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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부는 바람이 모두 같은 줄 알았다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며칠 전 올림픽 양궁 경기를 시청하다가 알았다. 바람은 과녁을 향하는 화살에 큰 영향을 미친다. 활터에 풍기(風旗)를 두어 바람이 부는 방향을 살필 수 있게 하는 까닭은, 궁사가 바람의 특성을 면밀히 분석하여 화살을 과녁에 정확히 쏘아 맞히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바람으로 인해 생기는 더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는 궁사가 서 있는 쪽 바람과 과녁판이 세워진 쪽의 바람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름 경륜 있는 궁사가 풍기를 보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계산하여 시위를 놓았는데 화살이 셈법대로 날아가 꽂히지 않는 것은 십중팔구 이런 차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바람이 일정한 형체를 갖춘 물건이 아니므로 공간 여하에 따라 특성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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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람의 특성을 분석하며 화살을 쏘는 궁사의 모습에서 학생의 특성에 맞춰 가며 대화를 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교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사는 처음 학생을 만나 말과 행동과 표정을 살피고, 가정환경과 부모와 주변의 친구들에 관한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그를 조금씩 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일정한 시점이 지나면 학생을 잠정적으로 규정한다.
‘00은 이러저러한 학생인 것 같다.’
‘이러저러한 학생’이라는 교사의 결론이 잘못되었다면? 학생에 대한 섣부르고 성급한 규정이 학생에게 엉뚱한 교육을 하게 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점점 교사는 일종의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져 자신이 규정한 학생 상(image)에 맞춰 정보를 선별해 받아들인다. 상에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축소하고 상에 부합하는 정보는 즉각적으로 수용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일을 몇 번 거친 끝에 교사는 더 확실한 결론을 내린다.
‘00은 이러저러한 학생임에 틀림없다.’
교육 개념의 핵심이 학생의 변화와 성장 가능성에 있다면, ‘00은 이러저러한 학생임에 틀림없다.’는 식으로 특정 학생을 고정화하는 관점은 지양해야 할 것이라는 점에 대부분 동의하리라 믿는다. 어제 그랬던 학생이 지금 이런 학생으로 있으나 내일은 저렇게 바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대체로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조금이라도 가르치려고 애면글면 애쓰고 잔소리하고 때로 야단도 치고 하는 것이 교육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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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내가 맡은 반 학생인 철수(가명)가 학교폭력 사안에 연루되어 인근 학교로 강제전학(강전)을 가게 되었다. 철수를 떠나보내고 나서도 걱정을 떨칠 수 없어 그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철수의 새 담임과 전화가 연결되어 철수에 관한 이런저런 걱정스러운 마음을 건넸다.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철수와 분식집에서 대화 나누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의 너는 너고, 지금 너는 나에게 제로 상태이다. 앞으로 서로 잘해 보자, 라고요.”
그 선생님이 철수의 과거 역사를 완전히 한쪽으로 밀어둔 채 완벽한 ‘제로 상태’에서 관계 맺기를 시작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가 처음 만나는 학생을, 학생의 과거 이력에 기대어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교사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관계 맺기에 필요한 감수성이 섬세한 분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걱정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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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의 새 담임이 학생들을 대하는 관점이 절대적이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가 각자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상대방과 관계를 맺거나 상호작용을 할 수는 있다. 이는 상대에게 자신을 숨기는 것과도 비슷한 일일 텐데, 이렇게 해서 맺어지는 관계나 상호작용이 과연 진실할까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런 점과는 별개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그를 편견 없이 대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는 앞으로 펼쳐질 인간관계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지난날을 잊지 않되 그것이 지금 새로운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더 중요해 보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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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슴에 품고서 학생들을 만나 왔고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다. 학생의 외모와 표정, 언어와 행동거지, 성적과 수업 시간 중에 내보이는 태도와 자세 등을 두고 단정적인 해석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학생의 변화 가능성과 내면의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무엇보다 학생에 대한 내 해석이 핵심을 벗어나거나 잘못될 가능성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동료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다 학생들에 관한 ‘뒷담화’ 비슷한 이야기라도 나올랴 치면 학생들을 특정한 시선 안에 가둬놓지 않는 쪽으로 말이 이어지게 하려고 대화를 유도하곤 한다. 물론 교사 앞에서 갑자기 폭발하고 급변하고 무신경한 학생들을 평정한 시선으로 보는 것은 불공평할지 모른다. 그래도 답답하고 화 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학생 이전에 사람’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 한결 마음이 가라앉는다. 사실 사람 같지도 않은 어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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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사가, 적어도 교실 책상에 앉아 있는 학생에 관한 한 무오류의 인간학자를 자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학생은 이러하고 저 학생은 저러하니 이 학생은 이렇게 대하고 저 학생은 저렇게 대하자.’ 무오류 인간학에 따른 교사의 분석법과 처방책은 완벽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학생과 저 학생의 어제와 내일은 서로 같지 않다. 그들이 보내는 오늘 이 순간조차 교사가 보는 것과 다를 수 있다. 이곳의 바람과 저곳의 바람이 같지 않을 수 있듯이.
학생을 학생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 보다 보면, 특정 교육 시스템이나 학교문화의 자장 안에서 살아 가는 한 명의 교사로서 특정한 경계선 안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학생관과 인간관을 비교적 유연하게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교사라는 위치에서 보는 여러 학생의 안과 밖을 어느 한두 개의 언어로 규정하지 않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 무오류 인간학자 교사는 교육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