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유서.
나는 누구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고, 누구 덕분에 죽는 것도 아니다. 가끔 그렇게 죽을 정신으로 살아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이건 그 정도가 되어보지 않으면 모를 이야기 들이다. 자존감을 높이라는 것도, 내 삶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해 망가진 것이라는 느낌뿐이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
왜 다들 살아보라고 할까. 내게 살라 말하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느꼈던 대상은 만인의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는 연예인들 이었다. 다른 이들의 자살은 물론 안타까웠으나, 그래 아주 솔직히 만인이 사랑하는 사람보단 그 정도가 덜했다. 아주 솔직히 그런 사랑을 받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각자 삶을 포기할 법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손목을 그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 하면 잠시나마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기에, 살아있는 느낌이 무얼까 궁금해서 아주 잠깐, 딱 하루, 그랬던 적이 있다. 손목에는 피가 스멀 스멀 고였다. 끝이었다. 피가 고이는건, 내가 길을 걷다 넘어지는 무릎에서도 고였고, 문을 닫다 찧는 손톱에서도 고였다. 그런 고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끔 그랬다. 살려달라 외치는 말이, 어쩌면 죽여달라 외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스스로 끊지 못하지만, 아무튼 이걸 지속할 용기는 없었다. 연애도 그랬다. 부끄럽지만, 난 관계를 끊을 용기가 없었고 차라리 당신이 내게 낸 상처로 나에겐 자살과도 같던 관계의 단절을 수면위로 올렸다. 부끄럽다. 결국에 나는 나의 선택이 아닌 당신의 선택을 책망하는 삶을 몇달이나 살았다. 뭐, 나쁘긴하다만, 당신의 죄책감이 당신이 나를 사랑했던 것에 비례한다면 슬플 것이고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것에 비례한다면 아주 조금은 덜 슬플 것이라는게 나라는 인간의 추악한 진심이다.
유서를 어떻게 써야하나 고민했다. 내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마지막 말이 무엇일까. 심지어 내 인생,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이 순간에 내가 무얼 남긴다고 의미가 생길까.
그래. 생각해보니까 살아야겠다. 망자의 말로 죄책감을 심느니, 생자의 행동으로 후회를 남기겠다는 복수심과 내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사랑은 글로 다 표현 되지 않을 것들 이었다.
아니 에르노의 책처럼, 아주 비도덕적이고 짧은 일기도 베스트 셀러가 되듯, 아주 별로인 것 같은 내 인생도 일기처럼 남기고.
그래 그 뒤에도 안 되면, 그 때 이 시공간에서 사라지자. 어딘가에 내 지옥, 혹은 천국이 있을테니. 나는 당분간 그것을 향해 살자. 유서를 쓰기 시작했는데, 아무튼 당분간 살아보자는 결론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