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나는 나의 불안에게 편지를 썼다.
매년 12월 31일, 나는 나에게 편지를 쓴다. 전 직장에서 1년 차가 된 사원들에게 독려 차원으로 미래에 나에게 편지를 쓰는 행사가 있었다. 낯설면서도 설레는 맘을 담아 편지를 쓰고 팀장님에게 제출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내가 나에게 이렇게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는 날이 있을까? 좀 더 색다르면서도 의미 있는 편지를 계속 써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때마침 입사일이 12월 31일이었는데, 그날은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의미가 남다른 날이기도 해서 이날을 기준으로 꾸준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품고 있는 수많은 나란 존재 중 누구에게 편지를 보낼까 하는 고민은 때로는 행복하면서도 슬프기도 했다.
재작년에 우울이라는 나에게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때 당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죽음까지 생각했을 만큼 너덜너덜해진 자아를 힘겹게 붙들고 살고 있었다. 우울이라는 녀석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꺼지라고 쓰려다가 그래 너도 오죽했으면… 이라는 마음으로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방식으로 편지를 썼다.
작년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라는 주제로 편지를 썼다.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지 않는지를 깨닫게 된 순간, 엉엉 소리 내 울었다. 눈물을 닦고 코를 푸느라 첫 줄을 쓰는 데만 30분 넘게 걸렸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어버린 탓에 눈이 퉁퉁 부어버렸다.
편지는 써야겠고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정신 차리자며 얼음팩으로 눈가를 마사지하며 겨우겨우 편지를 썼다. 그렇게 온갖 고생을 하면서 나에게 부친 편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웃으며 회상할 만큼, 다른 이들에게 좋은 추억이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살아있으니 이렇게 편지를 보는 날이 오는구나, 라고, 늙은 소리를 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편지 속 내용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우울하지도 무겁지만도 않았다. 편지에 적힌 모든 문장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체는 내가 나를 반드시 살리겠다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감정들을 토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위기와 고비는 나를 갉아 먹기도 찢어 죽이기도 했다.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친구를 잃었을 때, 가족들과의 불화,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정신병들… 그럴 때마다 나는 12월 31일, 편지를 쓰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매년 편지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제법 묵직하게 쌓인 편지들을 보면 흐뭇하면서도 씁쓸한 감정이 교차하곤 한다.
편지를 읽고 쓰기를 반복할 무렵, 나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과거에 나로부터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과거에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소중한 흔적이 있는 편지를 다시 보는 것만큼 행복하고 뭉클한 일은 없었다.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은 현재, 미래에 있는 유일무이한 나뿐이다. 어쩌면 나의 현재, 그리고 미래는 예전이 썼던 편지에 내용보다 우울할 수도 있다.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온갖 욕설과 부정적인 단어들로 도배된 저주 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미래에 나는 그 글을 보며 깔깔 웃으며 말할 것이다.
이때 진짜 위기였는데, 잘 이겨냈네! 라며.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친애하는 나의 불안’에게 편지를 쓰자고 다짐했다. 32년을 살면서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나날이 위기였지만, 그것들을 잘 대처하면서 잘 버텨준 내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고마웠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