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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05. 2024

쓸쓸하고 차가웠을지라도

장편소설 《지켜야 할 세계》와 《스토너》를 읽고

1


미국 대학에서 30년 동안 문학과 문예창작을 가르친 존 윌리엄스의 1965년작 장편소설 《스토너》와 우리나라 현직 초등교사인 문경민 작가의 2023년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지켜야 할 세계》를 연달아 읽었다.



《스토너》는 《지켜야 할 세계》 읽기를 예비하는 작품으로 고른 작품이었다. 문경민 작가는 발문처럼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스토너》와 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어.’” (249쪽)


이것이 《지켜야 할 세계》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고백처럼 된 것 같지는 않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의 일대기를 훑고 있지만 작품의 분위기나 어조, 그 안에 담긴 주제 의식은 상당히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2


《지켜야 할 세계》는 국어 교사 정윤옥의 삶을 다룬다. 정윤옥은, 자폐 장애를 앓다가 사기꾼 목사에게 팔려 가다시피 해서 헤어지게 된 동생 지호에 관한 아픈 기억을 안고 산다. 그는 학교 교실과 야학에서 만난 수연과의 관계에서 동생을 떠올린다.


윤옥에게 동생 지호와 제자 수연, 그리고 수연이가 학생 시절에 윤옥의 대학 친구 정훈과의 사이에서 낳았다가 윤옥이 수연을 대신해 키우고 있는 아들 상현은 ‘지켜야 할 세계’의 핵심이다.


윤옥의 60여 년 삶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뒤 1년여의 혼수 상태 끝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온전히 다른 사람을 지키고 돌보는 일로 채워졌다. 윤옥은 그 일들을 거의 극한으로까지 떠밀고 나아갔다. 그렇게 해서 윤옥은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존재와 세계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을까.


“반복되는 과거-현재-미래가 거울처럼 보”인다는 어느 선생님의 독후감이 이 질문에 대한 적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켜야 할 세계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반대편에서 세상의 일부와 사람들은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나타나 이들을 괴롭힌다.


그래서 《지켜야 할 세계》는 쓸쓸하고 차갑다.


3


<뉴욕 타임스>는 《스토너》가 위대한 소설이라기보다 완벽한 소설이라고 극찬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스토너》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주인공 스토너를 바라보고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서술자의 냉정한 위치를 눈여겨 보자. 그는 한사코 스토너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 손끝에서 나오는 문장들은 오로지 스토너의 것이므로 우리는 단지 서술자를 통해 중계되는 이야기만을 들을 뿐이다. 이런 서술 방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스토너》의 구성은 평면적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스토너가 꿈꾸었던 우정과 열정과 사랑의 연대기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복선, 반전,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나 스릴은 없다. 그러나 작품 끄트머리에 실어 놓은 아래 인용구를 찬찬히 되새김질하다 보면 스토너의 지리멸렬해 보이는 일생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387~388쪽)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실현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스토너 역시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387쪽)을 쓸쓸하게 관조한다. 독자의 눈에 스토너라는 존재, 그가 남긴 행적과 말과 영문학 교수로서 남긴 책 모두 흐릿하고 무가치하게 보인다.


《스토너》 역시 쓸쓸하고 차갑다.


4


정윤옥과 스토너는 거의 대부분 실패와 고통과 좌절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윤옥은 언젠가 운명처럼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대로 담담히 받아들일지라도 그때까지 “자신의 세계를 가꾸며 하루의 시간을 채우고 싶”(244쪽)다고 토로했다. 스토너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쓴 책을 손에 쥐고 이렇게 고백했다.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391~392쪽)


정윤옥과 스토너는 모두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스토너》, 9쪽)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 단순한 이름을 걸고 자신이 지켜야 할 세계를 위해 싸우고, 때로 포기하면서도 결국 살아낸다. 두 소설 모두 쓸쓸하고 차가웠을지라도 끝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의지와 따뜻한 희망을 느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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