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집 소년 (연재소설 #7(하))
다방집 소년 7(하)
…
지난 일요일 늦은 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다방집 내실 옆 쪽방에 누웠을 때 나는 만감이 교차했었다. 그 날의 엄청난 고생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알고 싶었던 나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 마음은 충분히 술렁였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미술실에서 그 변태 같은 미술 선생의 위시 리스트인 <마음속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마음속 풍경>이라! 나는 지난주 일요일 저녁에 갔었던 대호선국의 도시를 그렸다.
분명히 요괴들이 모여 사는 도시이긴 한데 굉장히 크고 높게 치솟은 불교식 목탑 형태의 빌딩들이 즐비했던 기억이 났다. 그 뭣이냐! 단 한 번도 현실에서 본 적이 없는 상당히 기묘한 풍경이었다. 하늘에서 봤을 때 8차선 대로를 따라 양옆으로 팔각 형태나 둥근 원 형태, 사각 형태 등 다양한 형태로 된 빌딩들은 매 층마다 기와로 된 지붕 장식이 되어 있었다. 창문의 형태도 둥글거나 팔각형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혹시라도 몰라서 휘영청 밝게 뜬 보름달만큼은 절대 그리지 않았다.
우리 다방집 내실 금고 안에 있던 두루마리 그림 속에 떠 있던 그 보름달 때문에 나는 대호선국이라는 요괴들이 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고 심지어 거기서 억울한 간첩 누명을 뒤집어쓴 채 즉결심판을 받아 그 자리에서 죽을 뻔했었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묘령의 소녀, 그러니까 벨루아 공국이라는 고양이 인간들이 득시글한 나라의 공주인 샤디아 공주를 다시 만나 목숨을 부지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동안 몰랐었던 내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이 무척 기쁘기도 하고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대호선국에서의 위기의 순간에 하늘을 나는 모터사이클에 나를 태운 샤디아 공주는 그 큰 보름달을 향해 급속도로 속도를 올려 내 달렸고 ‘슈슈슝’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공간 이동을 했다. 우리가 공간을 뚫고 도착한 곳은 유럽의 여느 작고 귀여운 도시처럼 아기자기한 기운이 감도는 벨루아 공국의 수도였다. 이곳 역시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었지만 쥐 죽은 듯 조용했던 대호선국과 달리 한 밤에도 광장이나 골목길마다 사람들이 넘쳐 나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렸다. 무척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던 모터사이클이 갑자기 굉음을 내며 급정거를 했다. 역시 이 소녀는 성미도 급하고 터프한 스타일임에 분명했다. 그렇게 온몸이 쏠릴 만큼 급정거를 해 우리가 내린 곳은 아마도 예전에 내가 탈출을 했었던 곳 같아 낯이 익었다. 이곳은 무슨 왕궁 안의 어느 큰 건물 앞이었다. 땅에 내렸는데도 그동안의 엄청난 속도 때문에 나는 줄 곧 샤디아 공주를 뒤에서 꼭 껴안은 채였다. 결국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샤디아 공주에게까지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어이! 엉큼한 소년?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내가 뭘?”
“네 심장이 너무 요동을 치잖아? 너 심장에 문제 있니?”
“아, 아니! 내가 무슨 심장에 문제가 있겠어?”
“그러면 이제 이 손 좀 푸시지? 그렇게 꽉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되잖아! 여긴 안전하다고!”
“아! 그래! 미, 미안!”
나는 당황해하면서 황급히 그녀를 꽉 붙잡고 있었던 손을 풀었고 바로 그녀의 쌔끈한 모터사이클에서 내렸다.
“샤디아 공주님! 걱정이 컸었습니다.”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네,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아니나 다를까 건물에서 시녀와 집사 옷을 입은 남녀 고양이 인간들이 뛰어나오더니 일사불란하게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녀들이 샤디아 공주의 모터사이클과 슈트 점퍼 등을 챙겨갔다.
“너는 일단 나를 따라와!”
“어! 알았어.”
그러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시녀와 집사들이 일제히 나를 매우 강하게 바라봤다. ‘어라! 얘네들이 왜 이러지?’ 할 수 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뭐,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러자, 샤디아 공주라 불리는 소녀가 괜찮다는 손짓을 하며
“괜찮아! 다들 가 봐!”
그때서야 고양이 인간들은 나를 향했던 매우 강한 시선을 풀었다. 내 생각에는 하루 종일 다방집 카운터 옆 계단 아래에 새방을 만드는 일을 돕느라 이 날의 입성이 말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여기가 왕궁인데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에 목이 늘어진 면티를 입은 아이가 공주에게 반말을 하는 게 그들 눈에는 이상했던 것 같았다.
“어이! 엉큼한 소년! 이리로!”
“어, 어!”
성큼성큼 걷는 그녀를 따라 나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양쪽 석조 기둥에 여러 가지 형태의 고급스러운 조각이 되어있는 현관을 통과해 바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긴 복도를 따라 정신없이 걸었다. 복도의 긴 창문을 통해 왕궁 주변에 잘 꾸며진 정원이 보였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둥근 계단을 거침없이 뛰어 올라가더니 다시 큰 홀 같은 곳을 가로질러갔고 급기야 유리천장이 덥혀 있는 천장이 아주 높고 길쭉한 복도 같은 공간을 걸었다. 몇 번에 걸쳐 고양이 인간 경비병들에게 인사를 받고서야 겨우 도착한 곳은 창 밖 전망이 매우 좋고 환하며 널찍하고 고급스러운 집무실 같은 곳이었다. 문을 양옆으로 열려 있었다.
창문 바로 앞에는 고풍스러운 와인색의 널찍한 책상이 있었고 상당히 크고 고급스러운 안락의자가 있었다. 내가 주로 공부하던 다방집 내실 옆 1평도 채 안 되는 쪽방의 내 작은 책상과 의자 생각이 났다. 이런 데서 공부나 일을 하면 엄청 잘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책상 주변으로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소파가 잘 정돈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벽에는 커다란 서양식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담배 냄새에 찌든 다방집 홀의 냄새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은 향이 풍겨 왔다.
“들어와!”
“응, 그래!”
집무실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샤디아 공주라는 그 미스터리 한 소녀가 집무실 문을 닫더니 나에게 자신의 와인색 책상 앞 벽 쪽에 있는 테이블이 있는 의자를 권했다. 나는 우리 다방집 홀 의자들에 비해 백배는 럭셔리한 엔틱풍 의자에 앉았다.
푹신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들어 안정감이 있는 의자였다. 우리 다방집 검은색 레자 의자가 한 7년쯤 되어 가다 보니 의자의 쿠션감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우리 다방집 의자들에 비하면 이 의자는 천배쯤 더 안락했다. 잠시 눈을 감고 의자의 쿠션감을 즐기는데 자신의 책상 위에 반쯤 걸쳐 서서는 두 손을 뒤로 해 책상에 짚고 있던 공주가 느닷없이,
“나는 벨루아 공국의 샤디아 공주다.”
“알아! 내가 좀 전에 들었잖아! 그래서?” 이 말에 공주가 약간 흥분을 하는 표정이었다.
“야! 엉큼한 소년! 너! 내가 구해줬잖아! 적어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고마워! 고맙다고…… 그런데 좀 일찍 데리러 왔어야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어라! 물에 빠진 고양이 구해줬더니 생선 내놓으라는 꼴이네! 나 역시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너를 구한 거야! 나는 내가 한 약속은 꼭 지킨다고. 그건 아냐?”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눈을 봤다.
“하여튼 나는 네가 좀 궁금했었어! 지금 네 이름을 정식으로 알려줘서 고마워!”
“어! 그래! 알았어. 흠!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아네!” 이 말에 공주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정말이야! 구해준 것도 너무 고마워! 그런데, 정말, 정말 궁금해서 말이야! 네가 지난번 도서관에서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자꾸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오거나, 정신을 잃게 하거나, 이번처럼 목숨을 구하거나 하는데…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여기 사는 존재도 아닌데 말이야!”
“몰라서 물어!”
“내가 뭘 알아!”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주가 대답을 하자! 남자 고양이 인간 집사 한 명이 고양이 인간 시녀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시녀들은 꽤 큰 은쟁반 위에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능숙하게 내 옆 테이블에 차를 내려놨다. 우리 다방집 커피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고 고급스러운 찻잔에는 매우 진한 커피가 담겨 있었다. 그다음 크리스털 물 잔에 담긴 시원한 물도 내려놨고 무슨 초콜릿으로 내려놨다. 나는 목이 몹시 말라 일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시녀가 내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공주의 탁자에도 다른 시녀에 의해 차와 물 잔과 좀 다른 모양의 쵸코렛이 내려졌다.
“캐산 집사!” 샤디아 공주가 남자 집사를 불렀다.
“네! 공주님! 하명해 주십시오!”
“앞으로 이 소년에게 우리 공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세요.”
“아! 네, 공주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집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거의 생전 처음 고양이 인간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달까? 잠시 캐산이라는 집사는 나를 응시하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건 뭐지? 저 반응은 뭐람? 저 집사가 건방진 건가? 아니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살던 세상과 달리 여기서는 사람들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말씀이 끝나시면 저번처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공주님! 그런데 이번에도 저번처럼 사고를 치시면……”
“그건 걱정 말아요. 집사! 이번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해둘 테니까?”
“알겠습니다. 공주님!”
시녀들과 집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다시 공주가 내게 말을 이어 가려고 했다.
“참고로 내 이름은 조성재야! 창녕 조씨. 이룰 성, 재상 재!”
“알아! 나도 네 이름 정도는 안다고!”
“알면 됐어!”
공주가 나를 다시 한번 노려보더니 할 말을 이어갔다. 그녀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에 눈길이 갔다. 그 순간, 나는 왜 이럴까? 하는 큰 후회가 몰려왔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필 나의 눈은 그녀의 몸에 눈이 돌아가느냐 말이다. 다시 한번 더 나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여하튼 정신을 차리고 공주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네 어머니가 전혀 말을 안 하셨니? 네 아버지에 대해서!”
“아니, 전혀! 그저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 갔다는 말밖엔……!”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말은 아니고 내가 뭘 알 수 있는 게 있어야 말이지. 물어도 도통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엄마가!”
“……네 아버지는 우리 벨루아 공국의 영웅이셨어! 아까 네가 들렀던 대호선국을 비롯해 여러 적국의 침입을 막아내셨거든.”
“그,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그런데 나는 내 아버지 얼굴도 몰라! 혹시 사진이나 그림이나 뭐 그런 거라도 볼 수 있을까?”
“그건 걱정 마! 네 아버지 가문의 가족들은 정말 많으니까?”
“정말! 정말이야!”
나는 깜짝 놀라 정말이냐는 말을 수차례 다시 반복했다. 나는 엄마 외에 다른 가족을 단 한 명도 알지 못했다.
“그럼! 소개해줄 사람들이 많이 있어! 너의 가문은 우리 공국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 가문 중에 하나인 페일 가문이야!”
“그래, 그럼 내 성이 페일이야!”
“그래, 명문가이자 숱한 영웅들이 배출된 가문이라 자랑스러워할 만 해! 다만, 네가 앞으로 종종 이 나라에 들러야 한다는 것과 저번처럼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약속부터 해야 해!”
“음… 섣불리 약속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나는 내 아버지의 가족을 만나고 싶어.”
“알았다. 그것은 내가 약속할 수 있다.”
“나도 약속할게! 저번처럼 하지는 않을게!”
“참고로 또 하나!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너!’라는 말은 하지 않아 주면 좋겠어! 네 가문이 아무리 좋아도 나는 내 어머니를 이어 이 공국을 다스릴 사람이니까? 알겠니?”
“흠, 알았어. 샤디아 공주님. 됐냐?”
“야! 이 소년, 참 맹랑하네! 너 내가 만만하니! 엉! 어디 한 번 죽어 볼래!”
그녀가 내 앞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저것은? 날 또 기절시키려는……. 이러지 말라고 약속을 하라니까! 참! 일단은,
“아니, 아니! 샤디아 공주님. 내가 잘, 건방졌어... 요! 앞으로 잘 할게!”
“참,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리고 거기 초콜릿 먹어 봐! 맛있어!”
“알았어!”
나는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짜거나 맵거나 시거나 뭐든 너무 지나친 맛은 별로다. 그래도 뭐 한 번 먹어보지. 별 모양부터 삼각형에 이르는 다양한 모양의 초콜릿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검은색이었지만 그 위에 하얀색 초콜릿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중 별 모양의 초콜릿을 들어 입에 넣었다. 너무 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닌 묵직하고 중후한 카카오 향과 가벼운 단맛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초콜릿을 먹자 마음이 놓이면서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
잠이 깨자 나는 우리 다방집 내실 앞 금고 앞에 엎어져 누워 있었다. 금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겨져 있었고 다시 문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비밀 번호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엄마가 내실 문을 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밥을 먹으라고 했다. 나는 엄마를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가웠고 여전히 허리와 무릎이 아팠고 삭신이 쑤셨고 일어나면서 “에구구구!”라는 비명을 질렀다.
거의 일주일이 지났어도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 친아버지가 벨루아 공국이라는 고양이 인간들이 사는 나라의 영웅이었다니… 그러면서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났다. 그럼 나는, 나는 누구인가? 정말 내 핏속에 고양이 인간들의 피가 흐른다는 것인가? 내 친아버지와 엄마는 어떻게 만났으며 지금 내 친아버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나와 내 가족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동철 선생님이라는 이 빽이 좋은 변태 미술 선생님이 상당 시간 내 앞에 서 있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이! 너! 집중력이 좋은 모양이다.”
“하하하하하!!!!”
미술실 안에 있던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다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뭔 일이 있었는지 어리둥절했다.
“너 말이야! 내가 네 얼굴 바로 앞에서 여러 번 레드 썬을 외쳤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어.”
“네? 제가요?”
“너는 눈을 뜨고 숙면을 취하는 상당한 신공을 내게 선보였다.”
“아, 아니에요.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그만…….”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내가 너를 부른 건 네 그림이 아주 좋아! 대단해!”
“아, 선생님께서 생각나는 데로 그리라 하셔서….”
“아니, 좋아! 나는 이런 광경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어! 계속해 봐!”
“아! 네!”
보통 우리 학교의 다른 과목 선생님들은 이런 경우 사정없이 매우 패는 데 역시 저 미술 선생은 변태가 분명했다. 그는 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매우 의아하게 그 선생을 쳐다보았다. 상당히 이상하긴 하지만 뭔가 젠틀한 저 미술 선생에게 호감이 들었다. 학교라는 폭력적인 교육기관에서 학생을 때리지만 않아도 훌륭한 인품의 선생님이신 것이다.
수재들이 즐비한 비평준화 학교에서 전교 1, 2등을 다투는 경일이도 무척이나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 사람은 뭐든지 다 잘할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녀석의 그림은 강력히 웅변하고 있었다. 매뉴얼이 없는 이상한 그림 과제라는 함정에 빠져 경일이 녀석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물론 녀석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아니지 않은가?
평생 처음으로 집중력이 좋다는 칭찬을 듣던 날, 학교에 돌아와서 아시안 게임 중계를 봤다. 역시나 개최국의 대통령이 위중한 상황이라 아시안 게임 전체 분위기가 상당히 차분하게 돌아갔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은 들리지도 않았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도 지나친 세리머니는 하지 않고 자제했다. 다방집에는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소문들이 조용히 스쳐 지나가곤 한다. 그런 저런 소문에 따르면 대통령은 이미 회복 불가의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말이 돌았지만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겉으로 꺼내지 않았다.
미스 나 누나와 동네 청년 필수 씨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질수록 다방집에 와서 훌라를 치는 동네 청년들의 수가 늘어났다. 덩달아 다방집에 쌓이는 맥주병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이렇게 번 돈이 우리 다방집 주인인 엄마에게 남는 것 아니라 그다음 날, 일수 아줌마의 일수가방에 들어갔고 달의 마지막 날에는 어김없이 건물주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정작 뼈 빠지게 일을 해도 번 돈은 일수와 월세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우리 다방집 사행성 전자 오락기에 한참 돈을 쓰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발길을 끊은 배씨가 다시 우리 다방집에 오기 시작한 것은 필수 씨네 노름 멤버들 중 미친개 홍씨라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만나기만 하면 쌍씨옷으로 시작해서 쌍씨옷으로 끝날만큼 욕을 많이 썼기 때문에 나는 둘 다 별로 였다. 더군다나 음산한 느낌의 배씨는 우리 다방집에 발길을 끊은 후 구청 위생과에 민원 전화를 넣어 사행성 전자 오락기 단속반이 들이닥쳐 기계를 가져가게 만든 장본인으로 의심이 됐기 때문에 나는 그가 상당히 싫었다.
필수 씨는 그나마 양반이었지만 그의 친구들이 모두 양반은 아니었다. 미스 나 누나가 인근에 자취방을 구해 다방집 내실을 나간 것은 아시안 게임이 폐막하기 전날인 10월의 첫 토요일이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중공에 이어 종합 2위를 하고 있었고 아시안 게임 내내 개최국에 유리한 편파 판정이라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