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바벨 Aug 01. 2019

특별한 손님

알로하는 대화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저 오늘 저녁에 부들이랑 산책할 건데 괜찮으시면 같이 산책하실래요?' 알로하에게서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왔다. 부들이는 알로하가 기르는 개 이름이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지만, 알로하에 대한 마음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좋아요. 산책해요.' 답장을 보냈다.


알로하와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저... 강아지 들어와도 되나요?" 철문으로 된 카페 문이 열리며 누가 내게 물었다.

좀 전에 창 너머로 카페 안을 유심히 쳐다보고 간 사람이었다. 가던 길을 다시 돌아 카페로 온 것 같았다.

"그럼요." 그게 알로하와 나의 첫 대화였다. 그러니까 나는 사장이고 알로하는 손님이었다.


가게로 들어온 알로하는 조금 더워 보였고 함께 들어온 개는 조금 더 더워 보였다. 알로하에게 음료를 건네주고 개가 마실 물도 챙겨주자 알로하는 본인의 개 대신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약간 수줍어하는 것도 같았는데 나는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크게 궁금하진 않았지만 손님의 개 이름 정도는 물어보는 게 일상적인 것 같아 개 이름을 물어봤고, 개의 이름은 부들이라고 했다. 내가 보들인지 부들인지 물어보자 알로하는 '부, 들, 이요.'라고 안 그래도 짧은 이름을 한 번 더 끊어 말해줬다. 그러고선 계좌이체해줘도 되냐고 물어보길래 내가 "카드 주셔도 돼요."라고 말했지만 알로하는 굳이 "계좌이체해드릴게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알로하에게 내 계좌번호와 이름을 적은 포스트잇을 건네며 속으로 '현금을 주고 싶어 그런 걸까, 카드가 없는 걸까.'생각했다. 입금했다는 알로하의 말에 내가 "네, 잠시만요. 김ㅇㅇ님 맞으시죠?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뭐랄까, 음료를 판 게 아니라 중고나라 직거래를 한 기분이었다. 메뉴판에 '미개봉 허브티, 쿨거래시 에누리 가능'이라고 써놔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알로하가 편하게 있으라고 시야에 안 걸리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했다. 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타자를 괜히 세게 입력해 소리 내보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로하가 내게 다가오더니 부들이 물을 챙겨준 답례라며 빵을 건네줬다. '빵을 파는 카페에서 빵을 건네주는 손님이라니.' 심지어 직접 만든 빵인 건지 포장지가 아니라 갈색 냅킨에 돌돌 말려 있었다. 아까는 중고나라 직거래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더니 이번엔 할머니 쌈짓돈을 용돈으로 받는 손주가 된 것 같았다. 묘한 사람 같다는 생각과, 꾸밈없는 행동에서 느껴지는 선한 기운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알로하가 준 빵 표면에 냅킨이 달라붙어버려 냅킨도 조금은 함께 먹었지만 전문적인 솜씨가 느껴지는 빵 맛이었다. 나는 알로하가 다음에 또 오면 '냅킨 브레드'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삼일쯤 지나고 알로하가 다시 카페에 왔다. 묘하게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음료를 건네줄 때 알로하의 눈 밑이 살짝 떨리는 걸 봤지만 내색하지 않았다.(알고 보니 철분 부족이었다.) 그저 알로하와 함께 방문한 개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물어봤고 덕분에 알로하는 부들이요.라고 내게 또 한 번 얘기해줘야 했다. 내 기준에서 부들이는 충분히 잊어버릴만한 이름이었다. 임팩트가 없었다. 자고로 임팩트라 함은 부들이가 아니라 벌떡이나 빡돌이 정도 됐을 때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이 녀석의 이름을 또 잊어버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왜 부들이인지 물어보았다. 알로하는 부들이를 처음 봤을 때 부들이가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부들이라 지었다고 했다. 마치 내가 아는 어느 '나쁜 주인'이 식목일에 데려온 강아지 이름을 나무로 지은 것처럼, 부들이라는 이름의 유래 또한 꽤 멋진 스토리텔링이라 생각해 인정하기로 했다. 알로하는 그때 부들이가 나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뿐더러, 눈치챘다 한들 '네가 뭔데 인정을 하고 말고 난리야. 강형욱이야 뭐야.'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부들이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잠깐만 하려고 했던 대화는 이유를 모르게 끝나질 않았고, 꽤 긴 시간 대화한 탓에 대화의 주제 또한 부들이에게서 알로하로 자연스레 넘어가게 되었다.


나는 알로하가 제빵 일을 한다는 거, 지난번 내 카페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 왔다가 문이 닫혀 방황하다 들어왔다는 거, 그 카페 사장님의 지인이라는 거, 그리고 사실 내가 먹었던 빵을 그 카페 사장님한테 주기 위해 온 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바로 옆 카페 사장님을 잘 알지 못하지만 왠지 그 사장님은 냅킨이 붙어버린 빵을 나만큼 맛있게 먹진 않을 것 같았다.

알로하가 갈 때쯤 돼서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편의점에서 제일 싼 비닐우산을 사 와 알로하에게 쓰고 가라고 건네줬다. 생각나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저번에 먹은 '냅킨 브레드'에 대한 보답이 된 셈이었다.

나는 내심 알로하가 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로하는 바로 다음 날 카페에 들렀다. 우산을 돌려주러 온 거였다. 우산의 답례로 빵도 함께 받았는데 이번에는 냅킨이 아니라 포장지에 잘 담겨 있었다. 가던 길에 잠깐 들렀다는 말과 함께 어울리는 잠깐의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알로하에게 부들이 비는 안 맞았냐고 물어봤고, 알로하는 집에 가는 동안 비가 안 왔지만 우산은 감사했다고 대답했다. 소나기에 설레발친 것 같았지만 알로하와 부들이 둘 다 비를 맞지 않았으니 어찌 됐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딱히 주고받을 것도 없으니 어쩌면 알로하가 또 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후로 알로하는 몇 번을 카페에 오려 시도했고, 불행히도 그날마다 내가 쉬는 날이라 알로하가 방문할 수는 없었다. 알로하가 '오늘 영업하시나요?'라고 보낸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쌓여갔다.


오랜만에 다시 카페에서 알로하를 마주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알로하가 꽤 오래 친한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나는 이런 사이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몇 번의 미숙한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말이 입을 통과하기 전까지, 이게 정말 내 진심이 맞는지, 배려는 묻어 있는지 몇 번씩 생각했다. 그런 탓에 대답은 느리고 말하는 중간 많이 쉬어야 했지만, 알로하는 내가 입 밖으로 꺼낸 문장을 온전히 끝마치길 가만히 기다렸다. 나를 가만 보고 있는 알로하를 보고 있자니 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더 커져갔다.


나는 알로하에게 호칭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물어봤다. 알로하가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니 나는 손님이라고 부르면 그만이었지만 왜인지 손님이라는 단어는 입에 붙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늘 주어를 생략하고 얘기했었다. 알로하는 자신의 본명은 김ㅇㅇ이지만 친한 사람들은 다 알로하라고 부른다고 했다. 편한 호칭으로 불러달라 했는데, 도저히 알로하라고는 부르지 못할 것 같았다. 그건 마치 내게 '아보카도나 아스파라거스라고 불러주세요.'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알로하'는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진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알씨는 알라딘밖에 없었을뿐더러 그마저도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며 대화를 계속 이어갔는데, 나는 알로하가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굳이 왜 이 동네로 이사 왔는지 물어보려다 알로하가 먼저 가 볼 만한 곳을 알려달라기에 부암동을 얘기했다. 알로하는 근처 맛집이나 카페를 물어본 거였는데 내가 부암동을 얘기해서 놀랐다고 했다. 자신이 이 동네로 온 이유가 부암동을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라고 했다. 부암동은 집값이 비싸서 가지 못했다고도 했다. 내가 예전부터 부암동에 살고 싶었지만 살지 못하는 이유와 같았다. 알로하가 책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과 대화를 차분히 이어나가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묘한 느낌이 드는 게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였다. 내가 만약 카페 사장이 아니었다면 알로하에게 '혹시, 넷플릭스 보고 갈래요?'하고 물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알로하와 나는 마감 시간까지 대화를 하고 함께 카페를 나왔다.


그 이후로도 알로하는 카페에 몇 번 더 왔는데,

이제 나는 알로하를 기다리는 게 일상의 즐거움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알로하는 대화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알로하는 그것에 대한 내 기분을 궁금해했다. 나는 싸울 때 말고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을 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보통은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당시 그 사람이 느꼈을 감정에 몰입해 "재밌었겠네요.", "힘들었겠다."라는 식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알로하는 "그때 사장님은 기분이 어땠어요?"라고 물어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런 식의 질문을 하는 알로하가 조금은 생뚱맞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는 알로하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당시 내 기분을 생각하다가 '알로하는 스스로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내 기분의 정체를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는 것과 그걸 문장으로 만들어 소리 내보는 일은 또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나온 내 기분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많이 슬프지만 조금은 설렌 거였고, 행복이라 생각한 일에도 슬픔과 상실감이 귀퉁이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야말로 스스로가 제일 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알로하는 내게 그걸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알로하에게 '나랑 대화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저 오늘 저녁에 부들이랑 산책할 건데 괜찮으시면 같이 산책하실래요?' 알로하에게서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