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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Dec 28. 2023

“내가 해 봐서 아는데”

경험에 대한 개방성과 교사의 관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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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스티븐 핑커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다가 미국 심리학자 딘 사이먼턴이 수행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인용된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사이먼턴은 전문적이고 유효한 역사 측정 기법을 개발해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에서 2000년대의 조지 부시까지 미국 대통령 42명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대통령의 지능 지수나, 새로운 생각과 가치에 대한 개방성이 초당파 역사학자들이 평가한 대통령의 업적과 유의미한 상관 관계를 보였다고 한다.


부시의 지능 지수는 인구 평균보다 한참 높았지만 대통령들 중에서는 꼴찌에서 세 번째였다고 한다. 경험에 대한 개방성 측면에서는 꼴찌로, 0~100점 척도에서 0.0점(?!)을 기록했다. 이들 요소와 업적 간의 상관 관계는 부시가 현직에 있었던 2006년에 결과를 발표한 사이먼턴 말고도 그 이후 다른 세 명의 역사학자가 실시한 조사들에서도 확인된다. 이들 조사에서 부시는 대통령 42명 중 37등 36등, 39등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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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 대한 개방성(openness to experience)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고 열려 있는 상태나 성질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이다. 경험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정립한 인간 성격 특성의 다섯 가지 주요 요소나 차원 중 하나에 속한다. 여기에는 경험에 대한 개방성 외에 신경성, 외향성, 친화성, 성실성 등이 있다고 한다.


리더가 된다는 것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전제는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학교에 새로 부임한 교장과 같은 신임 리더의 다수가 개혁이나 혁신을 강하게 추구하면서 과거와 결별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듯한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개혁과 혁신이 리더의 뜻과 의지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개혁과 혁신은 필연적으로 반동을 부르는데, 이때 반동은 외부에서도 오지만 그 자신에게서도 나온다. 특히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 낮은 사람이 새 리더가 되었을 때 그의 내·외부에서 오는 반동이 크다.


이는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 낮은 사람의 특징 때문이다. 나는 우선적으로 두 가지 특징이 떠오른다. 이들은 자기 경험에 대한 애착(애정?)이 강하다. 이런 태도는 남의 경험을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새로운 일을 경험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한다. 관성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고, 관습이나 제도에 강하게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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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부시의 경험에 대한 개방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즉각 우리나라의 두 대통령을 떠올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로 일순 우리나라 최고의 경험 만능주의자 반열에 올랐다. 윤 대통령은 (그런 것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정치 이력, 통치 스타일의 차이와 무관하게 이 전 대통령의 복사판처럼 보인다. 그 역시 “내가 수사를 해 봐서 아는데.” 유의 말을 애호한다.


이 전 대통령과 윤 대통령은 정치 입문 이전과 이후의 이력과 정치 스타일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자기 경험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는 점에서 친연성을 갖는다. 자기 경험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애착이 커질 것임은 물론이다. 이 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윤 대통령도 개혁과 혁신을 끝없이 외치지만 그 말이 공염불처럼 다가오는 까닭이 다른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능 지수는 조금 그렇고, 이 전 대통령과 윤 대통령의 새로운 생각과 경험에 대한 개방성 지수와, 이들과 업적 간의 상관 관계를 조사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그리고 딘 사이먼턴이 역대 한국 대통령의 업적을 분석하여 결과를 낸다면 이들 두 사람의 등위를 어떻게 매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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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 대한 개방성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학교 교사로서 머리에 떠올린 또 다른 대상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면서 교육 및 학교 혁신에 반발하곤 하는 교육자들이다. 나는 학교 내 주류가 주로 보수주의자로 꾸려지거나, 학교가 자주 보수주의의 성채 같은 이미지로 통용되는 데 이와 같은 교사들의 태도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현재의 비민주적인 상명하복식 학교가 민주적인 학교로 변하는 출발점에 자치라는 디딤판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교육과 학교의 자치는 자율을 전제로 한다. 이때 자율은(당연히 자치도) 스스로 정한 일정한 내부 규율이나 기준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규율이나 기준이 제도와 정책, 법률 같은 상위 규범의 자장 안에 있음은 물론이다. 자치나 자율이 학교와 교사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며칠 전 여러 선생님과 함께한 교육 자치 집담회에서도 나왔지만 교사들 중에는 자율과 타율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켜 놓고 자율은 불편하고 타율은 편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상당히 많다. “불편한 자율 대 편한 타율”이라는 가상의 왜곡된 대립 구도가 최근 10여 년간 이른바 진보 교육감 체제에서 꾸준히 진행돼 온 혁신 교육에 대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자치나 자율에 대한 피로도를 높이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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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는 말이 학교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은 이 표현이 교장과 교감 등 학교 관리자의 입에서 나올 때이다.


학교, 또는 교육이 우리 사회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위계 구조상 서열을 고려할 대 학교 관리자들은 보신주의와 복지부동에 빠지기가 쉽다. 교무실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교사에게 유난히 인색하거나(“그건 선생님 개인 생각입니다.”), 은근히 침묵을 강요하는(“특별히 다른 의견 없지요?”) 발언도 자주 한다.


이럴 때 학교 관리자들이 내세우는, 다름과 새로움에 대한 반박의 핵심이 “내가 해 봐서 아는데”이다. 어지간한 반골 소유자가 아니라면 신규 교사나 저경력 교사가 교장의 이 말에 토를 달기 어렵다. 절대적인 경험치가 적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할 만한 마땅한 논거를 들이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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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글의 흐름상 내가 새로운 생각이나 경험을 절대적으로 생각한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치나 자율이 멋대로 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여기에 몇 마디를 보태자면 자치나 자율이 새로움을 전제로만 가능하다거나 자치나 자율을 학교 개혁이나 혁신의 절대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앎과 실천이다. 다시 한 번, 行易難知(행이난지)라는 오래된 격언의 깊은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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