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좀 올드한데?"
합평회 비슷한 걸 하게 됐다. 뭐냐면, 대본을 쓰고 서로 모니터를 해주는....줄 알았는데, '까기만 하고', '까이기만 하더라'는, 그런 자리. 괜찮다. 까이는 것도 은근 쾌감있거든. 그 날은, PD여럿이 작가 둘을 까는 자리였는데, 작가는 나와 '어떤 분'이었다. 어떤 분은 50대 쯤의, 나이는 많지만 그 해에 가장 화려한 수상 경력의 소유자였다.
합평회는 작가가 쓴 '기획안과 대본1부'를 합평하고 이후에 '다음회차2부' 혹은 '다른 기획안과 대본1부'였나...그런 식으로 2,3회 정도 자리를 갖는, 단발성 합평회였다. 방송국 입장에서야 기성작가의 안정적인(?) 기획안을 미리보기 할 수 있고, 작가 입장에서는 그래도 현직 관계자들에게 코멘트 받을 수 있는 자리라서 이어지면 좋은 인연이고 아니면 다음 기회지 뭐.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당시 나는, 이후 이어질 깊은 슬럼프의 6분의2지점쯤에 와 있었고, 글을 쓰는데 여러가지로 애를 먹고 있더 데다가 오랜만에 닥친 마감의 부담감, 그것도 영화와는 비교불가인 방송국 마감이라서, 마음 속에 두려움이 컸다. 게다가- 경쟁자(?)는 연륜과 최고상금을 갖춘 '올해의 핫가이'아닌가. 이겨먹어야 되는데.....유치한 마음도 먹었다.
어울렁더울렁- 순박한 분이셨다. 늦은 나이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도 충만하신데다, 합평회 테이블에서 일부러 다리 꼬고 앉은 나와 반대로 겸손함까지 갖추신 터라, 유난히 지랄맞던 피디 조차 나중에는 너무 나무라지 못 했다. '나 이거 너무 하고 싶은데' 하는 간절한 마음도 감추지 않고, 이게 별로면 저걸- 저게 별로면 잠시만요-'하며, 뭐든 꺼내보이셨다.
대개가 그저그랬다.
그저그랬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약간 아쉬운 무언가가.....늘 있었다. 기발하다기엔 '약간', 재미있지만 '뭔가 좀', 장점은 분명하지만 '그다지' ....뭐, 그런 애매한 평가가 비슷비슷하게 한 바퀴를 돌았다. 기 죽은 작가님 모습이 보기 안 좋아서, 일단 나나 잘해야 하는 내가 나서서 작가님 편을 들었다. 그러면 힘을 얻은 작가님은 이야기를 보태셨다. 이야기가 좀 더 상세해진다. 근데 스토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러니까 나도.....' '이게......좀......' '그러니까 뭔가.....'
'아- 묘하게 올드한데?'
이게 진짜 무책임한 소린데, 나도 정말 싫어하는 애매한 소리긴 한데, 그거 말고는 딱히 다른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진짜 무서웠다. 개연성이 없으면 구성에 박차를 가하면 되고, 에피소드가 문제면 상황을 바꾸면 되는데, 이건.....아...말줄임표 할 수 밖에 없는.....쩜...쩜...쩜.....
'감 떨어진다'는 말들을 한다. 요즘 스타일 아니다, 유행에 뒤처진다, 정서가 촌스럽다,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원인불명의 난치병인데, 잘 낫지는 않으면서 그렇다고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고, 간혹 불편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이 불편해 하지 않으면 사는데는 지장이 없고, 다만 다른 사람 가끔 "너 괜찮아?"라고 물어보긴 하는데, "어, 잘 지내"라고 하면서도 기분 찝찝한 그런 상태다. 그리고 그 '감'은 떨어지게 돼 있다. 그 어떤 도시 괴담보다 나는 이게 진짜 무섭다.
이제 나도 아무때나 젊은작가라고 할 수는 없고, 가끔 '이건 어린 친구에게 물어봐야겠군' 하는 부분도 생긴다. 감독들도 나보다 자주 어리다. 카톡으로 잡담 할 때 굳이 '뿜뿜' 따위의 수식어를 붙이고, '맛집'보다는 '존맛탱'으로 서치하라는 조언을 하는 나를 뿌듯해할 때......
'나도...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무거운 마음을 친구에게 털어놨다. 그 분이 얼마나 대단하고 그럼에도 어떻게 올드했는지에 관해. 그리고 내가 느끼느 두려움에 관해. 오랜만의 진지한 고백이었다. 오랜만에 그러니까 친구도 일단 듣는 거 같길래, 이거 오늘 이야기가 좀 길어지려나 보다 했는데, 친구가 딱- 잘라 그랬다.
"좀 써! 쓰고 얘기 해, 쓰구!!"
고민 해결! 일단 쓰고 나중에 다시 얘기 하겠습니다!
p.s. 앗싸! 고민 해결! 이라고 쓰려다가, '앗싸'지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