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쓰는 이작가 Jun 11. 2018

어느 기적신봉자의 마감일지

작가님, 시나리오 어떻게 돼가나요?


이번에도 마감을 늦었다.

늦고, 늦고, 또 늦었다. 라고 할 수 있다.


마감 전날이면, 나 스스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도대체 나는 그 동안 뭘 했는가' 이다.

그러나 나는 '그 동안 늘 작업을 해 왔다'는 것이 마감을 늦는 나의 최대 미스테리다.


연말 가요대축제 같은 거 보면서 새해 소원 떠올리던게 엊그젠데, 벌써 6월이 지나고 있다는 말인가’, 라면 이해가 갈까?

당신이 집에만 누워있었나? 무려 몸살이 날 정도로 바빴는데, 지금 이 지경이란 말이다.


하룻 밤만에

오십 페이지의 시나리오를 썼던 것을 기억한다.

한낮 반나절 만에

한 회 치의 대본을 썼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어쩌다 발생한 순간의 기적들이,

마감 직전의 작가를,

희망고문한다.



구차한 소리지만, 내가 처음부터 마감을 늦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감을 잘 지켰던 나를, 아득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면서, 오늘이 가도 내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다. 이게 뭔 소리냐면, 쪽대본의 생방송 드라마라던가 순발력을 필요로하는 구성작가와 달리, 시나리오는 일단 내가 끝나고 난 후 뭐를 할래도 할 수 있고, 그러다 바빠지기 때문에 지금 내가 마감을 늦는다고 해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는 거의 않는다.


아는 것이. 때론 독이다.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마감을 지키면 됐을 일이다.


매번의 마감을 어기면서, 이건 내가 피디와 제작자들을 엿먹이려고 이러나 싶게, 시간을 끌고 시간에 끌려다녔다.

내가 오랫동안 작업을 쉬기로 결정했던 이유 중에는, 이 이유도 컸다.


마감을 지키려고 한다.


이번에도 못 지켰지만, 그렇다고 다음에는 지켜야지, 라는 다짐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근데 다음 작업은 아예 마감을 안 정했다. “작가님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라며)


마감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참고로. 이게 조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마감을 늦게 될 후배 작가들에게 말하자면, 마감의 양해를 구할 때, 어설픈 농담이나 애교를 섞지 말아라.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계속 써나가라.

그리고, 애초에 그냥 늦지 마라.

매거진의 이전글 연희동 오대수씨의 산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