나 무식하거나 무성의한 교사들이 강의나 판서에 매달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새로운 교수법이나 교육 도구가 교육 그 자체인 것마냥 바라보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교실 수업에 새로운 교수 모형을 적용하는 일을 최고의 교육을 하는 일처럼 바라보는 것,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첨단 교육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 자체가 (교육적 효과나 의미 유무 여하와 무관하게) 최신의 교육이라도 된 것마냥 인기를 끄는 현상 등이 그 구체적인 방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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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교육 모형이나 교수법이나 교육 도구 자체가 교육은 아니다. 교실과 같은 이른바 ‘교육’ 공간에서 수행하는 행위나 활동상 전체를 교육이라고 할 때 우리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핵심 요소는 교육이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이라는 두 인간 주체가 하는 활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가르치는 일에 관한 한 교사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교육 수단이나 방법의 핵심이라도 말해도 과히 그르지 않을 것이다. 강의와 판서는 당연하고 때로 교사의 긴 침묵이 특정한 교육 사태의 정점을 이루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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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의 진정한 매력이 교사와 학생 모두의 변화와 성장에 있다고 믿는다. 그것(교육을 통한 변화와 성장)의 관건은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생각하는 자세와 태도를 스스로 끊임없이 돌아보고 그 결과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에 있다. 직관하고 분석하고 성찰하고 통찰할 수 있는 힘도 이러할 때 생긴다. 그저 무엇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거나 즐겁게 가르치는 일이 교사가 하는 교육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나는 교사의 존재 자체야말로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따라서 가장 개성적이고 고유한 교수법이자 교수 모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교사가 한 시간 내내 주도하는 강의와 판서만이 아니라 교사의 침묵, 심지어 부재까지 교육적 사태의 한 장을 차지할 수 있음을 우리가 인정할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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