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바벨 Nov 17. 2019

카페의 역사 1

이제는 그런 것들에 능숙한 사람이 되었다.

카페를 차렸고, 폐업했다.


커피 맛을 알아버린 스물두 살. 카페 창업이라는 막연한 바람은 카페 알바를 하면서부터 판타지가 아닌 언젠가 이뤄내고 싶은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8년 후, 서른이 되는 해에 카페를 차렸다. 조용한 동네 골목에 있던 자그마한 공간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넣었다.


다행히 한샘에서 욕실 시공 기사로 일하며 배운 기술 덕분에 인테리어를 혼자 할 수 있었다. 욕실을 도맡아 공사하려면 전기, 수도, 배관, 타일, 미장, 방수, 기구 설치 등 집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일련의 과정들을 두루 알아야 했는데 이러한 것들이 카페를 차리는데 큰 도움이 됐다. 중학교 때 기술 선생님은 '기술이 중요해. 기술이 없으면 나라가 안 돌아가', 가정 선생님은 '가정이 중요해. 가정이 없으면 나라도 필요 없어'라며 만나면 다투셨는데 왠지 그때만큼은 기술 선생님의 손을 들어드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글을 가정 선생님이 보지 않으셔야 할 텐데, 두 분 다 못 보시려나.


한샘 형들은 내가 혼자 인테리어를 한다고 하니 카페가 화장실처럼 생기는 건 아닐지 걱정을 해주다가 이내 같이 의견을 내줬다. 참 고마운 형들이었다. 우리의 강점은 욕실 용품을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니까 천편일률적인 카페 의자 대신 변기를 의자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참 고마운 형들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들이 카페 비슷한 거라도 차린다면, 아니 집들이 선물로라도 꼭 변기를 의자로써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크게 기뻐할 것이라 믿는다.


인생이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우연 같은 일들이 세월을 먹고 자라 개연성을 갖게 되는 과정인 것일까. 그저 돈을 벌다 마주친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떤 마음을 주고받았기에 이토록 친해져서 돈 버는 시간도 뒤로 한 채 한낱 변기 얘기로 떠들고 있는 걸까.


내가 처음 카페 알바를 할 때 결국 카페를 차리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앞으로 어떤 우연을 만나고 또 어떤 개연을 가지게 될까.




스물두 살의 내가 처음 카페 알바를 한 곳은 부암동에 있는 초콜릿 카페였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부암동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나는 내 마음에 드는 동네를 발견한 것과 그곳에서 일하게 된 걸 온 맘 가득 기쁘게 여겼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다가 내 얼굴에 딸기 우유를 뿌린 진상 손님을 겪은 직후인지라 커피를 뿌리는 카페 손님을 상상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딸기 우유보다는 입맛에 맞을 것 같았다.


카페 사장님은 교직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손님으로 이 카페를 자주 들렸었고, 친해진 전 사장님의 권유로 카페를 인수하게 되면서 퇴사했다고 하셨다. 동네의 한적함과 그곳에 터를 잡은 사장님의 일상이 근사해 보였다. 그 이면에 있는 불안까지 공감하기에 당시의 나는 해맑았다. 많은 청춘이 그러하듯 나 역시 해맑은지 몰랐지만 해맑았다.


해맑음과 열정을 잔뜩 품고 일하기 시작한 초콜릿 카페에는 손님이 오지 않았다. 거리에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간혹 들어오는 손님들도 길을 착각해 우연히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2시간 알바로서 나의 역할은 열정적으로 손님을 기다리며 사장님과 커피를 마시다가 거의 없는 손님을 아쉬워하며 해맑게 퇴근하는 일이었다. 해맑은 나를 보며 사장님은 오히려 내게 미안하다고 종종 말씀하셨는데, 나는 이 말이 얼마나 다정하고 하기 어려운 말인 건지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우유와 고급 초콜릿을 냄비에 함께 넣고 끓여내는 초코 우유는 사장님의 자랑이었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사장님은 가스 불을 켜고 음료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럼 나는 디저트를 준비하거나 서빙에 필요한 세팅을 미리 해둔다. 서빙까지 통상 5분 정도 걸렸지만 음료를 만드는 도중 손님이라도 들어오는 경우엔 조금 더 걸렸다. 음료 4잔을 서빙하는데 15분 정도가 걸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초조해하던 나에 비해 사장님은 여유로워 보였는데, 아마 그때 나는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은 초조함 대신 유유함과 고상함 같은 것들을 내포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속한 카페의 번창을 바랐지만 사장님은 철저한 낭만주의자였다. 그렇지 않다면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사람 없는 거리의 카페를 인수하지도 않았겠지. 낭만적인 사람들은 다들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런 사람들이 좋은 것일까. 성공보다 성숙을 선택한 사람들. 어쩌면 사장님은 초코 우유의 숙성으로 성숙한 카페 문화를 만들고자 한 건 아니었을까.




두 번째로 일한 카페는 '달콤커피'라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나는 군 전역 후,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대학도 휴학하고 최소한의 알바만 하며 거의 모든 시간을 음악에 투자하고 있었다. 엄마와 둘이 살고 있을 때였는데 월세와 집에 들어가는 일체의 생활비를 엄마가 냈고, 나는 그저 내 몫의 생활비와 음악 학원비를 벌며 지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미래와 항상 빠듯했던 생활비를 제외한다면 그래도 괜찮은 생활이라 여겼다. 내게는 언제든 부르면 나오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고, 음악을 하며 만난 동료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음악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좋았다. 가끔은 내가 마치 음악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도 내 앞가림만 잘한다면 문제없는 삶을 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은 별생각 없이 출근길 만원 버스에 올랐을 때 찾아오는 급똥 신호처럼 다가온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학원에 나가 연습을 하고 있던 날, 엄마가 일하다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스물세 살이 된 나에게 찾아온 작은 시련이었다. 엄마의 병원비와 월세와 생활비가 내 몫이 된 덕에 나는 카페 알바가 아니라 풀타임 직원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학원을 그만뒀고, 날 예뻐하던 시우형과 준비 중인 밴드를 도망치듯 탈퇴했고, 친구들이 부르는 게 싫어 연락을 끊어버렸다. 음악도 친구도 엄마도 본인도, 그 시절의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보지를 못했다.


나는 그 이후로도 실수를 거듭하면서 음악과 내 삶의 균형을 맞추는 법을 천천히 배웠다. 삶이 위태로울 때는 음악을 멀리하고 돈을 벌었으며, 여유가 생기면 음악과 다시 가까이 지내다 몇 번씩이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욕망을 주체 못해 삶의 균형을 자주 잃었고, 몇 번의 상처를 주고받고 하다 보니 서른이 되어 있었다.


세상이 인정하는 성과는 딱히 없었다. 다만 오래도록 불안한 상태를 버텨낸 것에 대한 성과는 있었다. 하루하루의 절실함을 먹고 자란 나에 대한 괜찮은 변수였다.


이를테면 그때의 나는 음악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어디서든 잘 살 것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오늘 내 하루를 잘 보내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나가는 것.

이제는 그런 것들에 능숙한 사람이 되었다.

이전 01화 특별한 손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