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저절로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찬물에 샤워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연다. 마지막 남은 캔을 딴다. 꿀꺽꿀꺽 캬아. 이내 열대야의 무더움이 가신다. 침대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쐰다.
다음날 퇴근 후에 또 다시 마지막 맥주라고 다짐하며 편의점에 들어간다.
최근 나의 한여름 일상이다.
맥주 하면 떠오르는 독일은 물보다 맥주가 정말로 싼 나라다. 필스너 한 캔이 0.3유로.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400원 정도의 가격이면 목을 축일 수 있다. 독일의 맥주는 깔끔하고 순수하다. 맥주 순수령이란 법령 때문에 보리, 물, 홉 3가지 재료만으로 만들었다. 가을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서 흥겹게 취하는 옥토버페스트가 열린다. 현재 독일에는 1,300개의 양조장과 약 6,000개의 맥주가 생산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베를린에서 마신 맥주는 한결같이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 보니 지루해졌다. 알파고가 만드는 맥주같았다. 치밀하게 계산된 청량감이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루함을 느낄 때쯤 다양한 맥주 실험을 통해 만든다는 양조장이 있어 찾아갔다.
베를린에서 느끼는 미국 맛 : 바가분트 브루어리
베를린에서 핫한 바가분트 브루어리(Vagabund Brauerei).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단골들이 많은 브루어리로 알려져 있다. 미국인 3명이 시작한 바가분트 브루어리는 나노 브루어리로 불리는 소규모 양조장이다. 다양한 맥주를 만드는 실험실에 가까운 곳이다. 그동안 베를린에서 마신 맥주들의 성격이 네모 반듯한 무테안경이라면 바가분트 브루어리의 맥주는 개성 넘치는 콜라보레이션 형태의 안경이다. (참고로 독일은 안경으로 유명하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맥주는 이 곳에서 만드는 "SOCIAL SMOKER”라는 맥주다. 이 맥주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하셨다. 미국 맛이었다. 한마디로 개성 넘치고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https://www.vagabundbrauerei.com/
실험이 가득한 바가분트 브루어리가 모험심이 강한 느낌이라면 맥주의 정석을 만나기 위해 홉스 앤 발리 브루어리로 발걸음을 향했다.
취하면 자고 가 : 홉스 앤 발리 브루어리
베를린이 재밌는 이유는 동독과 서독이 통일이 되면서 공간을 재생산하는 점이 매우 재밌다. 신문사를 개조하여 편집샵을 만들거나 공장을 개조하여 클럽을 만들거나 등등 도시 재생이 쉽게 일어나는 곳이다. 홉스 발리는 1955년부터 정육점이었던 공간을 개조하여 만든 브루어리다. 여행객을 위한 공간이 있어서 취하면 자고 갈 수 있다. 작은 양조장이지만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고집하는 전형적인 독일 브루어리다. 20년째 같은 옷을 입고 콧수염이 멋진 할아버지가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필스너 한 잔을 마시고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독일에서 느끼는 진짜 독일의 맛과 개성 넘치는 미국 맛으로 신나 있을 때쯤 선배와 함께 버거를 먹으러 갔다. 다소 무서운 언니들이 만들어 주는 버거는 베를린에서 손꼽힐 정도로 인기가 많아 늘 줄을 서야 한다. 주문을 마치고 버맥의 완벽한 조합에 입을 씰룩거렸다. 버거는 미국의 상징이고 맥주는 독일의 상징인데 여기서 만난 두 개의 조합이 완벽했다. 푸짐한 버거의 맛이 간결한 맥주 디자인이 잡아준다.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늘 디자인 작업에 포함시키고 싶은 부분이다. 심플함과 개성 넘침의 만남은 어떤 재밌는 결과를 불러일으킬까?
오늘은 집에 돌아가 미국 맥주도, 독일 맥주도 아닌 카스를 마셔야겠다.
그 밍밍함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