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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성휘 Feb 23. 2024

스타벅스로 피신갑니다.

나의 피난처

아무렇지 않게 던져진 말에 유독 크게 상처받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언니의 잔소리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다른 날에는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에 소소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가족을 피해 멀리 도망치고 싶은 그런 날에는 책 한 권과 노트북을 들고 스타벅스로 피신한다.

 

스타벅스가 나의 피난처가 된 것은 24살 때부터였다. 그날도 밥 먹는 시간을 포기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잔업과의 전쟁을 치르고 저녁 9시가 되어서야 퇴근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이러고 사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서러움으로 바뀌며 감정이 북받쳤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 출근을 위해 쓰러지듯 잠을 자고 싶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을 시간을 갖고 싶었다. 친구들을 불러 술을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 차마 연락하기가 꺼려졌다. 그렇다고 꾸깃꾸깃해진 몸과 마음을 궁상맞게 혼자 술을 먹으며 피기는 더더욱 싫었다. 그때 나의 눈에 띄었던 곳이 바로 스타벅스였다.


지금은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닐 정도로 카페러버가 되었지만, 그때 당시에 나는 아메리카노의 필요성(?)을 모르던 사회 초년생이었고 굳이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시간 아깝다고 생각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날은 카페가 유독 눈에 밟혔다. 게다가 스타벅스라니. 다른 카페들에 비해 가격이 비싼 곳이라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랬던 내가 무언가에 홀린 듯 그곳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무작정 들어간 스타벅스는 한산했다. 2인 이상 온 사람들 사이에 홀로 사연 있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모습을 사람들이 볼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나처럼 혼자 온 손님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눈치를 보는 나와 달리 스타벅스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용기가 났다. 평소에는 눈치가 보여 주문하지도 못했던 자바 칩 프라푸치노를 시켰다. 그것도 가장 큰 사이즈로.


완성된 음료를 들고 창가 쪽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달콤한 음료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온몸에 달라붙었던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모든 감각이 기분 탓이라고 해도 좋았다. 오랜만이었다. 내가 나에게 집중하고 조금이라도 쉼을 주는 포상 같은 시간이. 아주 찰나의 시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 여유로움이었다. 마음이 평온해지니 가슴속 깊은 곳에 꾹 눌러두었던 생각들을 꺼내 정리할 수가 있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지, 지금 행복한지. 불행하다면 왜 불행한지. 내 마음을 이리 아프게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마음이 어지러운 날, 복잡한 생각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날, 사람들로부터 감정적으로 상처 받은 날을 견디고 싶을 때는 술과 담배를 선택했다. 몸에 안 좋은 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끊을 자신이 없었다. 알딸딸해진 기분에 모든 것들이 다 긍정적으로 보였다. 뿌옇게 보이는 세상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담배를 내뿜는 연기에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술과 담배가 주는 찰나의 행복은 다 부질없었다. 맨정신으로는 도무지 쳐다볼 자신이 없는 그런 질문들을 꺼내기에 두려워 가슴에 묻고 살았다.


그날은 분명 귀신에 씐 게 확실했다. 아니, 자바 칩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머릿속과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였던 것 같다. 쳐다보기도 싫었던 질문들 하나하나에 열과 성을 다해 성실하게 대답했다. 어떤 질문을 생각보다 쉬이 풀렸고 다른 질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하고 답을 주기가 어려워 그 질문을 다시 가슴 속에 묻기도 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술과 담배로 의존하며 외면했던 지난날보다 심적으로 평온했고 내가 나를 제대로 볼 힘이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자 아주 조금이라도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마음속에 가득 찬 질문을 하나 꺼내 대답하고 싶을 때, 가족들을 피해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때 무작정 스타벅스로 달려갔다. 오늘도 답답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나의 피난처에서 요즘 푹 빠진 모리사와 아키오 작가님의 '사치스러운 고독의 맛'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은 어떤 마음이 정리가 될까? 책을 읽으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잠시 식혀볼까? 전자든 후자든 스타벅스를 나서는 그 길 위에서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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