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희경, 생각의 일요일들
일기를 꾸준히 쓰는 편이다. 매일은 아니고, 듬성듬성 꾸준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 부러워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따라 해 보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매해 1월 21일쯤 깨닫는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드문드문 쓰는 일기라도 이토록 꾸준히 써온 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매일 쓰지 않는 일기에도 장점은 분명 있다. 빈 곳이 많기 때문에 일기장을 주로 언제 찾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나 할까. 한 해가 마무리될 때마다 1년간 쓴 일기를 집어 들고 나만의 연말 결산을 하는 습관까지 몇 년째 들이다 보면, 가장 많이 쓰는 문장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는데 간간이 쓰는 일기 속에서 나는 이 문장을 참 지겹도록 써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면접을 앞두고 있거나 큰 프로젝트를 맡기 전, 심지어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기 전 조차도 나는 이 문장과 함께 일기장을 찾고 있었다. 변화를 맞이하기 전에 치르는 일종의 의식처럼 말이다.
마르고 닳도록 같은 질문을 던져왔지만 명쾌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스로를 응원하는 ‘할 수 있어’라는 흔한 말조차 내 일기장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곳이 일기장이니까. 나는 잘해 낼 자신이 늘, 정말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우물쭈물 주저하는 모습만이 일기장에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저렇게 불안해했지만 일기장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서 돌아보면,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걸어온 게 보였기 때문이다.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늘 일기장을 찾으며 자신감 없는 모습을 내비쳤지만 어설프고 모자란 모습으로도 엉금엉금 발자취를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는 쪽으로 삶은 스며든다.’ 내가 좋아하는 은희경 작가님의 문장이다. 나도 이렇게 스며들 줄 몰랐는데. 좋아하는 문장이기는 했어도 실제로 그러함을 체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맞이하게 됐다. 물론 아직 스며드는 중이다. 스며듬에도 단계가 있다면 아직 0.001단계 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앞으로도 마음껏 스며들 수 있을 것만 같다.
헛발을 내디뎠다 생각했던 길에 내 발자취가 남아 지반이 단단해졌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걸어갔던 불안한 발자국들이 모여 지금의 토양이 되었다. 이 토양 위에서 나는 여전히 떨리는 걸음으로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테지만, 내가 딛고 있는 토양이 얼마나 비옥한지 알기에 계속 걸을 수 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잘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이제는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잘하고 있던 거였어.