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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Dec 25. 2019

카페의 역사 2

사람이 너무 곧게 있으면 부러진다.

대전에 있는 룸 카페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다. 집 근처(서울 은평구)에 생길 카페 오픈 멤버를 구한다는 말에 호기심이 들어 면접을 봤는데, 아직 공사 중이니 그전에 대전으로 내려가 이주 정도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숙식을 지원해 주는 대신 테스트 기간이라며 돈은 조금만 주는 조건이었다. 최저시급이 안 되는 돈이었지만 나는 연고도 없는 대전에 내려가 낯설 시간도 없이 일을 배웠다.


룸 카페의 특성상 손님이 오면 방으로 안내를 해줘야 했고, 일한 지 일주일쯤 됐을 무렵 내가 안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그만뒀다.


손님을 안내할 때 재떨이를 함께 챙겨주라는 것이었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지만 미성년자 같거나,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지만 미성년자 같은 손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일하는 이상 너도 그렇고 나도 그래야 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미성년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과 담배를 피울 수 있게 어른들이 도와주는 건 다른 얘기였다. 사장님에게 이야기하니 어차피 어디선가 담배를 피울 텐데 못하게 하면 아이들이 더 음지로 숨어들지 않겠냐는 말과, 룸 안에서 재떨이 없이 담뱃재를 털다가 화재라도 나면 어떡하겠냐는 말을 들었다. 무게감 있던 사장님의 말을 들으며 '무슨 개소리를 이렇게 젠틀하게 하나' 생각했다. 사장님 입장에서 보면 이해 가지 않는 말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았고 또, 그렇게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다.


사장님은 그렇다면 함께 일할 수 없겠다는 뜻을 전하며, 이제 곧 서울로 올라가 다시 볼 일 없는 내게 자신이 젊은 시절 향유한 고고했던 가치관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여러 번, 사람이 너무 곧게 있으면 부러진다는 말을 했다.


'사람이 너무 곧게 있으면 부러진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이 말을 떠올렸다.

나는 몇 번이나 부러졌을까. 부러진 곳이 잘 붙어는 있을까.


힘 빼는 법을 몰랐던 20대 시절, 나는 나를 해할 것 같은 것들에 대해 더 힘을 주곤 했다. 뉴스에서 어떤 사건들을 접하게 될 때면 군대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나 그런 일에 당최 힘을 뺄 수가 없었다. 힘을 빼면 나의 나약함과 한심함이 드러나진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저 긴 세월 내 옆에 있어준 것으로 내게 나약하고 한심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치만 나는 이토록 따스한 나의 사람들이 자주 손해 보고 상처 입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화가 났다. 그럴수록 그들의 몫까지 더 힘주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직되고 웃음기 사라져 가는 내 모습을 보며 나의 사람들은 속상해했는데,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이 속상했다. 그땐 그들을 위로해줄 방법을 몰랐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데 필요한 여유나 노련함, 자상함 같은 것들에도 많은 체력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한참이나 걸려 알게 되었다.




네 번째로 일한 카페 'Thanks Coffee'는 어느 곳보다 평온하게 일했던 곳이다. 내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 사장님과 둘이 함께 일하는 작은 규모의 개인 카페였는데 그곳에서 나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사장님은 이따금씩 내가 그날 그곳에서 번 돈만큼의 밥을 사주기도 했고, 정말 축하해줄 것 같은 사람이 해줬으면 좋겠다며 나에게 결혼식 축가를 부탁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사장님에게 권위가 아니라 비슷하게 흔들리고 고민하는 사람과의 어떤 연대감 같은 걸 느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권위보다는 연대감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직 내가 권위에 눌려보기만 하고, 누려보지는 못한 까닭일지 모른다.


결혼과 함께 가게를 넘긴 사장님은 다른 나라로 긴 여행을 갔고 나는 다른 카페로 갔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후 한샘에서 일을 하던 나는 그간 몇 번의 사장이 바뀐 'Thanks coffee'에 방문했고, 그곳에 있던 새로운 사장님은 맨 처음 카페 사장님이 만들어 놓은 음료 쿠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쿠폰에 도장을 10번 찍으면 어떤 음료든 무료로 주는 탓에 손해가 크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내가 전날 잠을 조금만 덜 잔 상태로 그 이야기를 들었었다면 '제가 여기서 일해봐서 아는데, 저 때는 말이에요.' 하는 제왕적 꼰대 솔루션을 제시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샘 본사가 상암동으로 옮겨진 탓에 들르게 된 'Thanks coffee'의 커피는 여전히 맛있었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추억은 남아 있었기에 장소가 주는 여운은 아늑했다.




'Thanks coffee' 이후에 들어간 곳은 홍대에 있는 디저트 카페였다.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즈음부터 내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그건 처음 본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내가 음악을 한다는 걸 꼭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하고 나면 사람들은 나에 대한 어떤 궁금증이 풀린 것처럼 반응하곤 했다. 어느 어른들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카페에서 일하는 나를 한심한 녀석에서 패기 넘치고 세상모르는 청춘쯤으로 고쳐 생각해 주는 듯했다. 나는 내가 세상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그런 시선이 썩 나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그 버릇은 이후에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고쳐졌다. 자고로 버릇이란 누군가에게 지적받거나 스스로 창피해하는 시간이 장기간 지속되다 보면 웬만큼 고쳐지기 마련이다. 아마 내가 지금도 음악한다는 얘기만 계속하고 다닌다면 친한 사람들은 날 패기 넘치는 청춘이 아니라 그냥 패기로 작정할 것이다.


당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좋은 책들을 한시라도 빨리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은 욕구와 내 음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해병대에 다녀왔지만 작은 말 한마디에도 흔들렸고, 언젠가 또 큰돈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항상 마음 한편에 초조함을 갖게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돈을 많이 벌자는 생각보다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이 더 컸다. 그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건 엄마가 한 번 더 쓰러지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도망치듯 탈퇴한 밴드는 데뷔를 한 뒤 홍대 클럽에서 거의 매주 공연을 했는데 나는 홍대에 있는 카페에서 거의 매일 일을 했다. 누가 비교한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자격지심을 느꼈다가, 관객 없는 공연을 매주 버텨내고 있는 밴드 휴이의 멤버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느끼기도 했다. 몰래 공연을 보러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보단 나도 빨리 음악을 만들어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아직 해병대 정신이 남아있던 건지 나는 10시간 카페 근무 중 주어지는 1시간 쉬는 시간에 밥을 먹는 대신 서점에 달려가 책을 읽었다. 대부분의 밥은 출근하기 전이나, 배고픔을 참았다가 퇴근 후 집에서 먹었다. 그랬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스물다섯의 내가 훨씬 건강했다.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음악 작업을 했고, 쉬는 날에는 미디 레슨을 들으러 다녔다.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을 거의 음악 만드는 일에 썼는데도 나의 음악은 늘 아쉽게 들렸고, 그 탓에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나는 시간에게 압박감을 느끼며 형체 없는 무언가에 쫓기듯 자기 발전을 갈구했는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자기 발전이 아니라 자기 착취였다. 나의 청춘을 착취한 것이다. 누리고 즐겨도 모자랄 청춘을 누르고 비틀어 꾸역꾸역 성과만 짜내려 했고, 그 탓에 밖으로 삐져나온 얼마간의 성과로 자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포장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들인 감정만큼 꼭 일이 잘 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쏟은 감정과 비례한 성과를 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성과는 감정에 비해 옹색하게만 느껴졌고, 결국 나는 형태라도 유지하기 위해 질소를 채워 넣어 포장한 성과자가 되어갔다.


청춘을 착취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음악을 만들어 낸 나는 심지어 이상마저 높은 사람이었다. 음원 발매를 위해서 후반 작업(믹싱, 마스터링)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왕이면 돈을 더 들이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작업을 해 온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려고 열심히 일한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패기 넘치는 청춘으로 생각해 준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윤종신 님, 이승환 님, 토이의 앨범을 믹싱한 엔지니어 분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녹음실 주소를 알아내서 손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전화번호를 알게 돼, 미리 써둔 손 편지를 사진 찍어 문자로 전송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상냥한 답장과 함께 작업 승낙을 받았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만나서 하기로 했다. 카페에 손님 없이 혼자 있을 때였는데, 텅 빈 공간에서 혼자 기뻐했던 그 기억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내 인생 그렇게 들떠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당시 나에게 큰 사건이었다. 유명한 사람과 작업할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도 나를 둘러싼 세상이 변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장을 하면 몰라보게 달라지는 내 여자 사람 친구들처럼 서툰 내 음악도 그분의 손을 거치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로 카페 마감 청소를 하는 내내 음악 생각만 했다. 엔지니어분을 만나러 가기 전까지 어떻게든 볼품없는 편곡을 더 손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다음 날 바로 카페 사장님에게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말을 했다. 충분한 시간과 함께 이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사장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도 한몫을 했다.


사장님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집안의 재력과 과거에 했던 나이트클럽 사업과 자신이 만났던 재벌가 여자 친구 얘기를 자주 했고, 유명 연예인과의 친분을 자랑하며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카페가 오픈한 지 몇 달 안 됐었고, 매출이 10만 원도 넘지 못하는 날이 많았는데 사장님은 백화점 입점을 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정말로 몇 달 후에 목동 현대 백화점에 입점을 했다. 그 탓에 나는 홍대 본점에서 목동 현대 백화점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또 홍대로 돌아오는 적응하기 어려운 날들을 보냈고, 그 과정 속에 생겨난 불만과 쌓인 피로감만큼 사장님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만둬도 될만한 곳이었다고 얘기해도 상관없지만, 꼭 그 이유들이 아니었더라도 아마 나는 일을 그만뒀을 것이다. 그건 일을 관둬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대책 없는 확신을 가져버리고 마는 나의 근본적 무모함 때문이다.


나는 사장님에게 솔직히 말하고 적당히 끝나는 상황을 상상했었지만 대화는 서로의 일방적인 요구뿐이었다.

그만두겠다는 나의 입장과 더 일하라는 사장님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영업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제안한 대안들도 사장님은 언짢은 것 같았다. 대화를 하면서 서로 감정이 상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좋게 풀어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권위적인 사장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반발심이 일었다. 사장님 역시 논리적인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동안 서로가 상대방을 더 배려했다고 생각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사장님은 영업이 끝나고 불 꺼진 매장에서 밖에 있는 가로등 불 하나를 조명 삼아 대화중이었다.


대뜸 나에게 엔지니어 분의 이름을 물어본 사장님은 본인이 가진 인맥을 통해서 엔지니어 분에게 나 같은 사람이랑 작업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했고, 나아가 과거에 자신을 신고했던 직원과 겪었던 소송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협박이었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상황을 판단하기 전에 덜컥 겁부터 났다.


나는 무릎을 꿇고 사장님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며 그러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노련한 사장님은 내게 똑같이 무릎을 꿇으며 자신도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건 사과로서의 '미안하다'가 아니라 '미안하지만 난 말할 것이다'라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겁이 나면서 화도 났지만 나는 사과만 했다. 계속되는 내 사과에 사장님은 '미안해요, 선욱 씨.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같은 부드러운 폭력의 말을 반복했는데, 그 와중에도 일을 관둘 생각을 고쳐먹지 않은 나도 대단히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던 건 확실하다.


그때 그 가로등 조명 아래 어둡고 무거운 공기와 비아냥거림은 이후로도 한참 생각이 났다. 누군가가 힘으로 내 인생을 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걸 감각으로 느낀 일들 중 하나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마지막 달의 임금을 체불당했다. 160만 원 정도였다. 그 돈이면 치킨을 매일 한 마리씩 세 달은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사장님에게 전화를 하니 사장님은 나에게 노력해서 받아보라는 이야기를 했다.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그 돈을 받아내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히 그날 나를 완전히 뒤덮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난 뒤 사장님에 대한 내 감정은 겁보다는 분노가 훨씬 많았다. 돈으로 싸우면 내가 질게 뻔하지만 법으로 싸우면 내가 질 것 같지는 않았다.(법도 돈으로 다뤄지곤 한다는 걸 그때는 지금만큼 체감하지 못했다.)


며칠 후 나는 사장님에게 부여받은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청에 갔다. 노동청 정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 월급을 줄 생각이 없는지 물었고, 사장님은 없다고 대답했다. 노동청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하니 노동청 공무원은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 접수가 되기 전 월급을 주는 게 어떤지 권유했고, 5분 뒤 나의 월급은 입금됐다. 나는 '어쩌면 사장님은 노동청 공무원이 사건 접수가 되기 전 중재를 위해 전화한다는 걸 알았던 걸까' 생각했다.


엔지니어 분을 만나러 가기 전날까지 나는 혹시라도 사장님이 안 좋은 이야기를 해 작업을 거절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다행히 작업 마지막 날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그분은 명성에 걸맞게 한결같이 친절했고 훌륭한 실력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물어보니 그분은 '카페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나랑 작업하려고 찾아온 게 신기하고 대단해서, 그리고 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어서.'라고 했다. 기분 좋은 말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제일 기분 좋았던 건 그분이 내 노래가 좋다고 칭찬해 준 거였다. 그날은 정말로 내가 프로가 된 것만 같았다.


얼마 후 나는 대한민국 최고 엔지니어의 손을 거쳐 완성된 내 음악을 들었고, 아쉬움이 들었다.

사운드는 누가 뭐래도 나무랄 데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나의 편곡 실력과 스튜디오 보컬 녹음 때 걸린 코감기였다.


그렇게 완성된 세 곡의 음악을 발매하고 나의 첫 싱글 활동은 끝이 났다.

어떤 뮤지션들이 음악을 내고 활동을 시작한다면, 나나 내 주변의 뮤지션들은 음악을 냄과 동시에 끝이 난다. 활동이랄 게 딱히 없다. 활동이 있다면 그건 생계활동일 것이다.

나는 다시 왕성한 생계활동을 이어가야만 했고, 이왕이면 즐겁게 돈을 벌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물다섯 청춘의 싹수없거나 대책 없이 패기 넘치는 생각이었다.



'*' 부분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패러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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